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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11.24 00: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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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정착한 국가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예시로 든 사진은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3국(자캅카지예), 캅카스 이북(프렛캅카지예), 남러시아 일대이기에 간다효의 주장은 적절치가 않다.

슬라브 민족주의 오류 문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지배 문제로 슬라브 민족주의가 태동했다고 이야기했는데, 헛소리다. 1800년대 초반의 오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영유할 뿐이었고 대부분의 발칸 반도 지역을 장악하고 슬라브인들을 지배하던 나라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등의 발칸반도 슬라브권 국가들은 이 오스만 제국에게 저항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투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슬라브 민족주의가 태동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또한, 오스만으로부터 발칸의 슬라브 형제들을 독립시키고 그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슬라브 민족주의를 이용했지,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슬라브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19세기 초의 오스트리아는 애초에 이중 제국도 아니고, 아직 신성 로마 제국이 살아 있던 시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잡아도 수십 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다. 그리고 마자르족이 뭔지 몰라서 헝가리 민족이라고 부른 부수적인 왜곡도 있다.

키예프 루스 정체성 문제
바이킹들이 슬라브인들을 정복한 뒤, 피지배층인 슬라브인들에게 바랑인(바랴크)들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고 루시가 노르드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것도 헛소리다. 바랴크들의 문화가 키예프 루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어에서 노르드인들의 영향을 받은 어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고 루시의 다양한 문헌들 또한 불가리아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고 얼핏 잘못 생각하면, 토르의 모방으로 볼 수 있는 슬라브의 최고신인 페룬은 이미 6세기에 비잔틴쪽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노르드인들이 슬라브인들을 동화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슬라브인들이 노르드인들을 동화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동로마 - 키예프 루스 전쟁
비잔틴측에서 종교적 문제로 루시와의 수교와 무역 협정을 받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 간의 전쟁이 터졌다고 이야기하는데 역사 왜곡이다.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지역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무역로와 이들 지역 간의 무역 관계는 길게 보면,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이어지던 것이고 루시 성립기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했다. 로마인들은 종교 문제로 무역을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편협하지 않았으며 유대교 국가인 하자르, 이슬람권, 발칸의 슬라브인, 여타 유목민들과 잘만 교역했었다. 사산조와 대립할 때는 돌궐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 무역에 대해 협의하고 우호 관계를 수립해 사산조의 비단길 차단에 대응하고 초원길과 흑해를 중심으로 하는 무역로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로마 - 키예프 루스 전쟁이 941년에 처음 발발한 것도 잘못된 내용이다. 키예프 루스는 이미 880년과 907년에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목적으로 원정을 진행한 바 있으며 올레그 대공의 907년 원정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루시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협정을 체결했었다. 그리고 941년 원정 당시의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의 공세를 받던 시점이 아니라, 로마노스 1세의 영도하에 이슬람 제국을 상대로 반격을 가하던 상황이었다.

대공 용어 문제
동아시아의 조공 - 책봉 관계에 빗대어 마치 루시의 공후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책봉받는 것처럼 묘사하고, 루시 공후가 동로마 제국 황제와 상하 관계가 있어 왕이란 지위를 쓰지 못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루시의 지배자들이 사용한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명칭은 국가의 지배자를 의미하며 이들이 스스로를 크냐지로 칭했을 때는 대공이란 뜻이 없었다. 유럽권에서는 루스의 벨리키 크냐지들을 호칭할 때에 왕과 대공이라는 표현을 혼용했으며 번역 문제도 생겨나서 루시의 크냐지들을 부를 때는 대공, 또는 공후라는 표현이 굳어져 버렸다. 애초에 조공 - 책봉 관계 때문에 왕을 칭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루시 성립 이전에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을 비롯한 다양한 관직을 하사받아 책봉과 유사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왕을 칭했던 사례를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초르노젬 문제
러시아의 경작 가능한 토지가 카프카즈 산맥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털"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본 조사도 안 된 주장이다. 소 연방 말기 기준으로 러시아 공화국은 연방 전체 곡물의 55%, 해바라기, 감자, 식육우, 우유의 50% 이상, 계란 58%, 사탕무 33%, 채소 42%를 생산했다. 러시아의 토양이 척박하다지만, 충분히 경작이 가능한 지역들이 많으며 흑토 지대란 것도 우크라이나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모스크바 남부, 중앙 러시아 지역의 탐보프, 보로네시, 벨고로드, 쿠르스크, 볼가 강 유역도 흑토 지대에 속하며 하다못해 시베리아에도 흑토 지대가 있다. 게다가 그 비옥하다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는 농업 생산량은 많을지라도 농업 생산력은 근대까지도 좋지 못했다. 19세기 초 기준, 흑토 지대의 생산비는 종자 1 : 수확량 4.3이었으며 농노 해방 시기에는 1 : 5.0 수준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는 국가 전체 평균 종자 대비 생산량이 1 : 5 ~ 6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고, 상퍄뉴 같이 비옥한 지역은 이미 중세에 1 : 10의 수확량을 거둘 정도였다. 그리고 농업 선진 지역인 영국과 저지대 지역은 프랑스보다 생산비가 더 좋았다. 흑토 지대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의 경우, 16 ~ 17세기의 종자 대비 호밀 생산량이 1 : 2 ~ 4인 토지가 전체의 60%였다. 체르노젬, 체르노젬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로 흑토 지대의 생산력이란 것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다만 간다효의 주장 진실성과 별개로 해당 비판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농업사, 농민사의 전반이 가용 자료의 부족과 낮은 신뢰성으로 인해 자료해석은 물론이고 간단한 수치자료들조차 오늘날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나치게 무시한 처사이다. 해당 자료가 옳다는 전제하에 말해도 흑토지대의 쟁점은 토질은 좋으나 기후조건이 나쁘다는 것인데, 기후조건이 괜찮은 시기에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빌 정도는 됐다. 반대로 안 좋은 시기에는 농민들도 다른 대책을 강구하면서 농업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심지어 포기해버렸기에 농업 생산량을 논하는게 무의미하고 기준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사라이 문제
킵차크 칸국의 지배자들이 키예프 루스의 기존 지배자들을 북부 지역으로 내쫓고 우크라이나에 정착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킵차크 칸국의 중심지는 볼가 강 유역이었고 수도는 볼가 강 하류의 사라이였다. 그리고 트베리, 모스크바, 랴잔 외에도 갈리치아 - 볼히니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 수즈달, 스몰렌스크 등의 공국들이 금장 한국의 칸에게 복종했다.

