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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저력을 보여준 전설적 전투
짜빈동 전투는 베트남 전쟁때 일어났던 전투로 1967년 2월 14일 발렌타인때 베트남 쾅나이성 짜빈동의 청룡부대 11중대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열한중대라고 해병들 사이에서 불린다고 한다) 당시 한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쾅나이성 일대는 베트콩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여 미군이 작전에 애로사항을 느끼던 곳으로 이에 한국 제2해병여단이 이곳에 배치되어 지역평정작전을 수행중이었다.파병당시 VC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하여산발적 교전이 발생하기일쑤였고 종전의 전투로 미군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던바 한국군은 지역지형정찰 및 대민활동을 통해 베트콩을 억누르려면 지역민을 휘어잡아야 한다, 즉 베트콩이 물고기면 지역민은 병력과 식량을 보급하는 물이라는 판단하에 지역민들을 보호하고 방어선 내로 들이는 작전을 벌인다.당시 지역주민들도 낮에는 미군, 밤에는 베트콩에 시달리던바 처음에는 한국군을 믿지 못하여 협조하지 않았으나점차 한국군의 대민활동에 안심하게되어 많은 수가 한국군 보호내로 들어오고 (최대 120만명이 한국군 보호하로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군은 이를 중대전술기지를 곳곳에 구축하여 지켰는데미군은 그 규모가 작아 베트콩에게 각개격파당할우려가 대단히 높다고 우려를 표했었다. 실제로 한국군도 1967년 1월 짜빈박 전투에서 32명의 전사자를 내며사실상 패배한 전투를 한적이 있어 반드시갚아주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당시 참전 해병증언에 따르면 짜빈동 전투가 바로 이를 위한 전투였다고 한다 1월에 벌어졌던 무참한 짜빈박 전투의 핏값을 어떡해서든 물어내게 해야겠다고생각한 해병대원들이 일부러 주변 주민들에게열한중대의 중대전술진지가방어가 약해졌다며 소문을 퍼뜨리고 진지를 허술하게 보이도록 조치를 취했다는것. 하지만 실제로는 해병대 중대전술기지는 참호가 보강되고 곳곳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토끼굴을 팠으며 수류탄 줄에 수류탄을 줄줄이 걸어서 보강한 상태였다. 최소 3일치의 식량을 구비하고 조명탄과 포탄을 적재하고 곳곳에적들이 침투할만한 구역에 포격 연습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며통신선과 수색조 및 청음초를 강화했다. 하지만 당시 해병대는 아직 m16이 아닌 2차대전때 쓰던 m1소총이나 bar등으로무장하고 있어 보병화력에서는 객관적으로 베트콩에 밀리는 무장을 하고 있었던게 아쉬운점. 이윽고 해병대가 나 약해요 라며 야한 냄새를 베트콩이 섞인 양민들에게 잔뜩 풍겨서인지 베트콩은 참지 못하였고또한 미군의 동맹군을 박살내어 전쟁 국면을 뒤집을 호기로 본바 대규모 공격을 결심한다.아군의 근거리 정찰결과 "가까운 시일내에 적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된다" 는 정보가 들어오는데 사실 이때 너무 많은 허위정보가 하루에도 수십개씩 들어와 무엇이 맞는지는 알기 어려웠으나 약점을 지어내 적에게 보였으니 얼마전 승전한 베트콩이 곧 공격하리라 예상했다. 짜빈박 전투 이후 얼마안된 발렌타인 데이인 2월 14일 새벽, 안개가 자욱히 끼자 정경진 중대장은"베트콩이 항상 날씨가 안좋을때 기습을 했으니 오늘일수도 있겠다" 며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청음초에서 무기를 갖추고 진지개척을 위한 폭발통을 들고오던적들을 공격하였는데 적들은 시체 1구를 남겨두고 도주한다.이때가 밤 11시 20분. (정경진 당시 중대장과 월터 준장) 당시 정경진 중대장은 휘하 병사들에게 적들이 올 가능성이 높으니전투화를 벗지말고 누워있으라고 명령을 한다. 적이 들켰으니 오늘은 물러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던 그때새벽 4시 10분부터 베트콩의 공격이 시작된다.3소대 병사가 청음초를 서다가 베트남인 특유의 체취를 맡고 조명탄을 터뜨려달라고 했고 정경진 중대장은 이에 "절대 마구잡이로 쏘지말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오게 한뒤 일격필살하라" 고 말한다.