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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두번 실린 이승만 대통령

ㅇㅇ(122.44) 2018.10.14 03:21:56
조회 146 추천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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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과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총 2번 타임지 글로벌판 표지에 올랐다.


한국 대통령중 처음으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한국의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1950년 표지에는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된다", 1953년 표지에는 "자유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가" 라는 제목으로 커버스토리가 게재 되었다. 두 경우 모두 한국전쟁으로 인한 불안한 상황이 주 내용입니다. 1953년 표지에는 위태로운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듯 앙상한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Monday, Oct. 16, 1950.

그러니까 6.25가 터진 뒤 3개월 후에 쓴 글입니다.


1) 그는 철저하게 반공이었다.

2) 그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3) 그는 공정하게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그것은, 만약 오늘 다른 표가 주어졌더라면 정권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유일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승만이 태어난 해인,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은 한국 귀족만을 위한 불변의 법칙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그것은 신사(선비)란 꼭 학자여야만 하고, 또한 그 학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법이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1392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이씨(조선)의 후예였다. 그의 아들은 중국어와 유교식 전통 안에서 한국 선비 교육을 받도록 준비했다. 이승만은 열심히 전통적인 학습을 했다(그는 여전히 중국고전시를 쓴다). 그는 젊은 학자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한국의 국가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학문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즉시로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1895년 한국은 독립 상태였지만 러시아와 일본 제국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영민하게도 이승만은 서양 교육과 영어로 된 지식이 결국에는 미래의 한국 정부에 유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배재 대학교와 감리교 선교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배재대에서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서양 정치사상에 노출되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55년 동안 이승만은 그의 나라의 “국부”로서 사명을 다해 달려왔다. 지난주에, 이 늙고 지쳐 있는, 그리고 눈이 어두워 잘 읽지도 못하는, 그렇지만 여전히 한국 독립의 상징인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기에 바짝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이것이 저 일러스트레이션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이유다.


[출처] http://blog.naver.com/dusdkcydl/22130542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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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 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 위를 받을 때의 모습.[ 유 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 과 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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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졸업했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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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되었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YMCA 안에서 잠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대학과정은 폐지되었고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 1951년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하였고, 1958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의 인가를 받았다.


... 대학부 그리고 대학교. 어차피 돌고돌아 배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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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786 최진행 아무도 안데려가면 존나 상처받는거 아닌가 ㅇㅇ(203.232) 18.11.19 34 0
1409785 야 임마 개소리 집어치고 송광민이나 잡아야 한다고 [3] ㅇ.ㅇ(121.164) 18.11.19 91 0
1409784 장88 6년계약설은 또뭐야 ㅋㅋㅋㅋ [4] 좆습좆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1.19 208 0
1409783 이용규 더도 덜도말고 4년 30억에 찍자 ㅇㅇ(222.234) 18.11.19 18 0
1409782 딴 팀이 옥수수 그리워 할만하지. 저런놈 다 잡고 상위라운드 유망주 줌 asd1(119.67) 18.11.19 23 0
1409781 꼴데가 팀분위기가 좋긴한데 그게 좋은것도아님 [2] ㅇㅇ(58.143) 18.11.19 128 0
1409780 FA신청만 한거지 아직 안떠났어 ㅇㅇ(175.223) 18.11.19 17 0
1409779 허관회 내년에 1군에서 일낸다 [3] ㅇㅇ(14.54) 18.11.19 83 0
1409777 솔직히 최진행은 그냥나온건 아니겠지 dd(211.36) 18.11.19 31 0
1409776 현장 평가는 아무도 모르는거야 asd1(119.67) 18.11.19 21 0
1409775 이렇게 갑자기 떠날줄은 몰랐는데ㅜㅠ ㅇㅇ(175.223) 18.11.19 39 0
1409774 머리 크기 인증 [3] ㅇㅇ(61.81) 18.11.19 99 1
1409773 손아섭 땅의정령이라는데 우리랑 할때는 땅의정력아니었나? [2] ㅇㅇ(203.232) 18.11.19 77 0
1409772 보상선수 챙겨주려는 최잉의 배려를 모르네.. [1] ㅇㅇ(218.209) 18.11.19 53 0
1409771 용큐 팡민이는 중심타선인데 [1] ㅇㅇ(211.36) 18.11.19 36 0
1409770 성준아 3루 전향하자 [1] ㅇㅇ(175.223) 18.11.19 75 0
1409769 진행아 알아서 퐈 신청해줘서 고맙다.. ㅇㅇ(58.227) 18.11.19 21 0
1409768 근데 FA 신청하는게 욕할 건 아니지 않냐 ㅇㅇ(58.126) 18.11.19 35 0
1409767 꼴데도 팀 분위기 졷같지않냐? [2] ㅇㅇ(211.36) 18.11.19 205 0
1409766 심심해서 칰픈톡방 아무데나 들어갔다가 ㅈ같아서 바로나옴 ㅇㅇ(112.184) 18.11.19 45 0
1409765 칰아섭 오면 123번이 정근우 이용규 손아섭임 [2] ㅇㅇ(203.232) 18.11.19 111 0
1409764 어떤 의미로는 양의지보다 더 어그로 끄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asd1(119.67) 18.11.19 45 0
1409763 (군필만) 분대장교육대 갔던 사람만 봐줘 ㅋㅋ....txt [1] ㅇㅇ(223.62) 18.11.19 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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