트베리, 랴잔, 모스크바는 쓸모 없는 땅이며, 모스크바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트베리, 랴잔, 모스크바는 러시아에서 역사가 오래 된 도시들이며, 모스크바 부근의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11세기 후반부터 폴로브치인들과의 전쟁과 내전, 무역로의 변화로 쇠락하기 시작한 키예프를 대신해 루스의 중심지로 성장했었다. 몽골 제국의 공세를 처음 맞이해 완전히 파괴당한 랴잔과 이후 공세로 붕괴한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몽골 침공 이후로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런 모스크바를 쓸모 없는 땅이라고 칭할 것이라면, 도시 전체가 아예 소멸해 버린 키예프는 대체 뭐라 해야 할까?

러시아 대주교좌의 이동 문제
러시아 대주교좌가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함에 따라 정교회에서 모스크바가 갖는 위상이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이 되었다고 비유했다. 정교회의 구조와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소리다. 간다효가 이야기한 '정교회계의 로마'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조지아는 이미 독립적인 총대주교좌가 오래 전에 착임해 모스크바보다 위상이 높았다. 특히 불가리아는 총대주교좌가 5개밖에 없던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을 압박해 새로이 불가리아 교회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키고 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의 위상을 가지려 노력한 동유럽의 강국이었다. 모스크바는 간다효가 말한 동유럽과 러시아 서부 전체의 종교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한낱 대주교좌에 불과했다. 아무리 콘스탄티노플이 쇠퇴하고 모스크바 대주교좌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체를 관할하긴 했지만, 그 위상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조지아 보다 낮았으며 형식적일지언정, 대주교 선출도 콘스탄티노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당대 동유럽과 러시아 서부의 정치 · 경제 중심지는 킵차크의 칸이 거한 사라이였고 이 곳에서 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헝가리, 조지아의 봉신들을 통제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쿨리코보에서 혼자 싸웠다.
실제론 연합군을 구성해서 싸웠다. 돈스코이는 마마이가 부른 리투아니아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쿨리코보에서 킵차크 칸국의 군대와 싸워 승전을 거두었다. 그리고 킵차크 칸국이 내분으로 분열하여 쇠퇴했다고 설명했는데, 이 과정에서 티무르 제국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티무르가 토흐타미시 칸의 군대를 박살내고 사라이를 불살라 킵차크 칸국의 쇠퇴에 결정타를 가했다는 사실은 누락했다.

이반 뇌제의 숙청
이반 그로즈니가 반대파의 3대를 멸한 이유를,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숙청당한 자들의 유족들이 죽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여 천국으로 갈까 봐, 죽였으며 죽은 이가 천상과 지옥에 가는 것은 본인이 결정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러시아사>, <러시아사 다이제스트>, <처음 읽는 러시아사>, <러시아의 역사>, <러시아 역사>, <러시아 역사 개정판>, 등등, 국내에 출판된 러시아의 역사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블라드 가시공에 대한 낭설과 그로즈니가 자신이 숙청한 이들을 위해 기도한 일, 기타 다른 인물들의 설화 등등이 섞인 이야기로 추정된다. 또한 그로즈니가 가만히 멀쩡하게 있는 지역을 갑자기 공격하고 약탈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차르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그로즈니 본인이 판단하기에 불충한 지역과 보야린들을 징벌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황권에 적대하는 세력은 상당했으며 최측근들조차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1553년, 중병에 걸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신료들에게 아들인 드미트리에 대해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으나, 보야린들은 물론, 최측근인 실베스테르와 아댜셰프까지 이를 거부했었다. 그들은 그로즈니의 사촌인 블라디미르 공이 이어받기를 원하고 있었고, 이반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전쟁 중에 보야린들이 그를 배신하는 일도 곧잘 있었다. 그래서 그로즈니의 대숙청과 파괴가 아무런 이유도, 맥락도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징벌의 규모, 잔혹성과 정당성, 오프리츠니키들의 도를 넘는 학살과 방화, 파괴였다.

