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개발하는 용도로 사용됐던 게임 엔진이 이제는 게임을 넘어 영화, 방송, 건축, 자동차, 디자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실 못지않은 3D 세상을 만드는 강력한 게임 엔진의 성능이 다양한 산업군의 크리에이터들에게 선택받고 있는 것이죠
게임 엔진은 게임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그래픽이나 사운드, 물리 엔진 등 각종 요소를 한데 모아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든 소프트웨어입니다. 게임 개발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를 제공하는 도구 상자에 가깝죠.
대표적인 게임 엔진인 언리얼 엔진
게임 엔진이라는 명칭이 명확하지 않았던 90년대 이전에는 개발자들은 게임의 소스코드를 재활용해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공한 게임의 코드를 재활용해 다시 제품을 만드는 식이죠. 80~90년대 게임을 보면 같은 회사가 만든 게임들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죠.
게임 엔진이라는 단어가 언제쯤 게임 시장에 정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게임 엔진을 업게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게임 엔진을 판매해 수익을 올린 사람은 바로 FPS의 아버지로 유명한 존 카맥입니다.
존 카맥이 개발한
90년대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현재 개발 중인 게임에 적합한 그래픽 엔진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A라는 게임을 위한 A엔진이 탄생했죠.
그런데 존 카맥이 '둠'을 개발할 때 썼던 소스코드를 대중에 무료로 공개하고,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회사로부터는 로열티를 받았는데요. 일종의 엔진 판매 시장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id tech 엔진을 기반으로 둠의 후속작인 '둠2'나 레이븐소프트웨어가 선보인 '헤러틱' 등이 등장하게 됐죠.
이후 퀘이크를 개발한 엔진을 통해 '하프라이프' 등이 선보여지며 성공을 기록하고, FPS 게임 시장에 본격적인 게임 엔진 시장이 열렸죠. 존 카맥의 엔진을 판매한다는 결정이 FPS 시장이 빠르게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이후 게임 시장이 성장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죠.
이 시기 이후 게임 엔진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90년대 말 등장한 '언리얼 엔진'은 초창기만 해도 FPS 게임에 적합했으나 버전을 올리고 발전해 나가면서 MMORPG 개발에도 사용되고, 나중에는 모바일 게임 시장까지 영역을 넓혔죠.
퀘이크 엔진을 통해 개발된 하프라이프
2000년대를 넘어서는 게임 개발이 워낙에 복잡해져 엔진을 직접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많은 게임사가 기존의 상용 엔진을 선택해 개발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붓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느냐 붓을 사서 그리느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게임 엔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가 있다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게임 엔진이 어떻게 다양한 산업군에서 사용 중인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다양한 게임사들이 게임 엔진을 활용해 게임을 개발하면서 게임 엔진을 제공하는 회사들은 엔진의 성능을 점점 높여왔습니다. 이제 게임 엔진을 활용해 만들어 낸 그래픽은 실제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입니다.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된 메타휴먼. 실제 사람 못지 않다 (출처=언리얼 엔진 홈페이지
고품질 CG 영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영상 시장에서 게임 엔진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게임 엔진은 실시간 렌더링 부문도 강력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존의 기술보다 강점도 가지고 있죠.
기존에 영상 업계에서는 오프라인 렌더링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오프라인 렌더링 기술은 실제 못지않게 리얼한 그래픽을 만들 수 있지만, 디자인 수정 등에 필요한 렌더링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4K나 8K 등 영상을 보여주기 위한 디스플레이의 해상도가 엄청나게 커지다 보니 당연히 그 부담도 늘었고요.
반면에 게임 엔진을 활용한 실시간 렌더링 기술은 1프레임을 생성하는데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걸렸던 기존의 오프라인 렌더러 작업과 달리 초당 수십 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실제로 다양한 방송이나 영화제작 업계에서 언리얼 엔진을 도입했습니다. 대표적인 부문이 사전 시각화(프리비즈) 분야입니다. 프리비즈는 실제 촬영해서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촬영 전 구상한 장면을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인데요. 제작비 절감 등에 도움이 되지만 프리비즈 작업 자체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픽 퀄리티도 좋지 못했고요.
하지만, 게임 엔진을 활용해 프리비즈 작업을 진행하니 실시간으로 렌더링 되기에 수정 작업이 용이했고, 최종본과 비교해 봐도 유사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줄 정도가 됐죠.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나 '만달로리안' 등의 프리비즈 작업에 언리얼 엔진이 활용된 것은 유명합니다. 기존의 오프라인 렌더 기술로는 불가능했을 실시간 수정을 거쳐 가며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하죠.
ICVFX를 활용한 세트
이외에도 아마존 프라임의 인기 드라마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와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애플TV+의 '포 올 맨카인드', 워너 브라더스의 '블랙 아담'과 '스타걸' 등 다양한 작품의 프리비즈 작업에 활용됐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라이브 액션 영화 촬영 시 리얼타임 비주얼 이펙트를 촬영하는 언리얼 엔진의 '인카메라 VFX(ICVFX)' 기술을 활용한 작품도 대거 등장했는데요. 골든 글로브 TV 부문 드라마 작품상 수상작이자 '왕좌의 게임'의 프리퀄로 유명한 '하우스 오브 드래곤', 넷플릭스 드라마 '1899', CBS의 '스타 트렉: 스트레인지 뉴 월드' 등이 있습니다. 최근 성황리에 방영된 아마존 프라임의 오리지널 '폴아웃'도 마찬가지죠.
