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애니-일본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애니-일본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정부 여가부 존치 방향으로...폐지 논의 없어 감돌
- 지금 이순간도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위험 중독물질 대한민국인디언
- 고대 에타 근황 ㅇㅇ
- 한남,한녀가 시위하는법 차이 ㅋㅋ 아키마코토
- 여자들이 말하는 대화가 잘통하는 남자.jpg 야갤러
- 20년전 게임 엔딩…jpg ㅇㅇ
- 한화 이글스가 여기서 나오네 ㅁㅊ;; 칰갤러
- "다 마실테니 가져와!", 맥주산성 갇힌 손님.jpg ㅇㅇ
- 깜짝 .. 기안84가 편의점 도시락 먹는 법 ..jpg 직정령
- 허경영 정치탄압 당했다..jpg 도라형
- 최형우 “기아 왕조 가능하다” ㅇㅇ
- [매니저리서치-①~④]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감독은? 퓨갤리서치
- 동덕여대로 핫한 와중에 상명대 근황 주갤러
- 로마 시내의 고대 로마 유적 비앙코
- 응우옌국의 신흥 민족종교 Caodaism (20장) ㅇㅇ
진지빨고 쓰는 레데리 시리즈109 - 미국에서 보안관의 권위가 높은 이유
https://youtu.be/JPNqx3oPfX4안녕, 레붕이들. 이번 109번째 시간에는 미국에서 대체로 '경찰'보다 '보안관'의 권위가 더 높은 이유에 대해 짧고 간결하게 똥글을 갈겨볼까 해.다들 잘 알다시피, 치안이 고도로 안정된 선진국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잘 실감하지 못하지만, 본작의 배경인 서부개척시대 당시의 미 서부는 본 연재글 시리즈에서도 수없이 설명하였듯, 문자 그대로 법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마경 그 자체였음.물론 그 당시에도 당연히 미국 연방정부(중앙정부) 산하의 공권력 즉 '경찰'은 멀쩡히 존재하긴 했음. 근데 문제는 아래와 같았음.첫째로 연방정부가 위치한 동부에서 무법지대인 서부까지는 물리적으로 그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고, 둘째로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건국 13개 주'가 밀집되어 있어 일찍이 지역 개발에 착수, 도시화, 근대화가 완료된 동부에 비해 당시 서부는 애당초 기초적인 기반이랄 게 전무하다시피 한 황토천지,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보니까 광대한 국토 대비 인구 분포도 무척 낮았던 데다, 또 그렇다 보니 자연히 경찰 같은 사법집행기관 역시도 적재적소에 존재하지 않았음. 동시기 미국 동부와 서부 간의 격차를 단적으로 나타낸 사진임. 거기다 지금이야 미국은 의심의 여지 없이 수많은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지만, 서부 개척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제 겨우 반세기 남짓한 응애국가에 지나지 않았기에, 영국이나 프랑스 등 구대륙의 전통적인 선진강국들에 비해서 국가 행정력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못했음.위 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미 동부와 서부는 사실상 이세계나 다름없었음. 이런 현실 속에서 아직 2류 신생국가에 지나지 않던 미국 입장에서는 넓어도 너무 넓은 국토의 치안을 세심히 관리하기란 실로 불가능했음. 그렇다 보니 아무리 공권력이 멀쩡히 존재한다 한들, 결국 이를 투사시킬 국가의 행정력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니, 당시 서부민들에게 경찰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공권력의 첨단화가 완료된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미국은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도시가 아닌 어디 시골 달동네나 오지 같은 데에는 경찰이 차 몰고 오는 데만도 한세월 걸리는 경우가 지금도 비일비재함. 심지어 저 당시 교통수단은 차가 아니라 말이나 마차 따위가 전부였으니 오죽할까 싶음.본작의 주역 '반 더 린드 갱단'이 광대한 미 대륙을 들쑤시며 다수의 살인, 열차 강도, 은행 강도 등등 그렇게나 많은 초강력 흉악범죄를 닥치는대로 저지르고도 무려 20년 이상이나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와 같은 까닭에서였음. 즉 범죄가 발생해서 공권력이 신고 접수하고 현장에 출동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진짜 조오오오온나게 느려터졌기 때문에, 범죄자들 입장에선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던 것.여기서 당시 서부의 치안을 좀 더 알기 쉽게 요약하자면 딱 이런 느낌임. 상기하였듯 광대한 국토와 행정력의 미비, 교통수단의 한계 탓으로 인해 범죄자와 대면한 시민 입장에선, 경찰에 신고한들 현장까지 오는 데에만 기러기 한백년이라 경찰이 도착할 때쯤이면 벌써 상황 다 끝나 있었음. 말인즉 이미 강도나 도적들이 들이닥쳐서 총 들이밀고 가진 거 다 내놓으라고 위협한 다음, 느긋하게 털 것 죄다 털고 한참 전에 달아난 마당에 경찰이란 것들은 한참이나 뒤늦게 와서 뒷북이나 치고 앉았으니, 당시 서부민들의 입장에선 목숨이나 안 털리면 다행일 지경이었단 소리임.게다가 미국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부터 일찍이 정착민들의 자위권과 생존권 보장 차원에서 민간인의 자유로운 총기 소유가 헌법으로 명시된(미 수정헌법 제2조, 무기 소지의 권리) 국가다 보니, 무능한 정부와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국민 개개인이 이러한 범죄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관념이 생겨났고, 그게 온갖 강력범죄가 일상적으로 만연했던 서부개척시대에 이르러선 완전히 뿌리박히기 시작함.서부개척시대가 한창이던 1871년에 설립된 '전미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 NRA)의 전 회장 '찰턴 헤스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미국인들이 왜 총기에 그토록 강박적으로 집착하는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쉽게 말해 총이 없으면 뒤지니까. 