알렉산드로프 사건
이반 뇌제가 제위를 버리고 알렉산드로프로 간 사건에서 귀족들이 이반 뇌제에게 다시 황제로서 국가를 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이유를 외세의 침공과 귀족들 간의 내전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그로즈니는 편지를 2통 써서 보냈다. 하나는 간다효가 말한 귀족들에게 보낸 것, 다른 하나는 간다효가 누락한 평민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차르의 편지 내용을 들은 평민들은 수천 명이 결집해 귀족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곧바로 대표들을 귀족 회의에 보냈다. 평민 대표들은 배신자들은 용납할 수 없으며 보야린 두마의 의원들이 황제를 찾아가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했다. 귀족들은 꾸짖으면서 평민들에게는 변함 없는 신뢰를 보낸 황제의 노림수를 파악한 귀족들은 알렉산드로프로 가서 차르에게 호소했다. 애초에 보야린들은 간다효가 이야기한 것처럼 황제가 제위를 버리고 간 일을 황제가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귀족 정서의 확산과 평민들의 시위, 황제의 부재에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간다효는 그로즈니가 다시 돌아가는 조건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통치하게 해줄 것과 반역자와 사악한 자들은 황제가 처벌할테니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2번째 조건은 사실이지만, 첫 번째 조건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거짓이다. 원래 이반이 제시한 첫 번째 조건은 전국을 황제의 직할령인 오프리츠니나와 사유지인 젬시치나로 나누겠다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그로즈니는 광대한 황실령을 구축할 수 있었다. 오프리츠니나와 젬시치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당대 러시아의 메스트니체스트보와 같은 시스템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 어물쩍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 이반의 죽음
그로즈니가 황태자비 옐레나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뺨을 때리고 학대했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만삭의 몸이던 옐레나의 복장이 지나치게 경박해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이유였으며 뺨을 때리고 학대한 게 아니라 지팡이를 들은 채로 구타를 가했다.[1] 그리고 황태자 이반이 그로즈니에게 이에 대해 항의를 할 때에 격노한 이반 뇌제가 칼을 찾으며 머리를 때렸다고 표현했는데, 실제로는 차르의 권위를 상징하고 며느리를 구타할 때에 들고 있었던 그 지팡이로 황태자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여기까지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야기지만, 사실 황태자 이반의 죽음이 폭행치사였는지는 불명확하다. 1963년에 이뤄진 그의 무덤 발굴 조사에서 이반의 신체에서 다량의 중금속이 검출되었으며 당대에 쓰여진 일부 기록에서도 황제에게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병으로 죽은 것이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미하일 1세라고 했는데, 로마노프 왕조에는 미하일 표도로비치를 제외한 황제가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미하일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그리고 영토 확장을 제외하고는 공적이 없다고 하는데, 자료 조사가 귀찮아서 생략한 듯 하다. 미하일은 동란기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의 재건과 통치 체제의 개편, 세수 확대를 추진했으며 그의 국가 재건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다만, 스웨덴과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해서 동란기에 상실한 영토들을 제대로 되찾지는 못했다.

알렉세이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알렉세이 1세라고 표현했으며 알렉세이도 로마노프 왕조에서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1세를 붙일 수가 없다. 알렉세이의 업적은 농노제 개혁, 법전 편찬, 재정 개혁 외에도 영토 확장, 종교 개혁, 행정 개혁, 세제 개편 등이 있으며 그 영향도 상당히 컸다. 종교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를 새로이 '현대화'했지만, 서방 교회처럼 전통 의식파와 개혁파로 분열했고, 세제 개편으로 세수와 조세 공정성을 확보했지만, 지나치게 과중한 세역 부담으로 인해 스텐카 라진의 난을 위시한 대규모 반란들이 촉발되었다. 알렉세이 황제 개인은 무시할 수 있을지라도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났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만한 위인이 아니다. 그리고 문법을 잘 몰라서 법전 제정을 재정으로 서술한 것도 있다.

1686년 "항구적인 평화" 조약
1686년에 러시아와 폴란드가 체결한 조약으로 러시아가 크림 반도의 일부 항구 지역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러시아가 폴란드를 위해 크림 칸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크림 칸국이 러시아를 먼저 침공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측에서 골리친 공을 총수로 하는 원정군을 보내 크림 칸국을 침공했다.

안톤 데비예르
표트르 대제 시절의 경찰청장이 선박 심부름꾼 출신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선박 심부름꾼 출신으로 해군에 입대해 제독으로 영전한 안톤 마누일로비치 데비예르(Антон Мануилович Девиер, 1682?–1745)는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의 경찰청장이지, 국가 전체의 경찰력을 관장하는 경찰청장은 아니었다.

북극해 항로 문제
그 당시에는 북극해 항해가 불가능하고 배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러시아의 북극해 항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트르 대제 시기에는 아르한겔스크가 북극해의 항구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무르만스크의 경우에는 난류의 영향으로 완전한 "부동항"이었다. 물론 아르한겔스크는 당시 기준으로 1년에 3개월만 기능할 정도로 항구로서의 기능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러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로서 대외 무역과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조프
간다효가 언급한 대로 1695년에 러시아가 아조프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 오스만 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표트르 대제까지 붙잡혀 이스탄불로 끌려갈 처지가 될 정도로 러시아군이 위기에 빠지자, 러시아는 아조프를 오스만 제국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아조프를 러시아가 다시 점령한 것은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가 되어서였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 시기의 아조프는 간다효가 이야기한 대로 러시아 최초의 항구도, 부동항도, 무역항도 아니었다.

