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李鐏, 1922~2003)
이준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풍그룹의 창업주 및 회장이자, 삼풍백화점 붕괴참사의 주범이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기업인으로 뽑히는 인물이다.
그는 1922년 10월 22일,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만주군 관련 친일경력이 있다고 한다.
1941년 중국 베이징에 있던 천주교계 대학인 보인대학에 입학하여 1943년까지 다녔다. 1963년에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군인장교 출신으로 196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며 군 출신 정계인사들과 인맥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삼풍건설산업을 설립하여 인맥빨 및 정경유착으로 기업의 규모를 불려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1963년 삼풍건설산업을 설립하여 건설업 등을 주로 맡았으며, 1987년에는 서초동 주한미군 타운을 철거하고 그 부지에 삼풍백화점과 삼풍아파트를 함께 건설해서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삼풍건설산업도 건설부문 및 백화점부문 2개로 개편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에 착공하여 1989년 12월 01일에 개장한 백화점으로, 당시 전국 2위 거대규모를 가진 백화점이자 한국 최고의 호화 고급 백화점으로써 1980년대 신흥부촌으로 명성을 날리던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고객들을 끌어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건설 당시부터 원 설계와 달리 기둥의 폭을 줄여 철근 등 자재를 작게 투입하는 등 부실하게 시공되었으며 부실한 상태로 완공된 후에도 옥상 냉각탑 이전, 롤러스케이트장을 불법적으로 식당으로 변경, 지하주차장 확장을 위해 기둥과 벽 철거 등 돈만 벌기 위한 사주의 안전불감증과 사고를 예고해 주는 건물의 균열 등을 감추어 큰 사고를 유발했다.
게다가 삼풍백화점의 부지는 원래 주거용으로, 영업용 건물인 삼풍백화점은 본래 그 자리에 지어질 수 없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삼풍건설산업 측은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 모든 개짓거리들은 삼풍건설산업의 수장인 이준이 주도한거다.
어쨌든 삼풍백화점으로 더더욱 거대한 부를 축척하며 승승장구하며 재벌수장의 반열로 성장하게 된 이준은 더욱더 황금만능주의자로 변해갔다.
게다가 붕괴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협회 회의 등 대외활동에 잘 나서지 않아 업계에선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또한 이준은 성격이 매우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서 변화하는 유통환경에 적응을 못 하고 부하 직원들이 항명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백화점 건물은 부실하게 지어 놓고 풍수지리에 심취해서 자기 사무실 구조도 바꿀 정도였다.
1995년 06월 29일, 결국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를 이기지 못하고 단 20초만에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사실 삼풍백화점은 붕괴 며칠전부터 붕괴의 조짐이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상식적이면 영업을 중단해야 하지만 이준은 돈에 눈이멀어 영업강행 이라는 희대의 정신나간 데스게임을 진행했으며,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도 이준은 영업강행을 고수했다.
위 영상은 붕괴 이틀 뒤 서초경찰서 에서 조사를 받는 이준의 모습이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무너진다는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 라는 희대의 망언을 하여 큰 공분을 샀다.
이 작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못해서 잃는것(자업자득)이니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지만, 피해자들은 잘못한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거고 그보단 내 재산이 먼저지 따위의 발언을 했으니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망언이 아닐수가 없다.
더구나 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촬영 중인 기자들에게 짜증이나 내며 삿대질을 하였고 기자들의 취재 세례에 열이 뻗치기라도 했는지 "조사하자고 여기 데리고 오더니 사진 찍으려고" 라는 말을 하며 조사 담당 형사에게 역정까지 내는 당당함을 보였다.
이게 수백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작자가 보일 태도인지 참 인간혐오까지 생길 수준으로 파렴치하다.
기자회견에 다른 경영진들과 함께 선 이준의 모습이다. 보면 다른 경영진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반성하는 마음 따윈 1도 존재하지 않는 이준은 당당히 고개를 쳐 들고 있다.
결국 이준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적용되어 1996년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사고의 여파로 그가 창업한 삼풍건설산업은 부도나 사라졌고, 그의 전재산은 남김없이 모두 압류된 상태였으며, 몰지각한 언행으로 인해 지인들도 모두 떠나 버려서 소수의 가족들만이 남아 있었다.
2003년 04월에 만기출소 후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는 최후를 보내다가 같은 해 10월에 병사하였다.
자업자득에 인과응보 그 자체라고 할만하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뻔뻔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삼각 고인돌의 면봉을 비빔밥)
장례식은 이준의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치뤄졌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시신 인수를 해 무덤은 직계들끼리만 아는곳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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