이게 개인의 생존권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임. 당장 본작에서도 총 없이 완전 비무장으로 밖에 나돌아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들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겠지.그래서 서부민들은 이러한 강박관념의 연장선에서, 범죄에 대항할 수단으로 기존의 있으나 마나 한 경찰을 대신할, 새로운 치안유지조직을 자체적으로 창설하기에 이르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보안관'(Sheriff)임.본 연재글에서 여러 번 썼듯 이렇게 탄생한 저 당시의 보안관은 경찰 공무원이 아니라, 경찰의 역할을 대행하는, 촌락의 공인된 방범대장으로, 나중에 지자체나 정부에서 인정받은 민간인 출신들로 이뤄졌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결성된 방범대원들 중에서 그중 특히나 싸움을 잘하고 총을 잘 쏘는, 동네에서 제일 힘 센 사람을 촌민들이나 촌장이 직접 찾아가서 가슴팍에다 별 하나 달아주고, "당신이 오늘부터 경찰을 대신해 이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는 '보안관'입니다!" 하면서 완장질 하라고 시킨 게 보안관의 시초임.이게 지금 시각에서는 빼박 경찰 공무원 사칭이지만, 앞서 말했듯 애당초 그 경찰력이 제대로 투사되지 못해 치안을 잡아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정부 입장에선 지들도 캥기는 게 있는지라 뭐 어쩔 방도가 없었음. 그래서 설령 저런 무근본, 무자격 민간인들이 지들 좆대로 만들어낸 거라 해도, 처한 현실상 일단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자칭타칭 보안관이라 칭하는 저 민간인들을 나중에 정부에서 실적 여부에 따라 정식 법 집행관으로 인정해주게 되면서, 이 보안관 제도는 지금까지 미국의 사법체계의 일축을 담당하며 쭉 이어져오고 있음. 첨언하자면 당시 보안관들 중에는 개심한 전직 무법자 출신들도 있었는데, 촌민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 느낌으로다가 '이렇게 무서운 양반이 우리 마을의 보안관으로 있으니, 범죄자들이 겁먹어서 우리 마을을 함부로 못 넘보겠지?'란 마인드로 보안관으로 추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의외로 이게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함. 이런 걸 알면 알수록, 미국이란 나라는 참 재미난 나라가 아닐 수 없음. 또 이는 그만큼 당시 미국 서부의 치안이 심각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못 들었나 본데, 내가 이 동네 '보안관'이야."- 영화 <스파이더맨3> 중에서.참고로 영화 <스파이더맨3>에서 은행강도 샌드맨과 대면한 '피터 파커'가 자신을 '경찰'이 아닌 '보안관'이라 칭한 것도 다 이런 이유임. 즉 보안관이 태생부터 법 집행 권한을 위임받은 민간인이자 일종의 공무원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정식 경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자 배달을 업으로 삼고 있는 알바생 신분인 민간인 피터에게 딱 들어맞는 셈이라 할 수 있겠음. 보안관과 경찰의 개념을 알고 보면 참 깨알 같은 디테일이 되겠음.아무튼 당시 서부민들 입장에선 법은 존나게 멀고 총은 존나게 가까운 현실 속에서, 저어어어어어어어어기 멀리 있는 경찰보다는 바로 우리집 옆집에 계신 든든한 국밥 같은 보안관 나리를 더 신뢰하는 것은 당연지사. 거기다 보안관은 경찰보다 관할권도 더 넓고,(경찰은 시, 보안관은 카운티의 치안을 관할함.) 단순히 치안 유지뿐 아니라 사건 수사, 재판 처리도 함께 도맡았기에 그 권위가 상당했음.(물론 이게 다 사람이 없어서 이런저런 업무를 겸사겸사 죄다 떠맡게 된 거지만.) 즉 미국에서 보안관의 권위가 비교적 높은 이유는, 따지고 보면 이러한 역사적인 연유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며, 이러한 기조가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내려오는 셈임.물론 보안관은 애당초 그 태생부터가 정식 공무원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정부로부터 번듯한 정식 법 집행인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당연히 보통 실력 갖고는 택도 없었음. 그래서 경찰처럼 근무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다수는 대충 평소 집에서 입던 후줄근한 평상복 차림에, 해진 부츠 질질 끌고 나오는 인심 좋은 시골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지만, 그 무력 하나는 대부분 존나 개쩔었음. 근본이 없었던 만큼 실력으로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사실 경찰과 보안관은 명함도 못 내밀 상위 호환으로 미국 연방정부 직속 최강의 킬러 집단 '연방보안관'(U.S. Marshal)이 따로 있었지만, 상기한 이유로 어지간히 심각한 초광역 강력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민간인이 일상에서 접해 볼 수 있는 건 보안관 정도까지였음.이번 시간에 내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임. 미국 서부개척사에서 보안관은 뺄래야 뺄 수 없는 아이콘이지. 보면 알겠지만 그 태생부터 서부개척시대를 수식하는 낭만과 야만 그 자체임. 특유의 투박하고 마초적인 매력이 있어. 여러모로 참 '미국스럽다'고 할 수 있겠네. 그럼 다들 긴 글 읽느라 수고했고, 다음 시간에 또 재밌는 주제로 찾아오도록 할게, 또 보자 게이들아!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dr2&no=375241 진지빨고 쓰는 레데리 시리즈 파트1 (연재중) - 레드 데드 리뎀션2 마이너 갤러리※ 연재글 서두에 삽입된 BGM들은 장문의 내용에 비해 그 길이가 짧아 정독 도중 BGM이 끊기므로, 연속 재생으로 설정하고 감상하는 것을 권장함.&lt;진지빨고 쓰는 레데리 시리즈&gt; (연재중) (gall.dcinside.com
작성자 : badassbilly고정닉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역사와 평가
