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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운동으로서의 하이퍼모더니즘
[시리즈] 체스사 시리즈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1824년, 런던 - 에든버러 클럽 서신체스 매치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 엠마누엘 라스커와 지크베르트 타라쉬, 두 독일 유대인 체스마스터의 삶 · 에드워드 라스커, 엠마누엘 라스커와 바둑 · 식민지인이었던 내가 대영제국의 체스 챔피언?! · 1933년, 체스 최강자와 쇼기 최강자의 만남 · 체스 선수는 기보 저작권의 꿈을 꾸는가?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체스 역사 속의 TMI들 19세기 후반. 유럽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유럽 방방곡곡에 철도가 놓여 증기 기관차가 유럽 전역을 달리고,도시 한복판에는 웅장한 백화점들이 들어서며 근대적 소비문화가 꽃피었다.공장들은 자전거·축음기·재봉틀과 같은 새로운 상품들을 찍어내며 대중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이 시대의 새로운 건축기술은 런던의 수정궁, 수에즈의 운하, 파리의 에펠탑을 탄생시켰고,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규모의 거대한 증기선이 대서양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다.대영제국의 패권 하에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기간이 계속 이어졌고(Pax Britannica),너무나도 깊어진 이들 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으로 인해, 앞으로 유럽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마저 나돌았다.(식민지인은? 알빠노?)이것이 19세기에 인간 이성이 이뤄낸 위대한 성취였다.합리주의, '앎'에 의한 인류의 구원.인류의 지혜는 점점 더 깊어질 것이고, 사회는 더욱 진보할 것이며, 질병과 빈곤은 사라질 것이다.이 시대에 살아가던 사람들 상당수가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이 한순간에 와장창 금이 간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유럽 열강들 사이의 항구적인 평화는 한낱 꿈에 불과했으며, 애써 이룩한 기술들은 이제 다른 인류를 효율적으로 죽이는 데에 사용되었다.민족주의적 열기 속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섰지만 그 중 많은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이 충격적인 사건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그야말로 뿌리째 뒤흔들어놓았는데,미래에 대한 낙관론 대신 피로감과 허무주의가 자리잡았고,인간 이성, 그리고 구 체제에 대한 불신이 유럽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다.예술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1차 대전이 남긴 심리적 상흔은 개인적·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문학으로 재탄생했으며,기존의 표현양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도 출현하기 시작했다.이렇게 비전통적, 나아가서는 반전통적이었던 신세대들의 예술운동을 오늘날 흔히 '모더니즘'이라고 통칭하곤 하는데, 19세기 후반 태동하고 있었던 모더니즘은 이렇게 1차 대전의 영향 속에서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갑자기 왜 체스 갤러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왜냐하면, 체스의 역사도 이러한 시대적 맥락과 결코 무관하게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다시, 19세기로 돌아와보자.19세기 유럽이 격변기를 맞이했던 것처럼, 같은 시기 체스도 큰 변화를 겪었다.대영제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체스의 표준화와 국제화가 이루어진 것도 거대한 변화였지만, 가장 큰 혁신은 무엇보다도 제1대 세계챔피언 슈타이니츠의 '포지셔널 체스'였다.중앙 장악, 건전한 기물 전개, 작은 이점의 축적.슈타이니츠의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낭만주의 체스를 무너뜨리고 체스의 새 시대를 열었고,지크베르트 타라쉬의 계승에 의해 더욱 더 발전해나갔다.오늘날 우리는 이 슈타이니츠-타라쉬의 이론을 "고전학파" classical school 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사실 이는 오늘날에 고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전이라고 칭하는 것이지, 당시 슈타이니츠나 타라쉬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하여 "현대적" moder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는 했다.슈타이니츠의 저서인 "Modern Chess Instructor", 타라쉬의 저서인 "Die moderne Schachpartie"의 제목만 봐도 이러한 단어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이 시대에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별칭이 있었으니, 바로 "과학적" scientific 이라는 명칭이었다.