키릴 문자 문제
키릴 문자는 상형 문자 같은 것이며 표트르 대제가 알파벳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키릴 문자는 상형 문자가 아니며 알파벳이다. 그것도 라틴 문자에 영향을 준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알파벳이다. 표트르 대제의 문자 개혁은 복잡하고 고루한 교회 슬라브어의 서체를 간소화된 '일반 서체'로 교체한 것이다.

달력 문제
표트르 대제 이전에는 러시아가 슬라브 달력을 써서 새해가 9월부터 시작한다고 했는데, 거짓이다. 9월부터 새해가 시작하는 달력은 비잔틴 달력이며 러시아가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러시아식 슬라브 달력은 3월이 새해였다. 표트르 대제가 달력을 개정하기 전에는 9월부터 새해였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니까 슬라브 전통 달력이겠거니 하고 뇌피셜을 쓴 것으로 보인다.

발틱 함대
발틱 함대가 영국 해군에 견줄만큼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영국 해군을 모델로 하여 성장한 러시아 해군은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 해군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영국인들조차 러시아 함선의 질적 수준이 영국 해군의 함선에 버금간다고 인식할 정도이긴 했지만, 해군의 규모나 경험을 따지면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못 따라잡는 실정이었다.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1715년, 덴마크에서 표트르 대제가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내서 왕위를 계승하고 부황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계승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고 설명했다. 1715년의 표트르 대제는 덴마크를 방문하던 상황이 아니었으며, 편지도 황태자비 샤를로테가 사망한 직후에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황태자가 국정에 관심을 가지고 정무를 수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었다. 황태자는 1716년에 덴마크를 방문 중이던 부황이 덴마크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오자, 그걸 빌미로 해외로 나가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표트르 대제의 황위 계승법
표트르 대제가 "자격 없는 핏줄보다 능력 있는 타인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황위 계승법을 만들었으며 표트르 벨리키가 자녀들에게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후계를 물려줄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은 거짓이다. 표트르 대제는 "자격 없는 합법적 후계자보다는 자격 있는 낯선 사람을 임명하여 자신을 계승하게 만들 것"이라는 발언을 했으며 이는 황위 계승에서 능력주의를 채택하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고 국정에 관심이 없는 황태자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조선의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의 비행을 질책하고 "과연 뉘우치지 않는다면 종실에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는가?"는 말을 하며 세자에게 경고한 일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722년에 표트르 대제가 개정한 황위 계승법은 장자 계승제를 버리고 능력주의를 채택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다는 후계자 지명제였다.

차르 호칭 문제
러시아에서는 여성 황제를 '차리나'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무수히 많은 대중매체에서 러시아의 여성 황제를 차리나로 부르기 때문에 그렇겠거니 하고 쓴 것 같은데,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차리차(цари́ца)라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의 행정 개혁
예카테리나의 구베르니야(주) - 우예스트(군) 행정 개혁을 봉건제라고 오독했다. 전국을 50개 주와 수백여개 군으로 나누고 그 수장의 직책에 귀족을 임명한 것이 봉건제라는 것인데, 중앙집권화와 신분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책을 읽다가 카챠의 귀족 회의 설립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는 신분제 사회로 전세계 국가가 지배 계급에서 관료를 충당해 지방에 파견했다. 이들은 봉토를 수여받고 군주와 사적 관계를 맺는 봉건 영주가 아니라 국가의 관료이며 그저 신분이 귀족일 뿐이었다. 예카테리나가 파견한 주지사들도 모두 귀족 출신의 관료들이었다. 그나마 봉건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귀족 회의로서 예카테리나는 귀족들에 대한 양보 조치로 주, 군에 귀족 회의를 설치하고 귀족들에게 지방 행정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