메이지 시대(1868~1912년)186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미국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일본 에도 막부의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특히 그런 에도 막부에 가장 큰 반발과불만을 품은 세력은 사츠마번과 조슈번으로 이들은 반 서양 활동을 하다가 미국과 영국에 맞서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벌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지고 서양에 배상금까지 물어내고 개항한다. (이중에서 배상금 상당부분은 에도막부가 대신 지불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 각 번에게 서양을 배척하라고 명령을 내린건 에도막부였으니 상당부분 덤탱이를 쓸수밖에 없었다.)특히 서양에 가장 큰 반발을 하며 무력시위를 하며 에도막부 타도를 주장하면 여러차레 막부전복 시도를 했던번은 조슈번으로 에도막부는 그러한 조슈번은 조정의 적이라고 선포하면 조슈정벌을 실행하지만 당시 막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있었고 조슈번은 서양에서 수입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1차 조슈정벌은 막부군이 표면적으로 승리한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슈번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2차 조슈정벌은 결국 막부군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슈정벌은 실패로 돌아간다.1866년 2차 조슈정벌의 실패로 안그래도 권위가 하락해가던 막부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으며 1867년 훗날 메이지 덴노라 불리우는 무쓰히토 덴노가 122대 덴노로 재위에 오를당시 에도막부는 조슈,사츠마, 토사번의 협박으로 대정봉환을 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그럼에도 에도막부의 쇼군인 요시노부가 거의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였고 여전히 정권을 장악할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품은 사츠마, 조슈번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와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 사이에 전쟁인 보신전쟁이 터진게 된다.보신전쟁의 첫번째 전투는 토바 후시미 전투였다.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군대를 2개로 나뉘어서 각자 도바와 후시미로 나뉘어 교토로 진압을 시작했으나 도바로 향하로 막부군은 사츠마군과 초반 포격전에 사츠마군이 쏜 포탄에 맞고 막부측 대포가 터지는 혼란이 벌어졌고 이어지는 사츠마군의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와중에 막부군의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가 탄 말이 총에 맞고 사령관이 도주하자 결국 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하고후시미로 진군한 막부군 또한 사츠마와 조슈군에게 퇴각당하면서 결국 토바 후시미 전투는 막부군의 참패로 끝난다.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사츠마 조슈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연이은 전투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에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막부군은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에도성에서 농성을 할수 있었지만 내전이 계속 장기화되면 일본의 경제가 파탄이 날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내전을 빌미로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관군에 맞선 막부측 인사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사츠마와 조슈번이 이끄는 관군에 항복한다.하지만 여전히 관군에 항복하지 않은 막부측의 잔당들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우에노 전투에서 쇼기타이를 내세운 막부잔당군을 진압하고 이후 계속 북진을 가행한다. 나가오카성에서 가와이 츠구노스케가 이끄는 나가오카번 군이 메이지 정부군을 상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가오카 성도 함락되고 이어진 아이즈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아이즈군 역시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아이즈 번 역시 항복한다.(정부군에게 항복하는 아이즈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막부군 찬당들이 훗카이도로 도주에 에조 공화국을 세우며 정부군에 대항했지만 1869년 하코다테 전투에서 훗카이도에 상륙한 정부군에게 패배하면서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에도 막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가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것이다.일본의 권력을 잡은 메이지 정부는 이와쿠라를 비롯한 사절단들을 서양에 보내 서양의 각종 근대화된 법들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공공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하며 폐도령을 내리고 징병제와 의무교육 일본의 번국체제를 철폐하는 폐번치현을 실행한다.메이지 정부가 실행한 개혁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부른건 바로 무사 계급의 폐지일 것이다. 