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바둑 둔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조국수님처럼 두고 싶었습니다. 아마 입문을 조훈현 실전바둑 시리즈(삼호미디어)로 시작한 영향도 있겠군요. 날렵하게 대세를 장악하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그러다 바둑이 늘고, 어느 날 연구생 출신의 어떤 분한테 지도대국을 받으면서(그분도 옛날에는 바갤 하셨습니다) 그것은 범인이 따라하다가는 가랑이만 찢어지니 이창호 사범 기보를 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더군요.

그 후 잠시 바둑을 쉬다 이창호 사범 기보를 쭉 놓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두텁고 꾹 참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음험함이 숨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깊은 수읽기와 계산력이 없이는 흉내도 내기 힘들겠더군요. 그리고, 잘 둔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리 멋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그 전에 타이젬 1-2단에서 버벅일 때 슈코 선생님 기보를 놓아 보고 금세 기력 향상 효과를 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터움의 활용법을 배웠다기보다는, 그게 처음으로 한 기보 공부기도 해서 돌의 형태를 익히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슈코 선생님 기보집(슈코 백명국)을 사서 최근 놓아 보고 느끼는 점은, 돌의 리듬으로 두는 듯하지만, 그 두터움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한 독창적인 감각, 그리고 두터움을 믿고 작렬하는 강렬한 노림수 또한 빠질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슈코 선생님의 기보를 최근 놓아 보면서 두터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슈코 선생님처럼 둘 수만 있다면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유창혁 왕위의 바둑도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두텁고 탄력적인 공격과 상대를 아찔하게 해는 맥점 연발... 대세관에 밝고 또한 형태의 급소를 찾아내는 능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다만 완급조절이 약간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범인이 따라할 만한 기풍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1년 간 본 기풍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혼인보 슈에이였습니다. 굉장히 바둑이 맑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전투가 약한 것은 절대 아니구요. 슈호처럼 경묘한 감각이 일품인 것도 아니고, 슈사쿠처럼 사람 냄새 안 나게 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굉장히 맑고 청량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둘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