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금융플라자 옥상에서 대구 시내를 보고 찍은 사진이다. 대구읍성의 흔적은 도로로만 남아 있는데, 그러한 흔적이 사진상에 잘 나타나고 있다. 사진 아래의 점은 과거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문이 있던 자리이고, 점선은 대구읍성의 성벽을 나타낸 것이다. 오른쪽 |
동서로 금호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와 앞산과 팔공산지로 둘러싸인 대구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에게 더없이 넓고(달구) 평탄한 땅(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예전에는 대구가 서울, 평양과 함께 전국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다. 대도시답게 시가지의 경계를 만들기 위해 축조된 읍성 또한 발달했다. 최초의 대구읍성은 선조 23년, 지금의 북구 고성동 일대에 쌓여진 토성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토성이 무너지자 대구는 외침의 위험 속에 놓이게 되었고,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1596년 경상도 통합(경상 좌·우도 통합)과 함께 안동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읍성 축성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시급한 산성 축성에 밀려 축조되지 못하다가 영조 12년(17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에 의해 돌로 만들어진 읍성이 축성됐다. 1736년에 연인원 7만 8천584명이 6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둘레 2,650m, 높이 5.1∼5.5m의 석성을 완성하여 대구는 대도시로서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완공된 성에는 4개의 큰 문과 2개의 작은 암문(야간 통행용)이 있었다. 지금 위치로 보면 4대문 가운데 중심인 남문은 영남제일관이라 하여 현재 약전골목 대남한의원 네거리에 있었고, 서문은 달서문이라 하여 현 아미고호텔 뒤쪽에 있는 신한은행 서성로지점에 있었다. 북문은 공북문이라 불렀으며 현재의 북성로 경북소방설비 네거리에, 동문은 진동문이라 불렀으며 현재 동아백화점 서쪽의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구 제일서적 자리에 동소문, 서북쪽 서문교회 입구 골목 어귀에 서소문이라는 2개의 암문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축성된 대구읍성은 1907년 친일파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파괴될 당시 성벽과 성루가 모두 없어져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동성로, 서성로와 같은 도로명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다행히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을 1980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 내의 인터불고 호텔 뒤쪽에 복원해 놓아 작으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또한 과거 성벽에 사용되었던 수많은 성벽돌들 중 일부가 현재 구 제일교회의 주춧돌로 일부 남아 있어 그 당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상감영에 있던 관찰사가 공무를 수행하는 선화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과 거처로 사용하는 징청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은 대구시가 1970년 그곳에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을 조성하면서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되고 있으나,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는 성이 파괴될 당시 달성공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조차 조선 건물의 백미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웠던 달성관(객사)은 성이 철거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은 잘 정돈된 잔디광장과 분수, 산책로, 벤치 등이 조성되어 대구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대구읍성과 경상감영공원에 대한 Q & A
▷대구읍성은 왜 파괴되었을까?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리나라에 대한 수탈을 본격화하면서, 대구에서도 자국의 상권을 확대하고 거주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친일파와 함께 1907년 대구읍성을 강제 철거하였다. 읍성의 성벽이 철거된 자리는 위치에 따라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의 순환도로로 변하고, 일부는 일본인의 주거지로 활용하게 되었고, 대구는 성 안과 성 밖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구의 상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경상감영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
경상감영은 경상도 관찰사가 거주하며 업무를 보던 곳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도청에 해당하는 경상도의 최고의 관청이었다. 경상감영에는 관찰사가 공무를 수행하는 선화당, 거처로 사용하는 징청각,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 조선왕조 역대 왕의 제사를 모시는 객사인 달성관, 누각인 금학루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선화당과 징청각만 경상감영공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관풍루는 달성공원에 옮겨져 있다.
◆경상감영공원 주변에 이런 곳도 있어요.
▷영남제일관
‘영남의 첫 통로’라는 영남제일관은 원래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다. 조선시대 축조되어 1층 5칸, 2층 3칸의 장대한 규모였으나, 1907년 성이 파괴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1980년 현재 망우공원에 영남제일관을 복원해 놓긴 했지만, 과거보다 규모를 줄여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이곳에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영영축성비와 제5호 수성비가 함께 있다.
▷약전골목과 약령시 전시관
약전골목은 37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에는 한약방과 한의원, 한약도매상 등 300여 업체가 약 700m 골목에 밀집해 있다. 이곳 약령시 중앙에 대구약령시를 홍보하고 각종 한방 유물과 자료 약재를 전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약령시 전시관이 있다. 총 3층 건물로 1층에는 한약재 도매시장, 2층에는 약령시 전시관, 3층에는 전통 문화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전시유물과 자료로는 고서적 37종 140책, 각종 약재 180여 점 등 총 626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관풍루(대구 유형문화재 제3호)와 달성공원 향토역사관
관풍루는 조선 선조 34년(1601년) 경상감영의 정문인 포정문 위에 지어진 누각이다. 원래는 대구읍성인 선화당 정남쪽에 있었는데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지금의 관풍루는 지난 1973년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이 관풍루는 원래 폐문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폐문루는 매일 오전 5시에 문을 열고 오후 10시에 문을 닫았는데 문을 열 때와 닫을 때 큰북과 종, 나팔 등을 연주했다. 관풍루의 뜻은 누상에서 세속의 일을 살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달성공원 향토역사관은 달성공원 입구 왼쪽에 있으며 1층과 2층 전시실에 대구의 역사, 민속, 생업과 관련된 유물자료와 선현, 선열의 유품자료를 수집하여 상설전시하고 있다.
김상훈(영남삶터탐구연구회, 청구중학교 교사)
참고자료: 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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