이윽고 조명탄이 터지자 눈앞에 보인건 엄청난 수의 베트콩이었다.적들은 자동소총은 물론이고 소련제 기관총과 박격포, 무반동포, 곡사포의 포격까지지원받으며 중대전술기지로 밀고들어왔다. 당시 참전해병 말로는 "조명탄이 터지자 베트콩들이 앞에 새카맣게 오고있더라" 며 말했다.이윽고 한국 해병대 화기가 불을뿜자 적들이 수수단 넘어지듯 넘어지는게 눈앞에 보였는데 크레모아가 터지고 기관총에 죽어도 적들은 시체를 밟고 계속 밀려들어왔다. 김세창 중위는 군데군데 냇가에 낮은 둔덕에 적이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해병대 포병 7중대에게 효력사로 의심지역에 요란한 포격을 가했고 이곳에 있던 베트콩 부대가 이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중대원 전체가 전방에 사격을 가하며 결사항전했지만 이쪽은 중대이고베트콩은 연대규모로 강화된 부대인지라 숫적차이와화력차이가 커서 결국 방어선 곳곳이 뚫리기 시작한다.1소대와 전방 3소대 방어선이 곳곳에서 뚫려적과 아군이 섞이는가 싶더니 곳곳에서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찌르고 때리는 백병전이 벌어졌다곳곳에서 욕설과 비명과 격투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진지가 다 뚫렸다고 판단한 해병 2여단 본부는 영내포병사격인브로큰 애로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4.2인치 박격포 소대도 후방에 있었음에도 공격을 받아박격포를 숨길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탄이 다 떨어졌습니다!"기관총 사수가 탄이 다 떨어졌음에도 비키지 않고 계속 방아쇠를 당기고 있자 부사수가 탄을 갈려고 말을 걸어보니 이마에 빨간 구멍이 나있더란 말도 있다. (3소대와 1소대로 밀고 들어오는 적 등 당시 상황)이학현 일병은 두다리에 부상을 입어 기어서 후퇴중중대 오물통에빠져 허우적거리는 베트콩 5명을 보고 다시 거기로 기어가서 수류탄을 오물통에 까넣어 5명을 폭사시켰다. 그후 교통호등에서 싸우다 적을 한명이라도 더 죽여야한다며외친뒤 적을 끌어안고 수류탄을 뽑아 산화했다. 김명덕 일병은 총을 내려두고 수류탄을 걸어놓은 줄에서 연신 수류탄을 뽑아 전방에 정신없이 투척했다.적이 너무 지근거리에 있다보니 총을 쏘기보단 수류탄을 던지는게 효과적이었기에. 송영섭 일병은 기관총을 쏘다가 적탄에 6발을 맞고 중상을 입고 적이 계속 진내로 뛰어내려오자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열을 뽑아 수풀속에 집어던지고 수류탄을 이용해 자폭한다.그렇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며 중대전술기지가 넘어갈뻔했지만다행히 날이 밝으며 상황은 반전된다. 큰 피해를 입으면 물러나리라 생각했던 한국군이 끝까지 저항하며큰피해를 입히고 날이 밝으며 미군의 공군지원이 염려되었던 베트콩이 등에 총을 맞으며 지리 멸렬하게 후퇴하기 시작한것이다. 오전 7시 20분경이었다.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기지외곽에서 저항하던베트콩 중대병력이 북서쪽으로 도주한다. 해병여단은 그쪽으로 화력을 집중하여 최대한 격멸시킨다.적들은 전사하거나 부상한 베트콩들을 간이들것이나 등에 업고 후퇴했다날이밝자 여기저기 흩어진 베트콩들의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살된적은 243명 포로 2명 이었고 추가로 많은 적이 포격으로 사살되었다. 확인된 시신중에는 적 1연대 90 대대장을 포함한 다수의 적장교도 포함되어있었다. 적들은 민병대가 아닌 전투중 여러차례 지원병력으로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었고 이 패배는 북베트남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호치민은 짜빈동 전투결과를 듣고 한국군을 만나면 일단 후퇴하고인민의 재산과 병력을 보호하며100프로 자신이없으면 전투를 피해라고 하였고, 다른 북베트남 장군들도 "여지껏 싸워온 남베트남군, 미군, 태국군등과는 많은점이 다른 군대" 라며 소상히 조사할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전투소식을 들은 월터장군은 직접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와 전투현장을 보고 정경진 중대장등 병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또한 미군은 이 전투를 연구하여 미군전술에 대입시켜 차후 써먹게되며 중대전술기지의 효과에 고개를 끄덕이게된다. 