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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항공기술의 정점: A-5 Vigilante-1
[시리즈] 먀 · 벼락치기하면 안되는 이유: AJ Savage · 냉전기 미해군의 대들보: A-3 Skywarrior-1 · 냉전기 미해군의 대들보: A-3 Skywarrior-2 1956년 미해군의 2번째 함상 핵폭격기 사업의 최종 승리자는 더글라스의 XA3D로 확정되었음. XA3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기술이였던 후퇴익과 제트엔진을 채용하면서 해군에게 '신시대의 새로운 폭격기'가 뭔지 보여줬다면 AJ 슈퍼 새비지는 직선익에 결함투성이 트윈 터보프롭엔진을 때려박으며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의 위험성을 보여줬기에 이게 충격적인 결과는 아니었음. 다만 이들이 간과한게 있었다면.... 당시는 냉전 초기였고, 이때의 기술발전 속도는 정말 빨랐다는 것 지금처럼 70년대에 만든 F-16이나 B-747을 마르고닳도록 쓰는게 아니라 정말 10년만에 강산이 바뀌는 수준이었거든 ㅇㅇ 10년전에 록히드 컨스텔레이션이나 B-377같은 프롭기를 굴리던 항공사들의 격납고에는 B-707과 727 747과 같은 거대하고 빠른 제트기들이 들어섰고 F2H 벤시나 P-80 슈팅스타같은 구닥다리 제트기를 굴리던 미공군과 해군도 50년대 후반~60년대가 되면 한국에서도 55년간 운용되며 대한민국의 영공을 지켰던 F-4 팬텀이나 어마어마하게 추락하면서도 빨갱이들로부터 서유럽과 일본을 수호한 F-104 스타파이터, 최강의 요격기, 신의 전투기를 목표로 만들었지만 병신이 되어버린 F-106 델타 다트와 같은 초음속기들을 찍어냈음 한마디로 3년마다 새로운 전투기가 뽑혀나오는 대낭만의 냉전 초기였단거... 당연히 더글라스의 야심작이던 A-3 스카이워리어도 금방 퇴물이 되어버렸고, 미해군은 새로운 함상 핵폭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음 그리고 이 모든것을 예견한 한 항공기 제작사가 있었으니... '끝없이 진화되어 한국을 구원한 전투기' P-51 머스탱의 제조사였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Mig-15를 학살하고 다녔던 한반도 하늘의 수호자, F-86 세이버를 설계했으며 인류를 달로 보낸 새턴-V 로켓의 개발에도 참여하고 SR-71 블랙버드보다 빨랐던 폭격기, XB-70 발키리를 만들어낸 노스 아메리칸 항공이었음 이들은 1954년, 그러니까 AJ 슈퍼 새비지가 개발중일때부터 초음속 고고도 폭격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는지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서 개발을 시작했으며, 극비로 진행된 이 폭격기 프로젝트에는 NAGPAW, 그러니까 ‘노스 아메리칸의 범용 공격 무기(North American General Purpose Attack Weapon)’라는 이름이 붙었음. 한창 개발되던 이 항공기를 눈여겨보던 미 해군은 NAA와 협업해 NAGPAW를 NAA-233이란 신형 폭격기 프로젝트로 통합했음. 이제 NAGPAW는 항모에서 운용이 가능하고, 3,000km의 항속거리를 가지면서 마하 2로 비행하는 중에 흥미로운 "선형 폭탄창"에서 핵투발이 가능한 쌍발 항공기로 구체화되었음. 개발기간 단축을 위해서 노스 아메리칸의 엔지니어들은 1959년에 프로젝트 자체가 폐기된 XF-108 레이피어의 동체를 A-5에다 거의 그대로 이식하려 했고, 안정성 때문에 초기설계 당시에는 XF-108의 동체에다 수직 미익을 두 개 세우는 안을 고려했지만 당시까지 함재기에서는 미익을 두 개 설치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 원하지 않아 결국 최종 설계에서는 1개의 수직 미익으로 변경되었다고 함. 이는 미해군이 수직미익이 2개인 항공기를 운용해본 경험이 없어서 되도록이면 운용상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했고, 항모 수납 시 수직 미익이 하나면 한쪽으로 눕혀버려 높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음. 마찬가지로 함재기답게 항모에 수납할 때 공간 면적을 줄일 수 있도록 A-5의 주익과 수직 미익, 기수 부분의 레이돔은 모두 접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음. 또한 설계 과정에서 ROC를 맞추기 위해 카나드를 설치하고 F-111이나 Mig-23처럼 가변익을 장착한 설계안이 고려되기도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폐기처리되었다고.... 엔진으로는 F-4 팬텀, F-104 스타파이터 등에 쓰인 J79 터보젯의 출력을 개량한 J-79-GE-8 터보제트엔진을 장착했는데, 총 두 발의 엔진이 장착되어 각각 10,900 파운드의 출력을 냈고, 애프터버너 가동 시에는 17,000 파운드의 출력을 뽑아냈음. 이는 F-4와 동일한 엔진을 사용함으로써 운용비를 절감하고 정비 소요를 줄이기 위해서였음. 