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커레이드
0.
Zorvansk, Tarnovia.
알지 못하는 나라의 알지 못하는 수도다. 동유럽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낯선 도시 조르반스크에, 언니는 도대체 어떻게 정착해 살았던 걸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비행기에 탑승한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생전 처음 가보는 외국인데. 그게 실종된 언니를 찾기 위해서가 될 줄은.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지정된 좌석으로 간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착용하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그래.
겁먹을 거 없어.
언니가 부탁한 대로만 하는 거야.
나는 언니에게서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를 확인한다.
'은서야, 한 달 안에 연락이 없으면 날 찾으러 와줘. 언니는 타르노비아의 조르반스크에 있어. 여행 경비는 혹시 모르니까 미리 송금해둘게.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워치 타워란 건물을 찾아가. 택시 기사라면 다들 어디 있는지 알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신수호란 남자를 만나.
명심해. 조르반스크, 워치 타워, 신수호. 남자와 접촉하는 데 성공하면 뒷일은 그가 해결해줄 거야.'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내 몫은 조르반스크에 가서 남자 한 명을 찾는 걸로 끝. 그 다음은 그가 알아서 해줄 거라 하니까.......
언니.
기다려.
내가 꼭 언니를 찾아낼게.
다짐과 함께 기장의 안내방송이 조곤조곤 울린다. 몇 분이 지난 뒤 활주로를 달린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고, 나는 인천의 땅이 멀어져 풍경사진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1.
열세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비행기는 조르반스크에 도착해 있다.
입국심사를 마친 뒤 서둘러 짐을 찾는다. 택시를 타기 위해 나오면 모든 게 서러울 정도로 낯설다.
첫 해외여행의 두근거림 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언니에 대한 걱정과 긴 비행에 지친 피로감뿐.
공항 이용객을 기다리는 택시 쪽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짐을 트렁크에 실은 뒤 뒷좌석에 탑승하면 여상한 인사가 날아온다.
"Hello."
그래도 타르노비아어가 아니라 영어라 다행일까. 나는 어색한 솜씨와 발음의 영어로 떠듬떠듬 말한다.
"Hello. Do you know... where? The Watch Tower...?"
"Ah, yeah. Of course."
씩 웃으며 답한 중년의 백인 남자는 운전을 시작한다. 언니 말대로 워치 타워라고 하면 이 도시 사람은 다들 아는 모양이다.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택시가 조르반스크 시내를 미끄러진다. 도시는 이제껏 상상해온 전형적인 동유럽 수도의 느낌이랄까.
뾰족뾰족한 첨탑들이 늘어진 고풍스러운 풍경. 고딕 스타일의 건축물 너머 멀리로는 마천루가 보인다.
어딜 돌아봐도 백인들인 나라라 동양인 여자는 나 하나뿐인 것 같다. 모든 게 새롭고 무섭지만 언니를 생각하며 꾹 참는다.
언니는 더 외로웠겠지.
괴로웠겠지.
돈을 벌기 위해 이 만리타향에 혼자 사는 건.
십 분쯤 지나 택시는 한 건물 앞에 멈춘다. 사업적인 건물이라기보단 영화 속의 대성당을 떠올리게끔 하는 장소다.
웅장한 중심부를 둘러싼 채 하늘 높이 뻗는 첨탑들. 여기가 워치 타워란 곳일까?
택시 기사는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며 나를 살짝 돌아본다. 나는 지갑을 꺼내 현금으로 계산을 마친 다음 내린다.
막상 내려보니 그 엄청난 규모에 주눅이 든다. 당당하게 들어가려니 너무 부끄러워 대문 앞을 조금 서성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게로 온다. 그는 아마 타르노비아 말일 언어로 뭐라뭐라 통화를 하더니 익숙한 이름을 꺼낸다.
"Su-ho Shin? Did you come here to see Mr. Shin?"
"Yes. 그게... My sister sent me to Mr. Shin... 그러니까......."
"Okay, okay. I'll guide you. Don't worry."