또한 미군사이에선 " 한국군은 같은 동양인이라 베트콩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거나"냄새만 맡고도 맞히더라" 며 신기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베트콩 "우리에게는 정글이 있다"미국 " 우리에게는 한국군이 있다" 같은 밈이 생기기도 했다. 아군에서 전사하신분은 아래와같다.11중대 하사 강경희병장 김남섭상병 이학현-(1945.12.15~1967.2.15) 충남 연기 출생. 1965년 7월 해병 신병 제167기로 입대하여 전사할 당시 일병이었으며,전투도중 적군이 쏜 총에 오른쪽 발목이 관통당한 직후 자신의 총을 동료인 도성룡 일병에게 넘기고 나서 적군 한 명이라도 더 제압해야 한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서그 직후 교통호에 쳐들어온 적병 다섯명을 껴안은 후 수류탄을 가지고 장렬히 산화하였다.1968년에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2006년 2월의 호국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내부엔 이학현 상병의 이름을 딴 이학현관이 존재한다. 건물 내부엔 이학현 상병의 큰 초상화가 걸려있다.상병 최흥식일병 도성룡일병 이중석일병 양영호일병 조정남-(1945.1.10~1967.2.15) 경남 밀양 출신. 1966년 1월 해병 신병 제173기로 입대했으며제 3소대 1분대 소총수로서 당시 부대원 10명과 함께청음초 근무를 조장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었다. 적 1개 중대가 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을 최초로 목격하고 공격을 시도하였고,악조건 속의 전투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희생정신을 보여 주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서 분대원 단 1명을 남기고 본인을 포함해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다.전사 당시 3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접근해 오자 그는 수류탄을 터뜨려 그들과 함께 폭사했다. 이 공적으로 인해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고 상병으로 특진되었다. 그후 2006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이름을 올렸다.일병 송영섭 전술했듯이, 총을 지키기위해 총열을 뽑아 숲속에 감춘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수류탄을 양손에 까들고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4~5명이 자신의 몸에손을대는 순간 자폭하여 최후를 맞이하였다.일병 김동재일병 이내수이병 오준태1대대 1중대 3소대 (4명)병장 김희도상병 이다성 상병 김정석일병 오정규중포소대 (1명) 일병 오용섭한편 베트남은 이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한국군 기지로 쳐들어가서 600명을 사살했다는것.학살행위 자체도 사실무근이지만 중대규모 기지에 쳐들어와서600명을 사살했다는것도 말도안되는 헛소리다.중대전술기지에 쳐들어와서는 600명을? 이 전투는 한국 해병대의 전설로 남았으며 해외 외신들도 미군을 포함한 누구도 해내지 못한일을 한국군은 단 몇달만에 해냈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작성자 : 코드치기귀찮아서만든계정고정닉
좋아하는 장르의 게임을 하고 싶어 회사를 설립한 사람.JPG
