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새끼, 포기하기는.”
나는 텅 빈 지하 연습실을 보며 홀로 기타를 쥐었다. 줄이 손에 휙휙 감기는 느낌이다.
휴대폰을 꺼내자, 그 위에는 9994 : 39 : 07이라는 숫자가 나타나 있다.
“이제 이 빌어먹을 고물 아이폰도 버릴 때가 됐어.”
이 아이폰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이 스톱워치 때문이다. 1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허나, 좀 커다란 일이 있었으니 나는 숫자 옆에 메모를 하나 적는다.
9994 : 39 : 07
-나 혼자 남음.
메모는 그 위로도 듬성듬성 있다. 초기에는 ‘오늘은 처음으로 비틀즈를 완곡함.’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음.’ 같은 것도 적어놨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열심히 적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에 적은 건... 700시간 전의 일이다.
9221시간.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음.
대체 뭐 때문에 피웠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예술인이라는 게 그렇다. 하루하루만 보고 사는 이들에게 과거를 기억하기란 힘들다. 그걸 알았으면 좀 열심히 적어놓지 그랬니, 과거의 나야? 그 다음은 고작 20시간 전이다.
9201시간.
-솜사탕을 팔던 어머니가 쓰러졌음.
아, 맞다. 그제서야 기억이 나네.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팔던 어머니가 픽 하고 쓰러졌다. 뭐랬더라, 저혈압이라고 했나.
설탕을 백 배로 부풀려 솜사탕을 만들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두 부모가 찾아온 것이 기억난다. 꿈과 희망을 위해 간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이 끔찍한 기억만을 갖고 나왔다며 우리에게 배상금을 요구했다.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타를 휘둘러 그들을 내쫒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두 배는 열심히 할게요.
800시간밖에 안 남았거든요.
8704시간.
-오랜만에 작업실에 옴.
나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손 끝에 느껴지는 피부가 살짝 밋밋하다. 그러니까, 이건 아버지가 던진 전기파리채에 머리를 부딪혀 다친 거다. 뭐,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버지 손에 잡히는 것이 전기파리채가 아니라 파리지옥 화분처럼 무거운 것이었다면 나는 분명 죽었을 테니까.
살아있다는 건 늘 즐거운 일이 아닌가.
8689시간.
-군대를 전역함.
아, 맞다. 이것 때문에 맞았다. 군대를 전역했는데 왜 후드려 맞았냐, 물어본다면... 내 전역이 예정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다.
아버지가 한 말이 몇 가지 기억난다. ‘네가 아프다고? 난 너를 20년 넘게 봤다.’ ‘네가 부끄럽다.’ ‘남한테 폐는 끼치지 말고 살라 했잖니.’같은 것들이었다.
“괜히 기분만 잡쳤네.”
나는 다시 기타를 쥐었다. 5시간 넘게 연습을 하는 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은 힘을 내도 되는 날이다.
-1만 시간을 채우면 모두가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스톱워치를 켰다.
9994 : 39 : 07
9994 : 39 : 08
9994 : 39 : 09
9994 : 39 : 10
순식간에 초가 흘러가고, 나는 이게 40분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9994 : 40 : 00.
정확하게 멈추는 데 성공했다. 지금 시간은 2시 38분.
2시 40분까지 기다린다. 강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맞는 숫자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2시 40분이 되자마자 다시 버튼을 눌렀다.
세 시.
9995 : 00 : 00
오늘의 첫 곡으로는 뭐가 좋을까, 악보를 뒤지다가 <gift>라는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꾸준히 하는 것도 재능입니다.”
나는 15년 전, 세일즈맨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1만 시간을 쌓으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다는 것도 믿었다.
다섯 시.
9997 : 00 : 00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했다.
여섯 시.
9998 : 00 : 00
두 시간 남은 시점. 나는 슬슬 배가 고프다 싶어 음식을 주문했다. 짜장면? 짬뽕? 죄다 구리다. 오늘 같은 날은 좀 괜찮은 게 좋겠다 싶어 초밥으로 결정했다.
일곱 시.
9999 : 00 : 02
초밥이 와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리고 다시 기타를 잡았다.
악보보단 시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9999 : 59 : 50.
나는 아폴로 우주비행사와 같은 심정이 된다.
어릴 때처럼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곡도 바꿨다.
Europe의 <Final Countdown>.
***
그 순간, 나는 기타를 사던 어린 소년이 된다.
-이것만 있으면 연습이 잘 돼요.
눈앞에 수염 덥수룩한 개자식이 건네는, 하자 있는 기타를 받으며 생각한다.
10년 후의 나는 대단한 뮤지션이 되어 있지 않을까?
허나,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본다.
-1만 시간입니다, 1만 시간!
개자식의 얼굴은 어릴 때 보았던 세일즈맨의 얼굴로 바뀌어 있다.
아니, 앤더맨이지.
누군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기둥을 슬쩍 빼 가는, 게임 속의 앤더맨.
그리고 그리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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