정부는 사무라이들을 대상으로 가록을유지시킨 상태에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으며 그 가록마저도 공채로 바꾸었으며 사무라이들에게도 단발령을 내리고 폐도령까지내리자 그동안 누린 특권을 모두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결국 사츠마 사족들을 비롯한 큐슈지역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구마모토 성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지만 그런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위해 메이지 정부는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이라 불리우는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 방어력 앞에 끝내 사츠마 반군은 2달동안 지속된 수성전을 포기하고 퇴각하고 만다.이후 사기가 크게 떨어진 큐슈 반군들은 정부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반군의 대장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정부군은힘들게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세이난 전쟁이후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킬수 없다는 현실이 명확해지자 더 이상의 사족 반란은일어나지 않게 되었다.이후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헌법은 독일의 전례를 따라서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천황이 주권자임을명시하였고 천황 밑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군대의 통수권자를 천황으로 규정하였다.한편 계속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조선을 개방시키고 어느정도 조선에 대한 이권을가지고 되었고 이후 1879년 오랫동안 사츠마번의 속국이였던 류큐왕국을 완전히 합병시킨다.하지만 1884년 조선내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내에서 한동안 영향력을 크게 잃게 된 일본정부는 자국 근대화에만 집중을 가한다.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과정에서는 일본이 에도시대때 이룩한 부도 있지만.(이미 메이지 유신이전부터 일본의 경제력은 조선의경제력에 5배 이상에 달했다.) 자국민들의 희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근대화를 할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러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의 여성들을 외국에 돈을 받고 파는포주 노릇을 하였고 이러한 가라유키상으로 일본이 번돈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자금으로 쓰이게 되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일본 국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지내야만 했고 여전히 일본 시골지역에서는 먹을 식량이없어 어린 자식을 죽이는 마비키가 계속 성행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은 그러한 희망을 붙잡고 하루하루 힘든 고난의생활을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고 있었다.그러한 일본에게 마침내 행운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고 그러한 자국내 농민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조선에서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역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게 가능해졌던 것이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내 자신들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곧바로 한양으로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기습해 경복궁을 장악한뒤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갑오개혁을 실행한다. 그리고 조선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뒤 이제 동학도 진압했으니 조선땅에서 철군하자는 청나라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나라에 기습공격을 자행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청일전쟁 삽화1894년 일어난 전쟁은 청일전쟁은 처음에는 조선땅에서 일어나다가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북진하는 일본군에 의해 만주지역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풍도해전, 성환전투, 뤼순전투에서 연달아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황해해전에서 자신들보다 전력이 우위에 있는청나라 해군을 전멸시킴으로서 청일전쟁을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청나라군은 서태후와 사치와 각종 부정부패로 군비의 상당수를 횡령해서 대포에서 연달아 불발탄이 터지는등 내부에서 썩었기 때문이였다.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얻게되고 청나라 재정의 2년치, 일본재정의 4년치에 해당하는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게 된다.마침내 그동안 일본이 기울었던 노력과 근대화 과정들이 결실을 보여준 순간이라고 할수있다.하지만 상황이 계속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만 하는건 아니였다. 욱일승천하듯 나아가는 일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니 그건 바로 러시아였다.