2015년하버드 대학의 학내 신문을 통해 동양 언어, 동양 문명, 동아시아 관련해서 전공을 하는 두 학생이 2학년 학기 중에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올라오게 됨.이야기의 주인공은 티모시 프랭크 벤더, 스노우 쉐 루이.두 학생은 1학년 때 같은 강의를 들으면서 말 그대로 우연히 알게 된 사이였지만관심사나 취미가 놀라울 수준으로 똑같았기에 엄청나게 빠르게 친해지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1년이 지난 2학년 학기 도중에 결혼을 했다는 것.알게된 지 1년도 안되서 결혼을 했기에 많은 학부생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들을 주로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가장 기억에 남는 데이트가 뭐냐는 질문에사실 우리는 데이트를 해본 기억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국 고대 시를 알려준 기억이라던가무술을 가르쳐주고 시범을 보이기 위해 도와줬다는 진짜 말 그대로 인싸 문화, 컨텐츠를 모르는 모습을 보여줘 많은 동문들에게 충격을 줬으며바로 다음 질답도 커플로서 본인들을 설명하는 세 단어를 말해보라는 질문에본인들은 이러한 부분에 매우 약하다면서 매우 뜬금없이 본인들이 같이 자주 플레이했던 게임의 이름을 대신 말하겠다면서 발더스 게이트, 엘더스크롤 : 모로윈드, 엑스컴 : 에너미 위딘을 언급한 것...이런 엉뚱한 답변 와중에도본인들은 15분 뒤에도, 15년 뒤에도 똑같이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한 부분은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반응이 있긴 했음.아무튼 당시에 이런 역사, 동양 문명, 언어를 공부하면서게임이나 하는 한 커플의 결혼 이야기는 만난지 1년 만에 결혼했다는 점을 제외하면인터뷰 자체도 대다수 일반인 관점에서 큰 재미는 없다보니 잠깐 이슈만 되고대다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음.참고로 티모시 벤더는 하버드 입학 이전에 스탠포드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했었기에여러 회사를 상대로 법적으로 자문, 컨설턴트를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스노우 루이는 졸업 이후로 예일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여러 회사를 상대로 경영 자문, 인수 합병 관여, 재정 관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게 됨.이렇듯 두 사람은 전형적인 미국 엘리트의 삶을 살아가는 듯 했음.그러나..하버드 졸업 이후로 티모시 벤더에게는 색다른 취미가 하나 생기게 됨.그건 본인이 즐겨하던 게임, 마운트 앤 블레이드 바이킹 컨퀘스트의 소스코드가 공개되자 관련해서 모드를 제작해보는 것.그는 프로그래밍에는 큰 지식이 없었지만밸런스와 고증, AI 개선, 각종 리워크 작업은 시간을 투자하면 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본인과 비슷한 인사이트, 취향을 가진 유저를 몇명 모집해서 소규모 모드 팀을 창설하게 됨.이 모드 팀의 이름은 'Hooded Horse', 후디드 호스였음.단순한 수치 수정 정도에서 끝날 것 같은 그의 모드 제작 작업은꽤나 오랫동안 진행되었는데여러 딥한 롤플레잉 게임이나 시뮬레이션, 전략 게임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때문인지소소한 수치 하나 하나 작업하고 고증을 따지다보니 당연할 수 밖에 없었음..다만 그가 만든 모드는 다른 대형 모드에 비해 기존 게임과의 엄청 드라마틱한 큰 차이가 없었기에서구권에서 롤플레잉을 신경 쓰는 유저들 정도 제외하면 크게 언급되지 못하고 묻힌 모드에 가까웠음.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드를 꾸준히 좋아하고디스코드에 와서 소통하고 피드백해주는 팬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됨. 물론 이 과정에서 마블에 고증을 찾을꺼면 너만의 게임을 만들어라라는 긁는 어그로부터이정도 정성이면 나중에 게임 개발 관련 작업에 참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라는 응원도 있었는데이러한 반응들은 진짜 아무도 예상 못한,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이 부부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림.모드 제작에 집중하던 이 시기에 티모시 벤더에게는뜬금없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됨.'여러 나라에 다양한 게임 개발사와 배급사가 존재하는데, 왜 같은 장르 내에서 안정적인 시스템과 범주들이 지긋지긋하게 등장하는가."'