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르노코리아 브랜드 매니저의 혼신을 담은 하드캐리 덕분에 뜻하지 않게 브랜드 홍보 하나는 제대로 한 르노 사(社).
하지만 우리는 르노가 단순히 프랑스 차량회사라는거 외에는 제대로 르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은 르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보자.
유럽 기업이 다 그렇지만, 르노 (Renault) 역시 르노라는 성을 가진 가문에 의해 만들어진 기업이다.
1899년 2월 25일, 루이 르노 (가운데), 마르셀 르노 (왼쪽), 페르낭 르노 (오른쪽) 세명의 형제가 르노 프레르(Renault Frères) 라는 가족기업을 설립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르노 가문은 섬유회사에서 일하면서 엔지니어로서 일했고 루이 르노는 디자인과 생산을, 마르셀과 페르낭은 경영을 맡았다.
르노가 만든 최초의 자동차는 르노 부아튀레트 (Voiturette), 프랑스어로 소형 자동차 (자동차=voiture) 를 의미하는 뜻이었다.
1898년 12월 24일 그들이 만든 첫번째 자동차를 루이 르노는 파리의 Lepic 도로를 따라 시승한 후 그의 아버지 친구분에게 판매함으로서 장대한 르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날 하룻동안 그들의 자동차를 본 사람들은 무려 32km까지 가속할 수 있는 엔진의 능력과 엄청난 연비에 반해 12대의 차량을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많은 부아튀레트 시리즈들이 탄생했다. 예를들어 부아튀레트 B타입은 개방형 차체에 지붕을 올림으로서 최초의 세단을 발명했고, C타입은 이전의 2명이 아니라 4인승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결국 J 시리즈까지 나오며 르노를 승승장구하는 자동차 회사로 캐리해주었다.
형제들은 자동차 경주에도 열광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막 발전하는 자동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부자들 역시 이 유행에 편승해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했으며 부자들과 프랑스의 자동차 기업 모두가 자신의 차량과 프랑스의 선진적인 자동차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자동차 경주를 앞다투어 개최한 열풍에 편승한 것이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이를 마땅찮게 생각했지만 수많은 프랑스 기업들이 자동차 산업으로 인한 노동자 고용과 연간 1천 6백만 프랑의 수출금을 내세우며 정부를 압박한 결과 수많은 자동차 경주들이 개최되었다.
당연히 르노 형제들도 경량 자동차를 만들고 엔진을 개량하면서 경주에 참가해왔는데...파리-마그리드 경주 당시 경주에 참가했던 마르셀 르노가 프랑스 서부의 쿠헤 지방에서 중상을 당해 2일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르노 형제들은 본인들이 직접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고 (경주용 자동차 개발은 계속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03년부터 르노가 자체적으로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르노가 최초로 대형 자동차 회사로 몸집을 불린 것은 1905년, Société des Automobiles de Place, 파리의 택시회사가 자사의 제식 택시차량을 르노사의 AG1 자동차로 선택한 이후의 일이었다.
1905년 단 한해 1500대의 대량주문을 받았으며 1907년까지 3000대의 차량을 팔았고 영국에 1200대의 차량에 아르헨티나와 미국으로 수출을 하는 쾌거를 올렸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뉴욕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제차라는 신기록을 올렸고 1908년에는 3,575대의 차량을 생산함으로서 미국 최대의 자동차회사가 되기까지 했다.
1906년, 페르낭 르노는 건강상의 이유로 르노사에서 퇴직했고 루이 르노는 회사의 경영권을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909년 페르낭 르노 사망)
이후 루이 르노는 회사 이름을 Société des Automobiles Renault (르노 차량 회사) 로 변경했고 단순한 자가용 회사에서 사업을 확장, 트럭과 트랙터 생산 분야까지 확대하며 사업을 넓혔다.
한편, 미국에서는 최초의 트랙터, 홀트 트랙터라는 것이 발명된다. 무한궤도를 갖추고 40마력이나 되는 고출력 엔진을 단 트랙터는 농업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로스 엔젤레스 수로 프로젝트에 참가해 그 능력을 과시한다.
당연히 미국 정부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수많은 선진국들은 이 괴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곧 군사용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단순히 포병들을 위해 대형 곡사포와 구포들을 수송하기 위한 견인용으로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 트랙터에 장갑을 붙인 궤도 차량들이 발명되기 시작했다.
1914년 7월 28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 2제국은 40일 안에 프랑스를 제압한다는 목적으로 벨기에를 침략했고 회전문처럼 글려가 프랑스 북부를 점령했다.
파리가 함락당할 것이 분명해 보이자 영국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있는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마른 강에서 곧 일어날 전투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파리 전역의 택시 1300대가 결집했고 프랑스 장병 6천명이 전선으로 수송되었다. (파리시 규정에 따라 미터기를 켜고 운행했고 프랑스군은 7만 프랑에 이르는 택시비를 회사에 내야했다)
이때 충원된 병력으로 프랑스군의 전력은 강화되었고 독일군 전력은 오랜 전투로 약화되고 지쳤으며 이후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철수,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은 좌절되었으며 단기결전을 노렸던 독일의 전략이 실패하자 독일은 방어를 강화시켜 지옥같은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때 택시들의 병력 수송량은 미미했다. 대량수송으로 철도라는 수단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파리 시민들에게는 수많은 르노 택시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 병력을 태운체 전선으로 향하는 모습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고 르노로서도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한껏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질 수 있겠다.