슈타이니츠-타라쉬의 이론은 흔히 과학적 이론, 과학적 접근방법, 과학적 원칙 같은 말로 칭해지고는 했는데, 이들의 이론이 그 시대에는 어떤 기풍이기 이전에 하나의 새로운 진리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인류가 체스, 나아가서는 세계에 대한 진리를 밝혀나가고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기에, 19세기 말의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호칭이었다고 하겠다.슈타이니츠가 창시하고 타라쉬가 발전·보급시킨 이 새로운 체스 이론은 말그대로 체스계를 휩쓸었다.이 이론의 영향으로 낭만주의 시대에 비해 플레이어들의 전반적인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고,너무나도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플레이스타일마저도 어느 정도 획일화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슈타이니츠의 추종자였던 2대 세계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그리고 슈타이니츠-타라쉬의 스타일을 궁극적으로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3대 세계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이 둘은 1910년대 말부터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무승부율이 크게 증가하는 현상을 확인하고,얼마 안 가 "체스의 무승부 종말(draw death)"이 찾아올 것을 경고, 체스의 룰 변경을 주장하기까지 했다.양측의 플레이어가 모두 완벽에 가깝게 플레이할 경우 모든 게임이 무승부로 끝날 수밖에 없으므로, 무승부가 나오지 않는 방향으로 게임의 규정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카파블랑카는 이러한 체스 개혁의 일환으로 '카파블랑카 체스'라 불리는 확장된 형태의 변형체스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으악)지금 와서 보면 너무 터무니 없이 성급한 우려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인간이 체스를 완전히 정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신감.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타고 등장한 다른 목소리가 있었으니, 우리는 이들을 "하이퍼모더니스트"라고 칭한다.대표적인 인물은 아론 님조비치, 리하르트 레티, 사비엘리 타르타코워, 줄라 브레이어.하이퍼모더니즘(초현대주의)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어,새로운 플레이스타일을 꺼내들며 슈타이니츠-타라쉬의 정통 아이디어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폰 전진 지연, 피앙케토를 통한 중앙 간접 통제, 이후 반격.하이퍼모더니스트들은 이전의 획일화된 오프닝을 거부하였고,플레이어 개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오프닝을 활용하고, 나아가서는 체스에서의 예술성을 추구하였다. (레티는 그러다가 한번씩 겜 말아먹는 게 주요 약점으로 지적됨)실제로 이들은 당시 각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던 모더니스트들의 일부로서 자신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 최근 체스의 흐름을 살펴보기 전에, 현재 세계 정세의 심오한 의미와 본질적 가치를 간략히 개괄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의 체스는 단순히 과거 천 년의 경험적 증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천 년의 수수께끼를 설득력 있게 해결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우리는 상대성 이론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과학적 엄밀성을 통해 신의 전능함을 흔들었다. 또한 우리는 공산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모든 문화적 성취를 조롱한다. 더불어 표현주의의 시대이기도 하며, 이는 음악, 회화, 시 등 예술의 모든 형태에서 우주에 대한 자기중심적 반항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적 전복의 거대한 물결이 체스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 전후 첫 국제 토너먼트였던 1920년 예테보리 대회는 새로운 세대의 반항적인 체스 정신이 등장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레티, 브레이어, 알레힌, 보골류보프와 같은 거장들은 단순한 체스 마스터가 아니라 투사의 열정과 예언자의 열망을 결합하여 천 년에 걸친 체스 이론을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카파블랑카가 체스 이론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루빈스타인이 모든 게임을 미리 설계된 엔드게임 전략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 새로운 체스 개혁자들은 전통의 모든 도구를 파괴하고, 모든 규범을 무너뜨리며, 권위에 대한 모든 믿음을 버리고, 체스를 전혀 새로운 무명의 오프닝의 바다로 던져 넣었다."