돈 워리. 걱정하지 말라 그랬지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경비원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워치 타워의 내부는 외관보다도 더 화려하다. 근대 유럽 절대왕정 시기의 궁전 같달까. 절로 천민이 되어버린 기분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나를 한 집무실 앞에 데려다 둔 뒤 경비원은 곧바로 떠난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나는 그대로 문을 두드린다.
"네, 들어오세요."
중저음인 남자의 목소리.
갑자기 눈물이 날 거 같다.
이 이국 땅에서 듣는 한국어가 뭐라고, 오래 전에 헤어진 부모님을 만나기라도 한 듯 울컥한다.
나는 문고리마저 조심스럽게 돌리며 인사한다.
"실례합니다."
안에 들어서면 공기는 건조하고 따스하다. 은은하게 기분 좋은 시트러스풍 방향제가 느껴진다. 의외로 건물 복도에 비하면 소박한 분위기의 집무실이다.
절제미 있는 장식들 사이로 젊은 남자가 보인다. 남자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나는 실례라는 것도 잊은 채 감탄한다.
꼭 조각 같아.
한국적인 외모지만 어딘가 그리스 조각상 같은 비율과 이목구비다. 마치 신이 가장 이상적인 한국인의 표본을 만들어둔 듯한 남자랄까.
그치만...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무섭다. 사람이 아니라 정교하게 다듬어진 밀랍인형을 보는 듯한 이질감이 들어.
겨우 정신을 차린 난 우스꽝스럽게 헛기침을 한다.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신수호 선생님 맞으신가요? 채은서라고 합니다."
"아... 채진아 씨 동생? 언니가 여길 와보라 그랬어요?"
"네, 자기가 실종되면 찾으러 와 달라고... 선생님이 절 도와주실 거라 했어요."
"그래요? 이상하네. 그 여자가 날 신뢰할 리 없는데."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잠깐 당황한다. 뭐야, 언니. 언니랑 말이 다르잖아. 뒷일은 남자가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 하더니.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좀 더 착실하게 준비를 해서 왔어야 하나?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자 불쑥 일어난 남자가 내쪽으로 다가온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느낌에, 탄탄한 몸에서 오는 위압감이 상당하다. 나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치지만 그가 한 발자국 성큼 쫓는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천연스럽게 내 가방을 확 뺏아 뒤지더니 여권을 챙겨간다.
"잠깐만요!"
"왜요?"
"제 여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 은서 씨 생각엔 무슨 짓 같은데요?"
"여권을 뺏다니... 납치잖아요, 이거."
"맞아요."
"네?"
"은서 씨, 납치된 거 맞다구요."
"그게 무슨......."
말끝을 흐리는 날 보더니 피식 웃은 남자는 그대로 뒤돌아선다. 여권을 멋대로 자기 책상 위에 툭 던지더니 돌아가서 앉는다.
"안 그래도 은서 씨가 필요했는데, 설마 제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채진아 그 여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필요했어?
내가?
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그를 바라본다. 여전히 밀랍인형처럼 이질적인 생김새의 그를. 소름끼치게 웃는 얼굴 뒤에 무슨 감정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낸다. 불을 붙여 마신 뒤 후, 내뱉으면 방 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독한 연기에 결국 기침이 나온다.
"콜록, 콜록. 계속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신고? 해 봐요. 조르반스크에는 은서 씨 도와줄 사람 없을 걸."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 휴대폰을 꺼낸다. 긴급전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하려다가, 문득 섬찟해져서 손이 멈춘다.
소름이 돋는다.
그의 말대로 나는 이방인일 뿐이지만 그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게 틀림없다.
타르노비아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거의 신정에 가까운 독재 체제인데 이런 나라에서라면... 신고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대사관에 연락해야 할까? 아니 애초부터 언니 말만 믿고 여길 온 게 문제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하는데.
눈물이 핑 돈다. 가슴이 먹먹해져 울고 있으니 남자가 귀엽다는 듯이 말한다.
"은서 씨, 생각 잘 해요. 어차피 채진아 동생이라면 그쪽 사정도 뻔한데. 서로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하시죠."
"흑, 흐... 원하시는 게 뭐, 뭔데요."
"원하는 거? 어치피 곧 알게 될 거예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런...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발, 저, 저, 흐흑. 보내주세요. 하나뿐인......."