한편 독일군의 단기결전 실패로 지옥같은 참호전이 계속되자 참호를 무력화시킬 수단이 발명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MK 시리즈 전차들이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슈나이더 CA1가 개발되었다.
위 사진이 바로 슈나이더 CA1로, 최초의 트랙터인 홀트 트랙터를 개조하던 기계공 Jacques Quellennec가 징집되어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부대원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 독일군의 기관총을 무력화시킬 장갑화된 트랙터를 고안해냈고 본인의 인맥으로 홀트 트랙터를 마개조하고 장갑화시킨 뒤 75밀리 중포를 달아 만든 프랑스의 전차다...
근데 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때 슈나이더 전차 개발에 참여했던 에스티엔 대령은 프랑스의 유명한 차량회사, 르노와도 접촉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르노측은 자동차 만들기도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나중에 1916년 7월 16일 루이 르노와 에스티엔 대령이 우연히 만나면서 르노의 입장은 정 반대로 바뀌었다.
르노에서는 그들의 새 전차를 슈나이더만큼 무거운 (13.6톤) 전차 대신 가벼운 전차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르노에서 만드는 엔진의 출력을 고려할 때 7톤 이상의 무게를 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렇게되면 mk 전차나 슈나이더처럼 전차 차체 길이가 짧아져 참호를 건널 수 없게 될 것이므로 후방에 참호를 건널 수 있도록 꼬리를 달도록 했으며 콜트 트랙터에서 검증된 무한궤도를 달고 르노의 4기통 엔진을 탑재했으며 엄격한 무게제한 덕분에 사방에 무장을 달 수 없자 8밀리 기관총 혹은 37미리 대포를 달 수 있는 회전식 포탑을 탑재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유명한 FT 전차 되시겠다. (FT-17이라는 명칭은 미국 라이센스 버젼에 M1917이란 제식명이 붙은 것이 와전되어 나온 것이다)
FT 전차의 선진성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있어 더 말하면 입만 아플 뿐이지만 그래도 설명한다면, 먼저 현대 전차들이 채택하는 모든 요소들,
회전식 포탑을 달아 제한된 무장을 가지고도 사각지대 없이 사방을 공격할 수 있게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중전차들이 6~10명이나 되는 운용병력을 필요로했던 것과 달리 FT 전차는 단 두명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해졌다.
중전차들과 달리 경장갑과 고출력 엔진을 달아 무려 시속 20km로 날아다닐 수 있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값싼 전차라는 특성상 정말 수많은 국가들이 정식 라이센스 혹은 불법 카피해서 운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물론이요, 막 전비확장을 시작한 미국은 전차는 물론이요 총까지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전차를 빌려 썼고 전차의 개발국인 영국군도, 전후 벨기에, 체코, 필란드, 일본, 네덜란드, 폴란드, 스페인 등 수많은 국가들이 구매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 전차를 개발해 지금까지 르노 전차의 혈통이 각국의 전차에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프랑스를 구원한 차량회사, 프랑스의 전차 기술을 전세계로 알린 회사로서, 르노의 명성은 프랑스 전역에 알려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다시 일어난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지난 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았고 기갑군을 이용한 엄청난 기동전으로 이번에는 프랑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르노에게는 두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독일군을 위해 전차와 트럭을 만들거나,조국을 위해 공장을 사보타주하고 점령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거나.
르노는 전자를 택했고 프랑스의 자랑이었던 기업은 이제 그들이 싸웠던 적을 위해 트럭과 차량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임러-벤츠 사의 직원들이 파견되어 르노 직원들을 감시했고 르노는 독일군에게 3만 3천대 가량의 차량을 인도했다.
물론 이를 본 연합국 측에선 경악했고 1942년 3월 3일, 영국 왕립 공군은 무려 235대에 달하는 폭격기를 동원해 460톤에 달하는 폭탄을 르노사의 공장에 쏟아부었다.
르노는 재빨리 공장을 재건했지만 1943년 4월 4일과 9월 3일, 9월 15일 미군이 비슷한 양의 폭탄을 떨어뜨리며 르노의 생산을 최대한 저지했다.
1944년,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시키며 르노는 다시 프랑스의 품에 안겼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더이상 르노의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은 르노사의 차량이 독일군에 납품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는 르노가 히틀러에게 자기 차랑을 열성적으로 홍보하는 것에 으르렁 거렸으며, 프랑스에서 세를 넓히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전쟁기간동안 르노가 파업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4년 9월 23일 르노는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죄명으로 고소당해 감옥에 갇혔고 재판을 기다리던 중 모종의 이유로 사망했다.
르노사는 드골의 명령으로 1945년 1월 1일, 프랑스 정부에 귀속되었으며 1996년 민영화되기까지 프랑스 정부의 소유로 남았고 그 이후로도 지분을 15% 이상 유지하는 등 르노사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 이후 전쟁사학자들은 르노가 독일에 협력한 것은 맞지만 4만명에 달하는 숙련공들이 독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차와 무기생산을 막기 위해 트럭을 제조했으며 그 생산된 트럭 역시 품질관리를 개판으로 해서 어떻게든 사보타주를 하려 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 법원은 사건의 재조사를 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르노사는 더이상 르노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아닌 홍철 없는 홍철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공산당은 르노 가문이 루이 르노의 명예를 복권시키려는 시도에 분노하고 있으며 그 어떤 시도도 반대한다며 루이 가문을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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