- 사비엘리 타르타코워, Die hypermoderne Schachpartie 서문 "최근 몇 년간의 체스 경기를 과거의 경기들과 비교해 보면, 옛 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게임들을 피상적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오프닝과 익숙하지 않은 국면 전개를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게임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미술의 사조들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예술이 자연주의로부터 돌아섰듯, 현대 체스 마스터들의 이상도 더 이상 ‘건전한 수법’이나 자연에 부합하는 전개라 불렸던 방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가장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연에 부합하는 방식은 과거에 자연으로부터 직접 모방되었던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자연의 작품보다 더 깊은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인류에게 있어 인간의 정신은 자연이 제공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사상을 현실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리하르트 레티, Die neuen Ideen im Schachspiel (모던 체스 아이디어) 서문 "아니 근데 왜 모더니즘의 일부라면서 왜 이름이 하이퍼모더니즘임?" 이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는데,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Modern이라는 단어를 슈타이니츠와 타라쉬가 선점하고 있었기에,타르타코워는 이를 의식하여 Modern보다 더 졸라게 모던하다는 뜻에서, Hyper-modern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이것이 굳어진 것이다.타라쉬의 저서 제목은 Die "moderne" Schachpartie(1912),타르타코워의 저서 제목은 Die "hypermoderne" Schachpartie(1924) 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식한 명칭이었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하이퍼모던 학파의 등장 이후, 다른 예술 분야가 그랬던 것처럼,체스도 구파, 고전 학파와 신파, 하이퍼모던 학파가 나뉘어 격렬하게 싸웠다...라는 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딱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전적인 스타일의 플레이어들이 하이퍼모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도 다 하이퍼모더니즘의 유용성을 상당 부분 인정했기 때문.사실 이들 간의 분쟁은 개인적인 감정싸움의 성격이 강했는데,고전학파의 지도자 타라쉬, 하이퍼모던학파의 지도자 님조비치 양쪽 다 체스계에서 성격 개차반으로 유명했던 작자들이었기 때문이다.(슈타이니츠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 정도 성깔은 있어야 위대한 체스 이론가가 될 수 있는 모양.)타라시는 님조비치에게 "내가 체스 두다가 10수만에 겜이 이렇게 터진 건 처음 봄 ㅋ" (심지어 님조비치는 이때 아직 18살.)"님 왜 이렇게 체스를 존ㅡ나 못생기게 쳐두셈? ㅋㅋㅋ" 같은 폭언을 쏟아부었고, 님조비치는 타라시에 대해서"얘는 철학자 행세를 하는 경험 많은 주부임" (독창성이 전혀 없다는 뜻)"나에게 타라시에 대한 증오가 없었다면 체스를 결코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것" 같은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이 둘은 그냥 성격이 막장이라 지들끼리만 싸운 게 아니고 인생 내내 별별 사람이랑 다 싸우고 다녔고,그런 것들이 좀... 고전 학파 - 하이퍼모던 학파 간의 싸움으로 오해된 면이 없잖아 있다는 것.하여튼, 하이퍼모던은 주류 체스계에 생각보다 빠르게 안착했는데, 레티의 발언에서 그 핵심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예술의 선구자들은 소수에게서만 인정받고 다수에게 조롱당한다. 반면 체스는 예술보다 비평이 미치는 영향이 적은 영역이다.""체스에서는 결국 경기의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모더니즘 예술의 다른 부문들은 비평가들, 그리고 대중의 인식과의 전쟁을 치러야했지만,체스에서는 절대적 판단기준이 존재했다. 바로 승패.하이퍼모던이 맘에 안 들건 어쨌건, 실제로 이겨서 성과를 내버리고 나면 상대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이다.하이퍼모더니즘은 실제로 빠르게 성과를 내며 그 가치를 입증해냈다.1924년, 리하르트 레티가 무적으로 불리었던 8년 무패의 카파블랑카를 1. Nf3로 무너뜨린 사건은 뉴욕타임즈 1면에 실렸을 정도. (우하단) 알레킨은 하이퍼모더니스트로 불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플레이스타일을 상당 부분 흡수하여 활용하였고,카파블랑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제4대 세계 챔피언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하이퍼모던의 등장으로 인류는 아직 우리가 체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물론, '체스의 무승부 종말' 같은 헛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의 시대적 저항운동으로 출발했던 하이퍼모던은, 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하나의 주류로 자연스레 통합되었다.