2022년 기준으로 언리얼 엔진은 153개의 프로젝트에 활용됐고, 이는 전년 대비 무려 44%가 증가한 수치로 총 500개 이상의 영화 및 TV 프로젝트에 사용됐습니다.
이 외에도 건축 분야 등 리얼 타임 기술 도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언리얼 엔진이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건축 업계에서는 22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최대 규모의 건축 회사 40곳에서 빠르고 쉬운 시각화 툴인 트윈모션을 채택했습니다.
언리얼 엔진과 볼보가 협력해 선보인 휴먼 머신 인터페이스(HMI)
트윈모션은 건축, 영화, TV, 자동차, 제품 디자인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고퀄리티 시각화를 쉽고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손쉬운 리얼타임 3D 시각화 솔루션입니다. 직관적인 아이콘 기반의 쉬운 UI를 통해 전문가는 물론 초보자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트윈모션 프로젝트를 언리얼 엔진에 익스포트하면 프로젝트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죠.
자동차 분야에서는 북미의 GM, 포드, 테슬라, 유럽의 BMW, 폭스바겐 그룹, 페라리, 아시아 태평양의 현대자동차, 토요타, 닛산이 등이 언리얼 엔진을 활용한 바 있죠. 최근 공개된 포드의 '올-뉴 2024 포드 머스탱'에도 언리얼 엔진을 이용한 휴먼머신인테퍼이스(HMI)가 장착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자동차 내부 운전석에 장착된 디스플레이가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된 화면이나 상황에 따른 애니메이션 등을 송출해 주는 형태입니다.
언리얼 엔진뿐만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상용 게임 엔진인 유니티도 영역을 대거 확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니티는 건설 업계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요. 유니티를 활용한 HD현대인프라코어의 AR 가이던스가 눈에 띕니다.
HD현대인프라코어의 AR 가이던스
AR 가이던스 앱은 디벨론 건설기계장비의 고장진단 및 수리에 사용됩니다. 앱은 '가이던스'와 '모델 뷰어' 2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던스'는 장비 고장 코드에 따른 진단 정보, 센서 모니터링 정보, 시운전 가이드를 지원해 사용자가 고장 진단 및 수리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모델 뷰어'는 주요 부품의 위치와 명칭을 보여주고 장비가 위치한 현장뿐만 아니라 장비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장비의 원격 진단 및 유지 보수에 활용도가 높습니다. AR 가이던스 앱을 활용하면 정확한 고장 진단 및 수리로 작업 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트윈 시장에서도 유니티가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여 이를 가상 화면에 반영하여 동일하게 구현하는 기술을 말하는데요. 이미 많은 도시에서 환경, 기후 변화, 교통 등과 같은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 트윈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기업 벡츄엘은 유니티를 활용해 파리 대도시 권역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하는 프로젝트를 10년 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1년 기준, 제작 중이거나 구상 단계에 있는 건물까지 포함하여 총 2백만 개의 건축물이 1,000km² 규모의 대지에 조성되어 있죠. 파리의 인프라를 디지털로 구현 및 시각화함으로써 건축 양식, 색상, 평면도, 장비 배치와 관련된 결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내릴 수 있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벡츄엘이 제작한 파리의 디지털 트윈
노르웨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트론헤임에서도 디지털 트윈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데요. 트론헤임은 북유럽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아름다움과 매력을 보존하는 도시 설계를 위해 '트론헤임 2050' 공모전을 개최했고, 지리 데이터 전문가 마틴 비쇠는 유니티를 사용해 2050년의 트론헤임을 인터랙티브하게 구현해 내며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아울러 유니티는 우리나라의 인천공항공사와 '인천공항 디지털전환 공동연구'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협약을 통해 양사는 디지털전환 과제를 발굴하고 인천공항을 디지털트윈으로 구현하는 개념검증(PoC)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패션 업계에서도 유니티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맞춤형 3D를 제작해 주는 스마트픽셀스는 유니티 신경 렌더링 기술을 이용해 패브릭 질감, 스티치, 색상 정확도 등 복잡한 세부 사항을 시각화해 만족스러운 쇼핑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상용 엔진 유니티
또 유니티 기반 플랫폼인 DRESSX는 유니티가 제공하는 AR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 의류를 제작해 가상에서 다양한 옷을 입어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기술을 활용해 실제 의류보다 이산화탄소를 97% 적게 배출해 품목당 3,300리터의 물을 절약했다는 발표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이처럼 게임 개발에 사용됐던 게임 엔진은 이제 게임을 넘어 다양한 산업군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즐기고 있는 게임이 우리 실생활과 많이 닮아있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앞으로 더 얼마나 현실 같은 게임이 등장할 수 있을지 많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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