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때마침 요동반도는 러시아가 원하는 부동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요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여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압박을 가했고 당시 전세계 군사력 2위였던 러시아를 당시 이제 겨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끝낸 일본입장에서 감당해서 전쟁을 한다는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고 그러한 사실들을 일본역시 알고있었기 때문에 결국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고 말고 그런 러시아의 군사력에 놀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자신들의 부동항을 쓰게 해주는 등 각종 이권들을 내어주면서 러시아를 끌여들이자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잘못하면 러시아라는 거대한 변수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공을들인 조선을 확보하는 일마저 물거품이 될수 있었다.하지만 그때당시 그런 일본에게 큰 행운이 찾아온다. 바로 당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던 패권국 영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자 일본에 가능성을 엿보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을 후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결국 일본은 영국이란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청일전쟁이후 10년동안 힘을길러 마침내 막대한 영국의 지원을 받고 러시아를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진다.(러일전쟁의 삽화)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가 점령했던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분명히 군사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본군 역시 러시아군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었다.특히 뤼순전투는 러시아의 뤼순기지를 공격하던 도중 일본군의 총지휘관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차남까지 전사할 정도로 일본군 역시 매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지원해 주었던 영국과 미국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것 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최대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러시아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정도까지만 기대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도 더이상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는걸 거절했고 경제규모에서 러시아에 밀렸던 일본이 먼저 돈이 다 떨어질 상황에 쳐해서 전쟁수행에 크게 차질이 생긴 그때 러시아내에서 유대인 학살과 탄압에크게 불만을 품었던 제이콥 쉬프를 비롯한 많은 부유한 유대인들이 일본에 국채를 사주고 돈을 빌려주면서 일본은 다행히도 전쟁 을 계속할수 있었고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전멸시키면서 전쟁의 승기를 완전히 잡게된다.이후 미국의 중재하에 일본과 러시아는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강화협상인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된다.(포츠머스 조약에서 협상을 맺기 위해 모인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관들.)당시 일본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절대적 필요조건과 비교적 필요조건을 나누었는데 절대적 필요조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이였고 비교적 필요조건은 전쟁 배상금이였다.당시 일본은 일본이 보낸 첩자였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러시아내에서 각종 선동들을 일으킴으로서 러시아 내 곳곳에 전쟁반대시위가 벌어졌고 그러한 여론을 인식해 러시아내에서도 더 이상의 전쟁은 힘들다고 생각하고 포츠머스 조약에 일본과 강화협상을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러시아는 일본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군비가 거의 다 떨어져서 더 이상의 전쟁은 사실상 힘들다는걸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할수 없다고 말했고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과 러시아가 차지하고있던 일부 요동반도를 반환받고 북사할린 남부를 할양받는 것으로 협상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이다.하지만 일본은 정작 중요한 전쟁 배상금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기억으로 일본정부를 믿고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전부다 털어서 일본국채를 사주었던 수많은 일본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히비야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폭력을 동원한 시위를 일본정부는 경찰을 동원해서 막았고 이러한 사태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이상이 부상을 입고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오로직 자국의 승리만 보도하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일본국민들 입장에서는 잘 이기고 있는 전쟁을 무능한 정치인들이 협상을 잘못해서 제대로된 배상금 한푼 받지 못하고 졸전으로 협상을 잘못 맺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이러한 자국내 폭력시위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이후 조선을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시켜 조선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들며 