결국 체스판 위에서도, 역사의 무대 위에서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이던 질서와 정답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거듭 재해석되고 뒤집힌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하이퍼모더니즘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우리가 오프닝 북을 따라 두고 있는 수는 과연 정답일까?우리는 너무 무비판적으로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이퍼모던을 넘어, 하이퍼-하이퍼모던을 창시하는 것은 바로 체붕이 여러분이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B-747: 펜암, TWA, 하워드 휴즈, 그리고 오웬 브루스터
[시리즈] 민항기 · B-747: 전설의 시작 · Never Forget, Never Forgive: KAL 858 · 해병대원의 비행기 긴빠이 대작전: TWA 85 · LA에서 로마까지: TWA 85편의 기나긴 여행 · 인질은 죽이면 그만: 이집트 대테러부대 잔혹사 · 코멧: 혜성같이 사라진 제트 여객기 · 님로드 AEW: 천하제일 병신대회 팬 아메리칸 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 흔히들 줄여서 '펜암' 이라고 부르는 옛날 항공사다. 1991년에 망해버린 뒤에는 옷가게로 변해버렸지만, 과거의 펜암은 현재의 맥도날드와 애플에 필적하는, 미국의 상징이자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다. 지구 어디에서든 소위 '클리퍼'로 호출되었던 하얗고 푸른 도장의 펜암기들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멋들어진 근무복을 입은 조종사와 스튜어디스들은 50~60년대생 어린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펜암의 시작은 미 공군의 아버지, 헨리 아놀드와 칼 스파츠가 당시 미국~콜롬비아간의 우편물 운송을 담당하던 독일계 기업인 SCADTA(現 아비앙카 항공)를 견제하기 위해 1927년에 에어-펜암이란 이름의 유령회사를 설립한게 그 시초였다. 왜 유령회사였냐고?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그렇듯이 항공사 간판을 내걸고 창업했는데 항공기가 없었다. 이들에게 항공기를 내어준 인물은 훗날 펜암의 사장이 되는 후안 트리페라는 인물로써, 당시에는 펜암이 아니라 Aviation Corporation of the Americas (미주항공공사, ACA)라는 항공사의 CEO였다. ACA는 비행기도 없이 쿠바~미국간 우편 수송업체 입찰에 참가한 펜암과 컨소시엄을 체결하여 중형 수상기 1대를 임차해줬고, ACA의 지원 덕분에 사업에서 주계약자로 선정된 펜암은 1927년 10월부터 하바나로 항하는 항공편을 운항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펜암-ACA 컨소시엄에 밀려 사업에서 탈락한 Atlantic, Gulf and Caribbean Airways(AGCA)가 1928년 6월 23일자로 펜암에 합병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사실상 3개 회사의 인수합병으로 탄생한 펜암은 미국의 국영 항공사로써 기능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들은 중남미의 항공사들을 대거 합병(물리)했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독점적인 우편 수송권을 따냈다. 여담으로 펜암이 벌인 혐성짓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중남미에 본사를 두고있는 대형 항공사들은 펜암에 의해 창업된 경우가 많다. 여튼, 펜암은 미국 정부의 지원 하에 중남미 항공산업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고 여기서 나온 돈으로 현대 항공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선을 세계 최초로 개설한데 이어 세계일주 항공편을 승객들에게 제공하는가 하면, 100% 화물 전용으로 운항하는 노선을 신설했고 팬암 아카데미를 통해 파일럿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펜암은 떠오르는 미국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항공사였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되자 이들의 미래는 딱히 밝아보이지 않았다. 1세계 선진국들의 민간 항공수요가 폭증하면서 TWA나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항공같은 신생 항공사들이 펜암이 진출할 수 없었던 미국 국내선 수요를 사이좋게 나눠가졌고, 미국 밖에서는 BOAC와 에어프랑스, KLM이나 루프트한자 등의 쟁쟁한 경쟁사들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이다.설상가상으로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펜암은 4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항공공사(CNAC)와 100여대에 달하는 여객기를 빼앗김과 동시에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서 쫒겨났다. 근데....펜암을 제외한 다른 항공사들을 다 없애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거 아닐까? 말도 안되는 소리같지만, 1950년대 미국에서는 가능했다. 오웬 브루스터(Owen Brewster, 1888~1961) 메인주 하원의원인 윌리엄 브루스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워싱턴과 링컨의 뺨싸다구를 50번씩 후려치고도 남을만큼 엄청난 가문의 적장자였다. 