"그만. 우는 거 듣기 싫으니까 나가요. 사람 부를 테니 따라가."
명령조로 덧붙인 마지막 말은 은근한 협박처럼 들린다. 제자리에 못박힌 채 계속 울던 나를 경비원 한 명이 다가와 반쯤 끌고 간다. 그것도 우악스러운 손길로 팔을 꽉 잡아 쥐면서.
"아, 악. 저기, Please......."
아픈 티를 내지만 경비원은 내 처지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이 차가운 눈빛으로 묵묵히 걸어간다. 지나쳐가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도와달라 하지만 전부 못 본 체 외면할 뿐이다.
여기 이상해.
평범한 회사나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 억지로 끌려가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니.
나 어디 팔려 가는 거야? 아니면 이상한 종교 시설에 감금된다거나?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영어로 외쳐보지만 경비원은 팔을 더 세게 쥔다.
뼈가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 얼마나 오래 끌려온 건지도 모르겠다. 경비원에게 휴대전화까지 빼앗긴 나는 침실 같은 방에 갇힌다.
도대체, 도대체 어째서 이런.......
무섭고 아프고 서럽다. 도와줄 거라는 사람을 찾아왔더니 느닷없이 감금부터 하다니.
언니.
날 이런 꼴로 만들려고 불러낸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신수호란 남자가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며. 이런 건 해결이 아니잖아.
아무리 언니를 불러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팔이 아파서 계속 울다가 그대로 지쳐 잠든다.
2.
얼마나 잠들었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어.
그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야. 숨이 막혀와. 바닥이 없는 수영장 아래로, 아래로.......
엄마,
언니,
난 언제쯤.......
---깨어남.
창문 밖을 보면 어둠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비친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주거지와 불야성의 마천루 숲.
한 순간 낯선 도시에 감금당한 현실이 떠오른다. 어제 붙잡힌 팔이 찌릿찌릿하게 아프다. 나는 몸을 가볍게 떨다가 용기를 내어 문 앞에 선다.
노크와, 정적.
당연히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대로 손잡이를 돌려 열고 나가려는데 자물쇠가 걸려 있다.
하긴, 그럼 그렇지.
나 진짜로 감금당한 거구나.
어쩌면 좋을까. 고민해봐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창문으로 뛰어내렸다간 즉사할 정도의 높이고.
신수호... 그 남자는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야? 몸?
스스로의 자신감에 어이없어져 고개를 젓는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니까 굳이 나 같은 걸 납치할 이유야 없겠지.
그래서 더더욱 불안하다. 그에겐 내가 필요하다고, 제발로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필요하다고.......
언니.
언니가 날 팔아넘긴 거야?
배신감과 여전히 믿는 마음이 공존한다. 언니, 먼 나라에서 동생을 위해 일한 언니. 내 유일한 가족.
언니가 나를 버렸을 리 없다. 언니가 나를 팔았을 리도 없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언니를 계속 믿을 거야. 언니가 뭔가 오해했다고 믿을 거야.
침대 위에서 몸을 끌어당겨 앉은 채로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한 방 안에 홀로 있으니 무섭다.
얼마나 더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그 남자가 나를 잊어버린 채 굶겨 죽이기라도 하면?
갑자기 갈증을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배고픔은 참을 만하지만 목마름은 아니다. 나는 결국 화장실 세면대의 물을 받아 마신다.
유럽 수돗물의 악명과는 달리 맛은 그럭저럭 괜찮다. 화장실 물을 마신다는 비참함이 문제일 뿐.
언니, 언니... 나 좀 도와줘... 언니가 항상 날 도와줘서...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됐나 봐.......
속말로 중얼거리면서 거울을 본다. 한껏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한 스스로의 꼴이 우습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비치된 수건을 꺼내 닦는다. 빗을 들어 머리도 그럭저럭 정리한다.
귀신 꼴은 면했지만 여전히 볼품없긴 마찬가지다. 낯선 장소에서 혼자 샤워하긴 싫은데, 그치만 이런 모습으로 신수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왜?
모르겠어.