주지사의 권한 문제
러시아의 농민들이 주지사, 즉 구베르나토르에게 땅을 빌려서 생활을 영위했고 국가는 이러한 주지사들을 위해 어떻게든 농노들을 늘려 착취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봉건제로의 회귀라고 이야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주지사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는 존재가 아니며 귀족 영지에 속한 사유지 농노들은 전적으로 귀족 지주의 소유였다. 농노에 대한 지주의 인신 지배는 예카테리나의 시대에 더욱 강화되는데, 국가의 관료가 무슨 통제를 한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국가 소속의 농노라고 할 수 있는 "국가 농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주지사와 관료들의 통제를 받는 국가 농민이 주지사의 땅을 빌려 살아간다고 오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 농민들은 국가의 소속으로 국유지를 경작하며 살아갔고 이들의 지위와 삶의 질은 사유지 농노보다 훨씬 더 나았다. 이들을 관리하는 관료들도 귀족 지주들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편이었다. 이 역시 간다효의 주장 진실성과 별개로 잘못된 비판이다. 러시아 제국은 전제군주정 국가이며 정상적인 상황일 경우 귀족이 농노를 마음대로 부리는걸 가만히 용인할 리가 없었다. 표트르 1세 사후 귀족 쿠데타로 인해 전제권력이 붕괴되어 귀족들이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상황이 되어 국가가 귀족 소유 농노들을 공식적으로 용인하게 했지만 기회만 되면 그들을 통제하고 귀족 농노들을 국가 농노로 이전시키려고 하긴 했다. 그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농노에 대한 지주의 인식 지배가 강화되지만 이후 어느 정도 왕권을 회복한 예카테리나 2세를 이를 어떻게든 돌리려고 했다. 국가가 귀족의 압력에 굴복했던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통제력을 회복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귀족을 고발한 농노들이 승소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은 사례가 있었으며 또한 국가농민이 귀족지주들보다 평균적으로 '훨씬' 더 잘 살았다는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역설적으로 농노를 가혹하게 착취한 귀족지주들은 사실 경제적으로 농노와 다를 바 없는 가난한 귀족들이었고 부유한 대귀족들은 나름대로 농노에게 복지, 투자, 보증 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 잘 만난 노예가 잘 먹고 잘 사는건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러시아 제국에서 보편적이라고 할 순 없어도 드문 사례였던 것도 아니다. 러시아 농업, 농민 관련 통계수치는 신뢰성이 낮다고 봐야하는 것이 러시아 제국에서 농민은 직업구분이 아니라 신분구분이다. 그 농노들조차 농업에 종사 안하거나 부업인 이들 많았고 농사하는 주업인 이들도 농사 망할거 같으면 포기하고 상업, 수렵, 임엄, 수공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돌렸다. 때문에 농업생산성으로 농민이 부유하다 빈곤하다하는 것은 처음부터 근거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붕괴
예카테리나와 파벨이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뒤엎고 귀족 계급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표트르 사후의 혼란과 황위 계승 분쟁, 궁정 쿠데타 과정에서 새로이 권력을 차지한 신생 정권들은 낮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점차적으로 귀족들에게 양보를 하고 그들의 힘을 강화시켜 주었다. 예카테리나와 파벨의 조치들도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었고 이들이 특별히 표트르의 개혁을 다 뒤엎은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귀족 계급은 수십 년에 걸쳐 신생 정권들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점짐적으로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무는 줄여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드보랴닌들이 강력해진 것은 카챠와 파샤만 비판할 게 아니라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안나 이바노브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3세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이 6월에 프랑스에서 출발해 9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고 설명했다. 거짓이다. 나폴레옹은 6월 24일에 폴란드의 네만 강을 건너 9월 15일에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상식이 있다면, 60만이나 되는 병력이 프랑스에서 출발해 3달도 안 돼서 모스크바까지 도보로 이동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것인데 이상하게도 간다효는 프랑스군이 파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로 가는 지도를 띄워두었다. 러시아 원정의 목표가 모스크바 점령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또한 거짓이다. 나폴레옹이 중요시하던 것은 적의 항전 의지를 꺾는 것이고, 적의 항전 의지를 꺾으려면 적의 주력을 섬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빠르게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게 아닌, 초기부터 빠르게 러시아군의 주력을 섬멸하여 러시아측의 강화 요청을 받아내려 했고, 반대로 러시아군은 전면전에서는 대육군을 이길 수가 없어 반강제적으로 지구전에 돌입했다. 모스크바 점령은 원정 이전부터 준비한 초기 목표가 아니었으며 원정 도중에 추가된 목표였으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 퇴각할 때에 50만 명의 병력이 증발했다고 하는데 거짓이다. 나폴레옹이 60만을 동원하긴 했지만, 실제로 국경을 넘은 병력은 40만 정도이고 이 병력도 손실이 누적되는 과정을 거쳐서 약 10만으로 줄었지, 모스크바에서 갑자기 50만이 소멸한 건 아니다.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르 1세가 조국 전쟁 이후에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하는데, 사이비 종교라기보다는 기독교 신비주의에 가깝다. 알렉산드르 1세는 딸이 2명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딸들의 이른 죽음은 그의 정신 상태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후에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은 황후 옐리자베타와의 관계가 소원한 게 컸지, 그가 조국 전쟁 이후에 갑자기 성욕을 부정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그는 마리야 나리시키나라는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사생아도 5명이나 되었다. 마리야와의 관계는 1814년까지 이어졌기에 전쟁 후에 갑자기 그가 이상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위 후반기의 그는 신비주의에 빠지긴 했지만, 아내 옐리자베타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함께 외유를 나가고 독서나 음악 연주, 기도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곤 했기에 간다효가 이야기한 것처럼 전후에 아내를 멀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니콜라이 1세
콘스탄틴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니콜라이가 황위를 이어받았다고 설명했는데, 이것도 잘못되었다. 콘스탄틴은 귀천상혼을 했기에 황위 계승권을 상실했고 알렉산드르는 유서에 니콜라이에게 황위를 넘긴다고 써두었다. 문제는 유서의 내용을 당사자인 니콜라이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최측근과 종무원장을 포함한 4명에게만 알렸던 것이었다. 니콜라이 1세가 유럽의 경찰을 자처하며 약소국가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강화하고 허수아비를 꽂아넣을 시도를 했다고 설명했는데, 간다효 본인의 뇌피셜이다. 니콜라이 1세는 구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외적 활동을 벌였으며 1833년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베를린 협정을 체결할 때도 내부 단속과 동유럽에서의 구질서 유지가 주목적이었지 약소국가에 개입한다거나 괴뢰 정부를 세울 계획은 없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가 유럽의 경찰로 불리게 된 계기는 1848 혁명에 개입해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49년 혁명을 오스트리아 정부 대신에 진압해 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유럽의 경찰"인데, "세계의 경찰"이라고 잘못 써놓기도 했다.