근데 이새끼가 펜암이나 B-747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사실 B-747과 오웬 브루스터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번편 자체가 펜암의 역사를 설명하려다 분량조절 실패로 인해 만들어진 정보글이라 관심없는 군붕이들은 다음편부터 보면 된다. 여튼, 그의 직계 조상은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로 영국이 청교도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자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던 35명의 청교도들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분이 그냥 단순한 청교도 엑스트라 1이 아니라 당시 영국 청교도 신자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으며, 존 스미스(John Smyth)와 함께 세계 최초의 침례교회를 암스테르담에 건립했고, 미국 이주를 처음 주장한 인물이란 것이다. 케임브리지대 신학교에서 학위를 수여받은 이후 네덜란드에서 교회 목사와 학원 선생으로 투잡을 뛰면서 당시 영국 국왕인 제임스 6세에게 패드립을 시전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었던 그는1644년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플리머스 식민지에 상륙한 초기 개척자들의 원로이자 유일한 대졸자로써 식민지의 종교 지도자로 활동했다. 유명한 그의 후손들로는 앞서 설명한 오웬 브루스터 말고도 2차대전기 미 해군제독이었던 윌리엄 F. 홀시 주니어 록펠러 가문의 후손들 2011년 6월 24일자 KBS 아침마당 출연자 리처드 기어 피그스만 침공을 주도했다가 캐네디에게 쳐맞고 쫒겨난 미 중앙정보국 제 5대 국장, 엘런 덜레스 등이 있다.아무튼, 이렇게 개쩌는 집안에서 태어난 오웬 브루스터는 미국 최고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AC, 학부중심대학)인 보든 칼리지를 1909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1910년까지 1년간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활동했다.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로 진학해 1913년에 졸업, 1916년에 28세의 나이로 메인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메인주 상원의원과 주지사, 전국 주지사협회 의장을 거쳐 1941년에 다시 메인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다. 머리숱 빼고 거의 모든것을 가진 엘리트중 엘리트였던 그는 뼛속까지 공화당원이었고,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1941년, 당시에는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군납비리를 족치려고 만든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통칭 '트루먼 위원회'의 일원으로 합류한 브루스터는1947년부터 트루먼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전후 미군의 군납비리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가장 미국적이었던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되시겠다 1905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하버드 출신 변호사인 하워드 R.휴즈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의 집안도 브루스터 못지않게 탄탄했다.그의 조상은 워싱턴에게 세례를 줬던 목사였으며,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도 그의 친척이었다. 휴즈의 아버지는 2025년 기준 시가총액 400억 달러(56조)의 석유 대기업인 베이커-휴즈의 전신, 휴즈 툴 컴퍼니의 창립자였다. 집안 전체에 공돌이 DNA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즈는 어려서부터 공학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12살에는 자기 스스로 오토바이를 만들었고, 14살이 되자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500년에 한번씩 나오는 천재였던 그의 아들이 하버드나 스탠포드에 수석으로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공부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1921년, 14살의 나이로 고지능자들을 위한 학교인 페센든 기숙학교에 진학한 휴즈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졸업...을 하지는 않았고 거기서 골프를 열심히 쳤다. 단순히 열심히만 쳤던게 아니라 한때 프로골퍼를 생각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는데, 15살짜리 급식이 쳤다하면 핸디캡 2가 나왔다. 참고로 일반인들은 핸디캡 15도 힘들다. 