다시 침실로 돌아오면 밤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쩐지 불길한 그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나는 귀를 막은 채 눈을 감는다.
한참이, 한참이 더 지나고 나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자물쇠로 감금해놓고 들어올 땐 노크라니, 이런 어긋난 매너는 도대체 뭘까.
"네."
굶어 죽긴 싫어 대답을 하니 신수호가 문을 연다. 여전히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하나의 흐트러짐조차 없는 모습이다. 그는 아주 나이스한 사람인 척 평범한 인사를 해온다.
"은서 씨, 잘 잤어요?"
"잘 잤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을 가둬놓고."
"기운이 넘치네요. 다행이다."
정장 차림의 신수호에게서는 산뜻한 제라늄 향기가 난다. 그는 여자 혼자 있는 침실에 들어오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불쑥 문지방을 넘는다. 그가 침대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는 다급하게 외친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왜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 거 같아요?"
"그런......."
노골적인 질문에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파묻는다.
바보 같긴. 자길 납치한 사람 앞에서 얼굴을 붉히다니.
내가 부끄러워하든 말든 그는 내 바로 앞에 와서 선다. 손목을 세게 붙잡아 이끌어서 비명이 터진다.
"아악!"
젠틀한 사람이라 폭력을 쓸줄은 몰랐다. 그가 내 옷의 소매를 걷어올리더니 손톱으로 상처를 낸다. 아주 세게 긁어서 살이 뜯기는 느낌이 들 만큼.
"아, 아파요. 왜 이러세요. 제발......."
거칠게 난 상흔 위로 핏방울이 맺힌다. 찢어발겨진 내 손목에 그가 입을 맞춘다.
쭙, 쭈웁.
외설적인 소리와 함께 그는 내 피를 빨아 먹는다. 뭐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잠시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그가 한 발자국 물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비인간적인 짓을 한 그의 얼굴이 비로소 인간적으로 보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쥔다. 피는 금새 응고된 건지 더 흐르지 않지만, 아픔과 열기와 간지러움이 동시에 올라와 괴롭다.
"이게 무슨, 흑, 짓이에요... 왜, 왜......."
"역시, 은서 씨는 채진아의 동생이군요."
"그게 이거랑 무슨... 흣, 악!"
그는 이번엔 아예 내 쇄골 부근에 이빨을 박아넣는다. 내 몸을 억지로 껴안으면서. 어깨를 바스러질 정도로 세게 껴안으면서.
버둥거리지만 완력 차이 때문에 저항은 소용이 없다. 그는 삼십 초쯤 내 피를 빨더니 만족한 듯이 물러난다.
피를 많이 빨린 탓인지 어지럽다.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우는데 다행히 폭력은 이어지지 않는다.
"흑, 흐윽. 무슨... 무슨......."
"별로, 은서 씨가 신경 쓸 건 없어요."
그렇게 말한 신수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앉는다. 겁에 질린 채 물러나려는 내 어깨를 감싸면서.
"은서 씨."
"네, 네......"
"당분간 여기서 살아요. 가끔씩 피만 공급해주면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그, 그럼 언니는......."
"채진아? 그 여자는 어차피 당신 같은 건 신경도 안 써요. 찾아봐야 소용 없을 걸."
"언니가 그럴 리 없어요."
"미안하지만 난 은서 씨보다 채진아를 잘 알아요. 그 여자가 당신을 나한테 보냈단 건, 당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쓴다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지금 나한테 반말했어?"
갑자기 분노한 그는 일어서며 내 머리채를 쥔다.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를 친 다음 가슴팍을 밟는다.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잠깐 동안 숨을 쉴 수가 없다.
"컥, 커흑......."
"은서 씨, 잘 들어요. 당신 언니는 당신을 버렸어. 그러니까 얌전하게 내 말이나 들어. 그편이 나한테나 당신한테나 좋을 거야. 알겠어요?"
"윽, 흑......."
"대답해요."
"네, 네... 제발, 때리지 마세요."
나는 몸을 말아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쉰다. 신수호는 나 같은 건 어찌 되든 좋다는 듯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나간다. 찰칵, 하고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난다.