한 장르 내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데 왜 비슷한 국밥같은 느낌만 지긋지긋하게 나오는건가.'물론 이러한 문제는 게임 개발사, 배급사 모두 회사이기에 돈과 직결되는 문제임은지나가는 사람들도 알법한 단순한 문제였지만이 근본적인 의문은 '왜 돈과 관련해서 장르나 시스템 관련해서 참신한 시도, 해석 자체가 드물게 발생하는가'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티모시 벤더는 수소문한 결과 한 가지 원인을 발견하게 됨.그건 바로 배급사와 개발사 사이의 관계에서 개발사가 매우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임.배급사는 보통 게임 개발비, 홍보비, 유통같은 자금적인 부분에서 모든 지원을 하게 되고개발사는 그러한 지원을 받아 게임을 제작, 출시하게 되는 점인데당연히 모든 자금을 배급사가 지원하다 보니 게임 판매 수익은 일단 배급사가 모든 투자 금액을 회수한 다음에 순차적으로 분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이렇기에 해당 게임이 흥행하지 못해서 개발비를 건지지 못할 경우에는 개발사는 돈을 전혀 못벌게 되니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해체되거나, 인수되거나, 아웃소싱 전문 회사로 노선을 바꾸는 일이 1990~2010년대에는 매우 빈번했음.그렇다보니 개발사들이 '안정적인 느낌'으로만 게임을 만들려는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장르적 다양성이나 해석, 창의성이 제일 떨어진 시기였다고 보게된 것.(실제로 이 시기에 출시된 게임들은 일부 히트작들을 제외하면 전부 유명 게임의 클론 수준이라 현재 스팀, GOG에서 찾지도 못할 수준의 양산게임이 있음..)이렇기에 티모시 벤더는 당시에 업계에 악평이 자자하던 이러한 배급 구조를 조금 비틀어서 배급사가 개발사들에게 조금씩 양보해주면 '게이머로서' 본인이 좋아하는 롤플레잉,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보다 다양한 게임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됨.물론 이런 해석에는"그렇게 시도 해보고 싶으면 너 돈이나 써라" "배급사들이 자원 봉사하는 줄 아냐"라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었고이러한 반응에 티모시 벤더는 "ㅇㅋ 내 돈 쓸게" 하고 회사를 설립함.그 회사의 이름은 본인이 만들었던 모드 팀 이름이었던 '후디드 호스'였음.실제로 벤더는 자신이 회사를 설립한 동기의 절반 이상은무려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 내에서 보다 많은 게임들이 만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설립했다는 답변을 했는데해외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CEO, 탐욕한 CEO로 유명해진 편...아무튼 회사를 설립했으니본인들이 유통할 게임이나 개발사를 찾아야 했는데 알다시피 게임을 좋아했을 뿐이지게임 업계와 관련된 능력이나 인맥은 전무했기에 2019년에 회사를 막 설립했지만1년 넘게 딱 한 개의 게임만 출시 계약을 진행하는 초라한 성과를 냈는데 놀랍게도 그가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 게임은본인이 대학 시절에 연인과 같이 즐겼던 인생 게임의 모드이자같은 모드 커뮤니티에서 소통했던 이력이 있는"엑스컴 롱워 모드" 제작진의 첫 게임. 테라 인빅타였음.테라 인빅타는 롱워 모드 제작진의 독립 개발작품이라는 타이틀로킥스타터에서도 엄청난 후원을 받았지만이 회사는 본인들을 게임 출시와 현지화를 도와줄 배급사가 필요했음당시 이들에게 접근한 배급사 대부분이 '롱워 제작진' 타이틀때문에 접근한 것이였는데후디드 호스만이 유일하게 게임 내적으로 어떠한 시뮬레이션 요소가 있는지, 지구 단계와 우주 단계에 어떠한 플레이 차이가 있는지게임의 깊이와 호불호, 4X 매니아들을 충족시킬 요소가 무엇이 있는지 같은 게임성과 관련된 부분에 오히려 더 관심을 보였기에테라 인빅타 개발진은 이들과 계약을 맺기로 결정해버림.2020년,실제로 2019년에 설립된 후디드 호스와 관련해서 벤더는 자신의 모드를 즐긴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이 이제 배급사가 된다는 공지를 올리며 모드 제작에는 은퇴한다는 공지를 올리게 됨.그리고 자신들이 배급하게 될 첫 게임은 테라 인빅타라는 빅 뉴스를 당시에 공개함.