아무튼 열심히 골프를 치다가 기부입학으로 텍사스의 라이스 대학교에 입학한 휴즈는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회사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채로 라이스 대학교 설립자의 딸을 꼬셔서 결혼한 뒤 영화 제작자가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할리우드로 향했지만 처음 시작은 순탄치 못했다.LA에서도 영화는 안만들고 매일같이 골프를 쳤던 휴즈는 골프장 식당에서 영화감독인 랄프 그래이브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계획중인 코미디 영화에 4만 달러, 현재가치로 10억을 투자해달라고 휴즈에게 부탁했는데 영화의 독특한 줄거리에 흥미를 느꼈던 휴즈는 그래이브스와 함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8만달러를 허공에 날렸다. 휴즈의 삼촌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루퍼트 휴즈는 그가 제작한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좆같은 영화야. 줄거리도 없고, 전개도 없고, 캐릭터성도 없어. 연기도 엉망진창이야. 그 영화는 그냥 불태워버려. 영화가 상영된다면, 너랑 그 호모새끼는 할리우드 최고의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래이브스는 동성애자였고, 휴즈랑 야스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그는 8만달러짜리 영화 필름을 통째로 폐기했다. 휴즈의 첫 작품은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실패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 작품을 제작한다. 휴즈의 다음 작품은 1926~1927년에 공개된 Everybody's Acting과 Two Arabian Knights로, 둘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특히 1927년작 Two Arabian Knights는 영화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코미디 영화중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이후에도 휴즈가 제작한 영화들은 예술적/상업적 가치를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아 아카데미 시상식에 3번이나 노미네이트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그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아보라면 1머전 당시 영국 왕립비행단 소속 조종사들에 관한 영화인 1930년작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로써, 촬영에만 3년이 걸렸고 제작비로 280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현재 280만 달러는 40억원 정도의 금액으로 영화 한편을 제작하기엔 약간 빠듯한 액수지만 1930년의 280만 달러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당시 포드의 최신 고급차였던 모델 A 풀옵션이 1,200달러, 금 시세가 28.3g(1온스)당 20달러 수준이었으니 280만 달러로는 고급차 2,333대나 약 14만 온스, 4톤에 달하는 24K짜리 금괴를 구매할 수 있었다.영화의 클라이막스인 공중전 장면을 촬영하는데 복엽기 140대와 조종사 200명이 동원되었으며, 이중 3명의 조종사가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사망했다. 휴즈 자신도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다 크게 다친건 덤.. 영화 자체는 25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여 당대 제작된 영화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제작비가 워낙 막대했던 탓에 이걸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카데미 최우수 촬영상에 노미네이트되긴 했다고 이후에도 휴즈는 '스카페이스'같은 히트작들을 줄줄이 뽑아내며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야스파티를 즐기다 극대노한 그의 부인에게 이혼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영화 제작자 하워드 휴즈의 인생은 1948년에 할리우드 5대 영화 배급사중 하나였던 RKO 그룹을 880만 달러에 인수하며 절정에 달한다. 월트 디즈니 그룹이 제작하는 영화를 독점적으로 배급할 권리를 가졌던 RKO는 절대 망할수가 없는 회사로 유명했는데, 휴즈는 이 알짜배기 회사를 10년동안 운영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사로 만들지..는 않았고 회사 자체를 공중분해시켜버렸다. 일단 그룹의 고위 임원진들과 스태프들이 휴즈의 깐깐한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고, 회사의 중간관리자들은 휴즈에 의해 무더기로 해고되었다. 인수한지 1달이 안되서 직원의 75%가 사라졌을 정도니 뭐... 휴즈가 자기 입맛에 안맞는 영화들을 모조리 취소시킨 덕분에 회사는 반년간 개점휴업 상태로 운영되었으며, 1년에 500만 달러가 넘는 순수익을 기록하던 회사는 수입의 90%가 삭제되며 파산 위기에 놓였다. 이후 RKO는 휴즈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모든 자회사가 제너럴 타이어(現 Continental AG)에 합병, 단 11년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후 그는 죽을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수많은 장난감들 중 하나였을 뿐, 그가 진심으로 애정했던 물건은 따로 있었으니... 분량조절 실패로 다음편에 계속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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