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에서 지역·학교별 딥페이크(이미지·음성 합성기술) 활용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이 한겨레 보도로 알려진 지 한 달 여 만에 국회가 대책을 담은 법안 일부를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디지털성범죄를 뿌리 뽑을 대안을 마련하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한참 미달하는 수준이라 정치권이 여전히 디지털성범죄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손쉬운 입법만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부랴부랴 ‘처벌 공백’ 메우기
국회는 26일 연 본회의에서 불법합성 성범죄물을 구매·소지·저장·시청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고 유포 목적이 입증되지 않은 제작 행위도 처벌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등을 처리했다.
불법합성물 제작·유포 행위가 성폭력처벌법상 디지털성범죄로 처음 규정된 건 지난 2020년이다. 당시에 이미 불법합성물을 제작해 실제 유포했거나 유포 목적이 입증된 제작 행위만 처벌하는 조항(성폭력처벌법 14조2)의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이번 개정안이 4년 전부터 문제가 제기됐던 처벌 사각지대를 메운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꾸준히 문제가 제기됐던,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한정된 경찰의 신분 위장·비공개 수사를 성인 대상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 성범죄 규율 체계에서 전통적인 정조 관념에 뿌리를 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바꾸자는 논의 등은 24일 열린 법사위 법안소위에서 심사 대상에 올랐을 뿐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경찰의 신분 위장·비공개 수사범위를 성인 대상 범죄로 확대하지 않으면 불법합성물 시청·소지·구입죄 수사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법 개정에는 불법합성 성범죄 법정형을 불법촬영 성범죄 수준으로 상향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과거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위원을 지낸 오지원 변호사(법과치유)는 “처벌 형량을 아무리 높여놔도 재판 결과는 형량이 낮거나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단순히 처벌 강화에만 집중하는 건 예전과 같은 근시안적 태도”라고 지적했다.
여러 법 급히 처리하려니 ‘허술’
본회의 하루 전날인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의원들이 법안의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나중에 개정하자”며 일단 통과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이날 법사위는 성폭력처벌법뿐 아니라 앞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가 넘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 개정안 등 딥페이크 성범죄 대책을 담은 법안을 여러 개 처리해야 했다.
법사위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건 ‘경찰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발견한 경우 지체 없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삭제·접속차단 요청을 하라’는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 내용이었다. 법사위 법안소위에는 경찰이 직접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에게 피해물 삭제·차단을 요청하는 ‘응급조치’ 신설을 담은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심사 대상에 올라있는 상태다. 김승원 의원은 이 자리에서 “(성인 대상보다) 더 심각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관련 법이 오히려 (방심위를 경유하는) 기존 체제를 따르고 있어서 법률 간 불균형, 불일치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방심위도 경찰도 (성범죄피해물) 삭제를 요청하도록 해 피해를 줄이는 게 맞다”면서도 “일단 법안을 통과시키고 이후 개정안을 발의해 보완하자”고 말했다. 해당 법안에 처벌 강화 조항 등이 있기 때문에 우선 이를 통과시킨 뒤 다음에 새로 법안을 발의해 논의하자는 취지다.
경찰이 방심위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에게 직접 성범죄피해물 삭제·차단 요청을 하도록 하는 ‘응급조치’는 피해 최소화 방안 가운데 하나로 논의됐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경찰에 피해물 삭제·차단 책임을 부여하느냐 여부를 넘어서 성범죄 피해 발생 및 확산을 막는 ‘총체적·종합적 대응’을 담은 설계도가 필수라고 본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삭제지원도 중요하지만 삭제할 피해물 자체가 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범죄 자체를 근절하는 게 주요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총체적 실패’ 대응을 여가위에서만?
현행법은 주로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디지털성범죄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됐다. 실효성 있는 디지털성범죄 대응 체계를 구축하려면 특정 상임위에 국한되지 않는 입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필수인 이유다. 서울여성회,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등 71개 여성·시민단체가 모인 ‘딥페이크 성범죄 아웃 공동행동’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안이 다 개정돼도 딥페이크 성범죄는 해결되기 어렵다”며 “근본적인 해결책, 법과 제도 예산을 마련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국회가 딥페이크 성범죄 대책을 고민하며 여성가족부, 교육부, 법무부, 경찰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심위 등 범정부 부처 관계자들을 소집해 현황을 점검한 건 지난 4일 열린 여가위 긴급 현안질의 정도에 불과했다. 16대 국회 때부터 일해 온 김명신 보좌관(현 여가위 소속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실)은 “여러 상임위가 협조해야 할 사안에 대해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할 수 있으며, 딥페이크 성범죄는 특위에서 논의하기에 적정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국회에서 특위 구성은 여·야 지도부의 정무적 판단에 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정춘숙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딥페이크 성범죄는 인권에 대한 낮은 인식,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교육, 기술 활용 등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가 관여돼 있다”며 “국회가 여가위에만 관련 제도 개선 논의를 맡길 게 아니라 법사위, 과방위, 교육위 등 유관 상임위가 함께 해법을 모색하는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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