조선을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조선의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조선의 사법권을 박탈하면서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 군사권, 사법권까지 전부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이후 1910년 6월 한일약정각서로 조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경찰권까지 박탈하고 이후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도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1910년에 발간된 한일병합조약 기념 엽서)이후 일본은 1911년 서구열강들 하고 그동안 맺었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시키면서 사실상 더디어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과 어느정도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는 열강에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이후 메이지 덴노는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1912년 마침내 붕어하면서 메이지 시대는 끝이난다.메이지 시대는 그야말로 영광의 시대면서 한편으로는 고난과 희생 인고의 시대였다.메이지 덴노가 즉위할때당시 일본은 혼란한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마침내 열강에 반열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거기에는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고 상당한 행운까지 따라주었다.일본은 자신들의 내전인 보신전쟁을 서구열강들이 간섭해서 자국이 서구열강들의 전쟁터가 되는걸 우려해서 정부군 역시 막부측 인물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정부내 요직에 임명하는등 회유책을 써가며 항복을 유도했고 그러한 현명한 조치로 일본은 대규모 내전을 불과 1년 남짓만에 끝낼수 있었다.(만약 남북전쟁이나 훗날 벌어질 한국전쟁같이 몇년 이상 지속되었다면 일본역시도 전쟁이후 자국 경제가 파탄이 나서 그대로 외세에 경제가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일본은 에도시대 수백년동안 벌어놓았던 자금력으로 메이지 유신이전에도 일본의 경제규모는 조선의 5배에 달했으며 그러한 탄탄한 경제력을 오직 큰 부정부패 없이 자국 근대화를 하는데만 쏟아부었으며 그것마저 부족하면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면서 근대화에 필요한 부족한 돈을 마련하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다.또한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하루 빠르게 근대화가 되어가는 일본의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세금을 내고 전쟁이 나면 일본에 전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일본의 국채를 사주면서 하루하루 희망을 가지고 견더나갔다.그러한 희생과 고난이 부흥하듯 당시 일본정부는 각종 개혁들로 사무라이들의 특권을 없애고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흡수해서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끔 적용시켰고 외부적으로도 막대한 행운까지 찾아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등으로 죽은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자국군인들이 흘린 시체와 피로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뿐만 아니라 오랜 숙원이였던 조선을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고 열강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었다.하지만 일본은 전쟁도중 철처한 언론통제로 자국내 전쟁상황을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게만 보도하였고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 유능한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긴 전쟁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제대로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말아먹었다 그러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군국주의적 여론이 싹이트고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쇼와시대에 초기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는 군부 쿠테타가 흔해졌으며 자국의 총리인 이누카이 츠요시까지 암살당함에 따라서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그러한 군부는 무모하기까지 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패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이 시작 되기도 한다.메이지 시대는 분명히 일본에게 영광의 시대로 끝났지만 그러한 영광은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으로 뒷받침되어서 이룬 그러한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노력 피땀과 고난 희생을 견더야만 했던 영광의 시대임과 동시에 고난과 희생 그러한 고난을 오랫동안 참고 견더야 하는 오랫동안 긴 인고의 시대였다.인생도 메이지 시대와 같다. 잔혹한 시대를 견더내며 지금은 힘들지만 수많은 괴로움과 고난을 인고하면 계속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막대한 행운이란 것이 찾아오고 결국에는 영광이란 열매를 맛볼수 있는 것이다.
작성자 : 뤼순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