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가 얘기했다.
볼테르는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인사이자 당대 계몽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평생을 '종교의 광신과 배타성'을 타파하기 위해 싸웠으며, '종교적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를 프랑스 정신의 일부분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볼테르의 아버지는 부유한 공증인 이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어릴 때부터 파리의 유서 깊은 예수회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상류 사회에 소개했고, 동창들 덕에 귀족들과 어울렸다. 또한 볼테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치가 있었기 때문에, 12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재주를 인정받기도 했다. 20살에는 당시 유명한 사교계 모임인 르 탕플(le Temple)에 출입하면서 당대의 많은 자유사상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1년 뒤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시작했을 때, 그가 지은 시구가 문제가 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투옥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라는 별것 아닌 구절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테르는 감옥에서도 비극 《오이디푸스 (Edipe)》의 초고를 집필하였고, 출옥 후 공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아루에'라는 자신의 성(姓)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726년, 30살 때 일찍 성공을 하여 거칠 것이 없었던 볼테르에게, 귀족 청년 슈발리에 드 로앙이 볼테르를 ‘성(姓)도 없는 부르주아’라고 빈정대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볼테르는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고, 화가 난 귀족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몽둥이찜질을 퍼부었다. 이에 분개했던 볼테르는 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감히 귀족에게 도전장을 던진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당시만 해도 굳건하던 신분사회 속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모두 그 귀족 편을 들었고, 그 바람에 볼테르는 또다시 바스티유에 갇히게 된다.
이미 한 차례 수감 생활을 경험한 볼테르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청원하였고, 한동안 영국에 가서 있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영국으로 향하는 망명길에서 볼테르가 귀족계급의 횡포에 대해 곱씹은 울분과 분노가, 이후 그의 계몽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의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던 볼테르는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었고, 일찍부터 은행가들과 교분을 쌓고 투자와 대출 사업에 참여해 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볼테르의 영국 생활은 망명이나 다름없었지만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시기에 볼테르는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카페에 드나들었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와 교류하였으며,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과학자 뉴턴의 책에 열광하기도 한다.
1728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에 영국에서의 경험들을 엮어 《철학 편지》를 발표했고, 검열당국에 의해 "종교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가져다줄 방종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으로 지정되어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뒤 샤틀레 부인(Madame du Châtelet)의 영지로 도피하여 이때부터 10년간 숨어지냈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있던 물리학자이기도 했고, 뉴턴의 이론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부인은 볼테르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볼테르는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서 만난 친구 다르장송의 추천으로 국왕의 사료편찬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볼테르-샤틀레 커플은 파리로 돌아와 파리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Sceaux)에 자신들의 궁정을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임신한 샤틀레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홀로 남게 된다. 볼테르는 전에 프러시아 왕의 초대를 받았던 일을 생각해내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1750년 프러시아의 포츠담으로 떠났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에게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받았음은 물론이다. 볼테르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왕이 프랑스어로 시를 지으면 그것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대가로 2만 리브르(약 8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성격 차가 컸던 두 사람은 3년 후 결별한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볼테르는 이미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754년 국경 너머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델리스(délice: 열락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집을 짓고는 거기서 살았다. 극장도 지어 연극을 공연하고, 비서와 요리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누렸다.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를 출간하고, 디드로가 주도한 《백과전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의 대표작 《캉디드》가 쓰여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다만 이 시기의 제네바 공화국은 칼뱅주의 하에 연극 등의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제네바 시민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1758년에는 제네바에서 조금 떨어진 프랑스 영토인 투르네와 페흐네에 토지를 사들여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국경 근처라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도망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볼테르의 말이기도 했다. 페흐네는 당시 인구가 50명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었으나, 볼테르가 이곳에 직물 공장과 시계 공장을 세우고, 제네바 공화국에서 빠져나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정착시켰으며, 훗날 20년 후 볼테르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인구가 1200명으로 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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