부동항 문제
러시아가 항상 부동항과 식량을 원한다고 설명하는데, 헛소리다. 러시아는 유럽 전통의 농축산물 수출국이다. 그리고 러시아 입장에서 부동항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대외 팽창은 절대로 부동항을 얻기 위해 추진된 것이 아니다. 시베리아 진출도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고 표트르 대제가 천도한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겨울에는 바다가 얼어붙는 곳이다. 1914년, 러시아의 재무장관 표트르 바크는 러시아의 주요 무역은 육로로 이루어지며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해 흑해를 러시아의 내해로 만들지 않고서는 흑해의 항구 도시들이 큰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즉, 부동항이란 해양 국가인 영국에서 어떻게든 러시아의 대외 팽창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이다.

흑해 항행권
1820년에 보스포러스를 러시아 소속 선박이 지나다닐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거짓이다. 러시아는 이미 예카테리나의 시대부터 오스만 제국과 여러 차례 조약을 체결해 흑해는 물론, 오스만 제국 전역에 상선을 보낼 권리와 영사관을 설치할 권리를 보장받고 재확인했다. 그리고 시기별로 보스포러스와 마르마라, 다르다넬스를 오가는 항행권은 계속 변경되었다. 러시아는 10차 러시아 - 투르크 전쟁 이후에 체결한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항행권을 재확인했으며 1841년에는 영국이 주도한 해협 조약에 서명해 평시에도 외국 군함의 보스포러스 - 다르다넬스 통과를 금지하는데 동의했다.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이 러시아가 이스탄불이 아닌 발칸 국가와 마케도니아를 장악하려 한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185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제국 내부의 천주교도들과 성지에 대한 관할권을 얻어내었고, 예전부터 성지와 오스만 제국의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던 니콜라이 1세는 이에 격분하여 멘시코프를 파견해 투르크에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 간의 마찰과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의 개입으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고 니콜라이 1세는 다뉴브와 카프카즈에서 군을 동원하는 것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며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밀리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시노페 해전을 묘사한 그림을 띄웠는데, 시노페 해전은 러시아 해군이 승리한 전투다.

러시아의 군사력 폄하
러시아가 "거적떼기 국가, 망하기 직전 국가"를 상대로 승리해서 군사력이 강하단 평가를 받았지,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승리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또한 헛소리다. 애초에 독일은 수백개 영방 국가로 분열되었던 상황이었으며 강국이라 할만한 프로이센은 7년 전쟁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혀 선전하지 못했다. 도리어 야거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패배했고,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조른도르프 전투에서는 프로이센군 자신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박살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프로이센과 그 후신인 독일 제 2 제국은 탄넨베르크 직전까지 러시아군을 강군으로 인식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조국 전쟁은 지형빨과 기후빨이 터져서 이긴 것이라 폄하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러시아군은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고 나폴레옹에게 고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갑작스런 추위와 나폴레옹의 잘못된 판단 등이 겹치긴 했지만, 지구전을 펼쳐 대육군을 계속 내지로 끌어들여 피해를 늘리게 한 것은 단순한 지형빨이나 기후빨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1813 ~ 14년 간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대불 동맹의 승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르 1세는 빈 회의에서 큰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나폴레옹 사후 ~ 크림 전쟁 이전까지 유럽 4강인 영, 프, 오, 러는 서로 군사적으로 강하게 충돌한 적이 없고 이 시기 동안 유럽에서 강대국 간의 전면전이 터진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설명 자체가 잘못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 묘사
크림 전쟁 당시에 러시아 해군이 100% 범선이라고 했는데, 잘못되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70%가 범선이고 30%가 증기선이었으며 전쟁 발발 이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조선소에서 계속 증기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러시아 해군이 승전한 시노페 해전에서는 증기선을 3척 동원했었다. 그리고 상식이 없어서 범선이 노를 저어 가는 배라고 설명한 것은 덤. 범선은 노를 젓지 않으며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배다.