대다수 게이머들은 "아니 어떻게 모드 제작팀이 저 게임을 배급하게 된거지" 라는 반응이 다수였음.테라 인빅타는 과도한 아스퍼거 요소로 조금 호불호가 있긴 했지만엄청난 흥행을 하면서 후디드 호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후디드 호스는 본인들의 배급 기준을 설립하게 됨.첫 번째, 후디드 호스는 개발사들을 위해 최소 10만달러 이상의 현지화 및 마케팅 예산을 책정할 것대다수 인디 개발사들이 힘들어하는 영역이 현지화와 마케팅 부분이었기에 이 부분과 개발비를 지원해주고 창의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것일정 퀄리티 이상의 현지화는 다양한 국가의 게이머들의 유입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립된 기준이었음.두 번째, 투자 비용 회수나 손익 같은 부분을 신경쓰지 않고 모든 판매 게임 수익의 65%는 개발사에게 배분할 것.투자자가 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지는 것이 당연하고 개발사들과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수립된 기준이었음.이러한 기준은 당시 업계에서 매우 파격적인 기준이었기에롤플레잉, 시뮬레이션, 전략 게임을 개발하려던 인디 제작사들이 후디드 호스와 미팅을 가지게 됨.그리고 이 시기에 재정, 예산 수립 관련해서는 문외한이었던 남편을 위해회사 설립 당시에만 도움을 줬던 아내 스노우 루이가 본인의 직장을 포기하고남편 회사의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합류하게 됨.이러한 지원군 덕분에후디드 호스는 적은 예산으로도 적재적소에 성공적으로 마케팅하고 현지화해서 출시화 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가면 갈수록 선순환으로 보다 많은 개발사들이 이들과 협업을 하기 위해 찾아오게 됨.2020년 당시에만 해도 계약 한건만 성공하고2022년 당시에는 단 두개의 게임(테라 인빅타, 올드 월드)만을 출시했던 후디드 호스는2024년 기준으로 20개의 배급을 배급하는데 성공함.특히 짧은 기간에 테라 인빅타, 올드 월드, 카타클리스모, 놀랜드, 매너 로드, 어게인스트 더 스톰 등예상치 못한 흥행작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흥행시키자2023년까지만 하더라도 인디 기대작 한두개 언급되는 배급사에서순식간에 주요 웹진에서도 관련 일화랑 기사를 다룰 정도로 주목받고 있음..이러한 성공에 벤더는 본인들의 성공 신화와 관련된 방식을 몇개 언급했는데직원들 절반이 유명 인플루언서 또는 해당 장르 스트리머였다는 점,자사 기대작들을 베타, 데모 단계에서부터 플레이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면서 해당 장르 커뮤니티 유저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입소문, 홍보가 되는 방식을 사용한 것.대표적으로 어게인스트 더 스톰, 매너로드, 카타클리스모가 이러한 방식으로 입소문을 타고 엄청나게 흥행했음.그리고 기존에 주요 개발사, 배급사들이 공략하지 않는 시장을 공략한다는 점전략, 시뮬레이션 장르 개발사들은 기존에 일본 시장을 등한시 해오는 풍조가 있었는데알다시피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티모시는 이러한 분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여일본 인플루언서들을 통한 홍보 전략에 집중, PC 게임 시장이 상대적으로 약세인 일본에서 5% 이상의 판매량을 이끌어냈다고 함.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립 배경이기도 했지만, 후디드 호스는 대형 배급사와 달리 배급사도 리스크를 부담한다는 차이점 덕분에 개발사들이 기존 장르에서 시도하지 못한 시도를 보다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다는 것.물론 이러한 방식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회사 설립자 부부가 RPG, 시뮬레이션, 전략 게임 분야에서 겜잘알이라 게이머 기준으로 게임을 알아 보는 안목이 있다는 점,그리고 부부가 엘리트 출신 + 돈이 충분하다는 것이라서아무나 따라할 수 없음...
작성자 : 한지은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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