가슴팍의 통증이 계속 올라온다. 그와 함께 언니에 대한 불신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
언니,
정말로 날 버린 거야?
아니지?
저 남자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언니, 언니.......
의식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
다음 날 새벽,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난 나는 몸을 더듬는다.
벌레가 피부 위로 기어다니는 것 같은 환각이 느껴진다. 발작하듯 온 몸을 털어낸 뒤에야 주변이 아주 깨끗하다는 걸 알게 된다.
"아, 아......."
자존심과 의지가 밑바닥까지 가라앉는다. 어제 당한 일방적인 폭력이 계속 떠오른다.
생살이 뜯기고, 피를 빨리고, 가슴팍을 짓밟히고.
나는 뭐야?
역시 나는 작고 무가치한 인간일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 무슨 짓을 하든 그래도 되는 사람.
침대 위에 누워 무기력한 눈물만을 계속 흘린다. 언니한테도 나는 딱 그정도 가치였던 거지.
이상한 남자에게 말 한 마디로 팔아버릴 물건. 가족이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멍청한 여자애.
언니와 신수호의 얼굴을 떠올리자 한기가 으스스 올라온다. 어쩐지 두 사람이 비슷한 종류의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다정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텅 비어 있는 인간.
필요하다면 남을 폭행하고 착취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인간.
아니야.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니라고 해줘, 제발.......
"은서 씨, 들어가도 될까요."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생각을 잘라먹는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잠든 척을 하려 한다. 하지만 신수호는 내 연기에 속지 않는다.
"안 자는 거 알아요. 겁먹지 마세요. 오늘은 피 안 빨 거니까."
어떻게 알았어? 도촬당하고 있는 거야? 나는 새하얗게 질린 상태로 몸을 끌어안는다.
싫어.
오지 마.
들어오지 마. 제발.......
"어제는 미안했어요, 은서 씨."
다행히 그는 문 앞에 서서 넋두리처럼 후회하는 말을 잇는다.
"피를 오래 못 마셔서 살짝 미쳐 있었어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용서해주세요."
뭐랄까,
용서를 비는 그의 목소리가 천사처럼 비현실적이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 목소리의 꼬임에 넘어가고 만다.
"정말...이에요?"
"정말로요. 어젠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럼 언니에 대한 말도 거짓말인 거죠?"
"아뇨. 그건 아니에요. 은서 씨, 절 믿어야 해요. 은서 씨 언니는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에요."
"거짓말."
"은서 씨를 감금한 다음 이러는 게 우스운 건 알아요. 하지만 이건 다 은서 씨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에요."
"보호, 라뇨."
"그런 사정이 있어요. 은서 씨와 채진아는 특수한 피가 섞인 사람이거든요."
"피?"
"사람이 아닌 것의 혈통이 섞여 있다는 거죠. 나한테 은서 씨가 필요한 만큼 은서 씨한테도 보호가 필요해."
사람이 아닌 것?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는, 언니는.......
DúÁü Å×e½sºÆ.
SẽúÇü Vœþesºłðf.
머리를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찌릿, 한다.
마천루의 불야성과 피와 많은 사람의 많은 죽음.......
우리 모두의 잘못.
일곱 머리를 단 붉은 용이 각각의 머리마다 관을 썼으며 공중의 권세가 그의 앞에 엎드리니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고 봉인을 풀자 시체들의 산더미 아래로, 깔려죽은 노인 위에 아이들과 십사만사천의 인류와 그밖의 산짐승과 들짐승이 제 머릿수대로, 홍수 대신 핏물에 잠긴 채 죽어가는 이들이 구원을 부르짖으며... 죽지 못하는 자가 마천루 동편 꼭대기에 이르니, 회계사와 증권 거래인과 그밖의 많은 이들이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그를 경배하며 엎드려 말하길, 저희가 재물과 하느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며, 그러므로 공중의 권세요 일곱 머리의 용이 죽지 못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괜찮으세요? 은서 씨?"
"헉, 하, 이게 대체, 무슨......."
"은서 씨. 나를 믿어요.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야."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제발... 절 살려주세요......."
나는 밀려오는 고통과 환각에 숨을 미친 듯이 몰아쉰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
사랑한다!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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