러시아 초기 산업 혁명
1850년대에 러시아는 산업 혁명의 ㅅ자도 몰랐다고 설명했다. 1850년대의 러시아는 이미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증기 기관이 도입되고 공장제 기계 공업이 성장하던 중이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육군의 훈련도
크림 전쟁 당시의 러시아 군인들이 대부분 농노이고 훈련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을 지키던 수비군은 거의 1년을 버텨냈고, 연합군이 찬사를 보낼 정도로 조국의 영토를 필사적으로 지켰다. 게다가 당대 러시아의 상비군들은 군 복무 기간이 25년이었다. 크림 전쟁 때 새로 징병한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전장으로 갔을 수 있지만, 당시 200만이 넘어가던 러시아의 상비군들은 그래도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인민주의 곡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려 한 혁명가들이 당대 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단순히 황제를 암살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 생각해서 암살을 기도했다고 왜곡했다. 실제로는 귀족에게 유리하게 왜곡된 농노 해방, 1866년부터 차르가 개혁을 중단하고 보수 - 반동화한 것에 대한 불만, 러시아 전체가 분노한 베를린 회의에서의 굴욕과 같은 사건들이 혁명가들의 암살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시도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보다는 인민주의의 영향이 크다. 바쿠닌, 라브로프, 게르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민주의는 차르 전제정을 인민 억압의 총체로, 차르는 억압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혁명을 통해 전제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민주의자들 중에 테러리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억압의 상징인 차르를 암살한다면, 인민이 봉기해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 보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황제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로리스 - 멜리코프의 유사 헌법
알렉산드르 2세가 의회를 설립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궤변이다. 사샤는 서유럽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러시아에 도입하는 것을 대단히 불편해 했다. 의회제나 그와 유사한 형태의 회의체 기구를 설립하려 한 것은 그의 의중이 아니라 1880년 초에 황제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미하일 로리스 - 멜리코프의 생각이었다. 로리스 - 멜리코프는 젬스트보와 두마에서 선출한 대표들이 중앙의 정치에 참여하는 개혁안을 보고하면서 이것이 서유럽의 의회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고 새로이 개설하는 여러 위원회들도 의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황제가 의회제를 원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총 6번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6번을 훨씬 뛰어넘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 전해지는 야사로는 그가 갓 태어났을 때에 궁전을 방문한 점쟁이가 총 9번, 죽음의 위기가 있을 것이라 얘기했고 결국 마지막 9번째 죽음의 위기에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체 6번은 출처가 뭔지 알 수 없으며 어디서 튀어 나온 숫자인지 알 수가 없다.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하자마자, 자유주의 시위가 일어나고 알렉산드르 3세가 자유주의 세력을 모조리 잡아다 처형했다고 설명했다. 간다효는 자유주의와 인민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한 다음날, 인민은 황제의 잔혹한 최후에 충격을 받아 침묵했고 자유주의 시위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황제 암살범 중에 유대인이 있다는 소문에 격분해 당대 최대의 포그롬을 벌였다. 진보적인 언론사에서는 이 포그롬을 혁명 운동으로 진화시키기 위해 포그롬을 독려했고 반대로 보수적인 언론사에서는 인민에게 포그롬의 중단과 폭력 행위의 자제를 호소했다. 황제 역시 포그롬을 진압하려 애썼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가 처형시킨 세력들은 급진 자유주의 세력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와 같은 인민주의 단체들이었다.

오흐라나
1866년에 오흐라나가 창설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흐라나는 1881년에 설립된 조직이다. 아마도, 1866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반동화하면서 활동이 대폭 늘어난 황제원 제3부와 혼동한 듯 하다. 비밀 경찰 조직인 황제원 제3부는 1866년에 부장이 된 슈발로프를 중심으로 하여 급진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그리고 이 황제원은 니콜라이 1세 시절에 세워진 조직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의 경제 성장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에 철로 길이, 철강, 석탄 생산량이 2배가 되었다고 설명했으며 이 시기 주요 열강의 경제 성장률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아마도 나무위키의 니콜라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항목을 베낀 것 같은데,음해세력이라면서 글은 잘만 쓴다 이건 니콜라이 2세 시기의 경제 성장을 다룬 것이지, 알렉산드르 3세 시대의 성장을 다룬 것이 아니다. 실제 알렉산드르 3세의 재위 기간(1881 ~ 1894) 동안, 러시아의 철로는 40%, 석탄과 철강 생산량은 2배 이상으로 더 많이 늘어났으나, 방직 산업은 아직 영국을 따라잡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위 항목에는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이 8 ~ 9%였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읽었는지 연 평균 성장률이 89%라고 설명했다. 스탈린이 공업화 드라이브 걸던 한창 때의 소련도 30%가 안 되고 이것도 과장이 심하다고 크게 비판받는데, 어떻게 제정 러시아에서 연평균 89%를 이뤄냈다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1891년 대기근
91년에 대기근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90년에 그 전조가 있었고 92년까지 이어졌다. 제국 정부의 구제책은 지나치게 늦었으며 곡물 수출량의 감경과 용도 전환도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 서기국의 권한
스탈린이 당 서기국 총서기에 임명된 이후부터 레닌을 밀어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오래 전부터 퍼진 "통설"이지만, 거짓이다. 당시 소련 중앙당 서기국은 그 권한이 강하긴 했으나, 예전의 학설처럼 인사권 전체를 총괄하는 기관도 아니었고 스탈린도 서기국의 인사권을 이용해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지도 못했다. 도리어 이 시기의 서기국은 당의 명령을 받아 지방 당과 여러 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이었다. 스탈린이 총서기가 되어 당 서열 1위가 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전혀 아니다. 서기국 총서기 직책은 요직이었지만, 당 서열 1 ~ 2위에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트로츠키
트로츠키가 레닌의 총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원래 멘셰비키 출신으로 볼셰비키 1세대들 입장에서는 예전에 레닌을 비판한 경력도 있는 굴러온 돌이었고, 트로츠키 특유의 오만함 때문에 불편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레닌 입장에서도 트로츠키는 총신이라기 보다는 정치 동지이자, 군권을 틀어쥐고 자신만의 세력을 가진 정치 계파의 대장이었으며 1922년, 레닌이 쓰러졌을 시기에 트로츠키는 아무런 직책도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소련의 군권을 장악한 거물 중의 거물에 소련 권력의 핵심인 중앙위의 위원이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견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는데, 실제론 스탈린의 총서기 임명을 가장 크게 반대했던 사람이 트로츠키였다. 레닌이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추천했다고 하는데, 실제론 스탈린이 했다. 레닌 생전에 스탈린이 야심을 드러내어 1인 독재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움직임은 없었으며 레닌 생전의 반 스탈린 세력도 집단 지도 체제를 사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탈린을 반대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와 레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한다고 칼리닌의 사진을 실어두었다.

일국사회주의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를 스탈린이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나서, 또는 "해먹을 것을 만들고 나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미친 소리다. 일국 사회주의나 영국 혁명론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긍정한다. 그러나, 일국 사회주의는 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으로 인해 소련의 피해가 극심하기 때문에 세계 진보 세력의 핵심이며 세계 유일의 공산 국가인 소련을 재건하고 인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한 다음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2번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소련의 인민들 입장에서 일국 사회주의는 아주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스탈린을 지지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간다효가 이야기한 것처럼 스탈린 자신이 "해먹기 위해서" 밀어붙였다는 이야기는 헛소리다.

레닌의 유서
레닌의 유서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었고, 이 사실을 알아챈 스탈린이 유서의 공개를 막았다고 설명했다. 유명한 낭설인 이 레닌의 유서 비공개설은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것이다. 레닌은 유서에 스탈린을 포함한 최고 위원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장, 단점을 기술해 암묵적으로 집단 지도 체제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내치라는 내용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트로츠키에게 전권을 부여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스탈린 외에 다른 최고위원들도 유서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꺼려서 시일을 두고 유서를 공개했다.

스탈린의 초기 정치 경력
스탈린이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내부에서 삼류 취급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1세대로서 요직인 프라우다의 편집인을 지냈고 2월 혁명 이후에는 당 중앙위 위원으로 선출되어 레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소련 건국 후에는 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될 정도였다. 전혀 삼류가 아니었고 오히려 중요한 인물이었다.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레닌과 맞먹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던 트로츠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다효가 설명하는 대로 삼류였거나 무명은 아니었다. 애초에 삼류나 무명이었으면 트로츠키가 그렇게 견제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노비예프 같은 거물이 스탈린의 총서기 취임을 격렬히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트로츠키의 스탈린 비판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독재에 반대해 공개 비판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의 트로츠키는 스탈린 - 지노비예프 - 카메네프의 삼두정을 비판한 것이지, 스탈린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3인 연합의 공세로 점점 정치국에서 배제되어 가고 있었고 이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개 비판에 나섰다.

배급제
대공황이 소련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면서 소련의 배급제를 언급했다. 실제로 1929 ~ 1935년 동안의 소련은 농업 집단화의 후폭풍과 기근으로 식량난이 극심해져서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대공황의 악영향이 배급제로 완화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다. 북한의 영향 때문에 한국에서는 배급제가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국가들처럼 소련에서도 배급제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나 실시하는 것이었다.

대공황
소련이 대공황의 영향을 적게 받았던 이유로 소련 경제가 빈약했던 점, 국가 중심, 사회주의 체제여서 서유럽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대공황에서 소련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소비에트 연방 수립 이후에 서유럽 열강들이 소련을 상대로 경제 제재를 걸었고 세계 경제에서 일정 부분 분리, 고립되어 반강제적으로 독자적인 경제권을 형성하게 된 상황속에서 자력 갱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 컸다. 그래서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졌어도 그 영향이 서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국가 중심, 사회주의 경제 체제여도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있는 상황이면, 언제든 대공황과 같은 악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80년대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른 외채 문제였다.

계급 타협
5개년 계획 당시의 소련에서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와 기술자, 과학자들을 착취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자와 과학자들은 우대받았다. 스탈린은 당시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차등 임금제를 도입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확장했으며 기술자와 과학자들은 일반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더 좋은 임금과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사실, 스탈린 정권은 이런 전문직 종사자들과 중산층들에게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나은 대우와 임금, 안정,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정권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고 기반을 다졌다. 물론, 5개년 계획 시기와 대숙청기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중간 관리직과 기술자들이 희생양으로 끌려가긴 했지만 전문직 종사자와 중산층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실질 임금이 하락하고 착취를 당하는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열정 페이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스탈린은 소련의 의료 보험 제도인 세마시코 시스템(Система Семашко)을 비롯한 사회보장 제도를 강화해서 일정 부분이나마 보상을 해주고 노동자들의 지지를 높이려 애썼다. 그리고,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집단 중 하나인 철도계의 경우에는 철도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당에서 책정한 할당량보다 더 많은 양을 역으로 제시하는 등, 노동자들이 단순하게 당에 착취당하고 끌려가는 것과는 다른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간다효가 이야기한 "소련식 렬정페이"란 것은 그의 머릿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굳이 지적을 하고 싶었다면, 표트르 카피차처럼 소련의 초청을 받고 귀국한 과학자·기술자들이 스탈린의 피해망상과 의심병 때문에 해외 여행을 제한당한다거나 해외에 정착했던 곳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소련에 억류되었던 사례를 제시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2.1.1. 참고 문헌[편집]

김학준 『러시아사』

이무열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문명식 편역 『러시아 역사』

문명식 편역 『새로운 러시아 역사』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플라토노프 『러시아사 강의』

에이브러햄 애셔 『처음 읽는 러시아 역사』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C. H. 스이로프 『러시아의 역사』

특집 MBC 스페셜 세계를 뒤흔든 순간 : 러시아 혁명

StarMedia 다큐 드라마 『Romanovs』

노경덕 『스탈린-트로츠키 권력투쟁 재고: 좌,우파의 경제 이념과 관련하여, 1923년-1927년』

노경덕 『서기국과 스탈린의 권력 장악 문제 -비판적 재검토, 1922년-1927년-』

아서 뉴스홈 『붉은 의료』

김경근 『프랑스 근대사 연구』

2.2. 우크라이나 설명 관련[편집]

  자세한 내용은 간다효/비판/우크라이나 설명 관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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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저 꾸짖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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