여담으로 NAA 엔지니어들은 핵 투발 이후 핵폭발에 말려들지 않고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여 탈출할 수 있게끔 항공기에 제트 연료와 과산화수소로 구동되는 보조 로켓 엔진을 장착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해군은 반응성이 매우 강하고 폭발하기 쉬운 과산화수소 연료탱크 수십개를 항공모함에다 쌓아두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결국 취소되었다고 함. 2명의 승무원은 직렬 복좌식으로 배치되어 별도로 분리된 캐노피가 있는 탠덤 조종석에서 비행했고, 사출좌석이 없어서 비행기 하단으로 뛰어내려야만 했던 A-3과는 달리 노스 아메리칸제 HS-1사출 좌석이 장착되어 비상시 생존성이 향상되었음 특이한 점이라면 조종사는 두 승무원의 사출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필요한 경우 사진처럼 조종사를 버리고 스스로 사출할 수도 있었음. 항공기의 전방 시야 자체는 매우 좋아서 조종사는 편하게 조종이 가능했지만, 뒷좌석의 항법사겸 폭격수는 양쪽에 작은 창문만 있었음. 원래 NAA의 엔지니어들은 뒷좌석에 창문을 설치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둠 속에서 레이더 디스플레이를 더 잘 볼 수 있고 핵폭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음. 하지만 항법사들한테 '우리 신형 폭격기에 창문 없앨건데 개쩔지않노?' 라고 물어보자 하나같이 '님 쳐돌았음?' 이라는 의견만 나와서 엔지니어들은 결국 2개의 아담한 창문을 추가했음. A-5는 1961년 당시나 지금이나 매우 커다란 함재기였으며, 동시에 가장 복잡하고 관리하기 까다로웠던 항공기이기도 했는데, 고고도 비행을 위해서 고익-후퇴익 구조를 채택했으며, 저고도/저속에서 양력을 높이기 위해 경계층 제어 시스템(Boundary-layer control system-주익의 노즐을 통해 공기를 불어넣어 공기흐름을 개선, 양력을 증가시키는 장치)을 설치했음. 또한 무거워진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서 디지털 비행통제 시스템인 FBW가 장착되었으며, 제어 시스템도 특이해서 주익에는 플랩 설치 공간을 위해 에일러론을 없앤 대신 선회를 위해 수직미익이 스포일러와 연동되어 각도가 변경되는 방식을 채택했음. 또한 기체 강도를 높이고 중량을 낮추기 위해 기골에 티타늄을 사용하고, 주익 외피는 알루미늄-리튬 합금을 사용한 점도 당대 항공기 중에서는 매우 독특한 설계 방식이었음. 이것 말고도 신축성 아크릴로 만든 캐노피, X-밴드 레이더 재머, 신축가능 수납식 공중 급유 프로브를 포함한 정말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함. 이중에서는 이게 50년대 기술이라고? 싶은 것들도 있었는데, 속도에 따라 흡입구 모양이 변하는 가변형 인테이크 대지상/대공/대함모드가 탑재되어 지형인식이 가능했던 AN/ASB-12 멀티모드 레이더 초기 HUD의 형태 중 하나인 '투사 디스플레이 표시기'(PPDI) 마찬가지로 원시적인 EOTGP 시스템의 일환으로 기수 하단에 설치된 TV 카메라, 촬영된 영상은 조종사의 PPDI와 뒷좌석의 레이더 디스플레이로 전송되는 방식이었음. SM-64 나바호에서 파생된 기술인 레이더장착식 INS 시스템 (REINS) 등이 장착되었고, 이 모든 장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다용도 디지털 분석기(VERDAN: Versatile Digital Analyzer) 가 탑재되었는데, 이는 극초기의 컴퓨터로써 기존의 구식 항법장치들을 완벽히 대체했음. 뭐 운용초기 MTBF (고장간 평균시간)가 15분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당대의 모든 첨단기술이 집약된 폭격기였던 비질란테를 NAA의 엔지니어들은 궁극의 핵폭격기라고 생각했으며, 해군은 이 새로운 초음속 폭격기를 자세히 검토한 이후 1955년 7월에 NAA의 기본설계를 승인했고 1956년 9월에 시제기 2대의 계약을 체결했음 이후 1958년 8월에 초도비행에 성공하며 YA3J-1 '비질란테'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고 본격적으로 양산준비를 시작함 이후 시제기 1대가 유압/항법시스템 결함으로 추락하는 사소한 찐빠가 있었지만 1961년 6월에 제 3 중공격비행단(VAH-3)에 최초로 배치되며 전임자였던 A-3 스카이워리어를 밀어냈음. A-5 비질란테는 항모에서 운용하기 위해 설계한 핵 투발용 폭격기로써, 1961년에 세계 최초의 SLBM인 UGM-27 폴라리스가 실전배치되기 전까지는 AJ 새비지나 A-3 스카이워리어처럼 미해군의 유일하다시피한 핵투발 수단이었음 비질란테 또한 유사시에 핵전쟁이 발발하면 지중해의 미 항공모함에서 이함해 마하 2의 초음속으로 소련 영공을 주파, 이후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연료탱크와 함께 동체 중앙의 관형 폭탄창에 들어있는 2메가톤짜리 MK.27 자유낙하식 핵폭탄 1발을 목표지점에 수직으로 투하한 이후 급상승하여 최대속도로 폭심지를 이탈해 항모에 착함할 계획이었음. 그때까지 항공모함이 물에 떠있을진 모르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비질란테의 미래는 찬란해보였음. 1960년 11월에 폴라리스가 실전배치되기 전까지는 말이지...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약험)세계의 기근을 알아보자
필자는 방금 대공황으로 굷주리던 시절의 미국이라는 글을 읽고 생각했다."c발 배를 주렸다는데 고기에 밀가루를 섞어먹고 민들레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고?""아무래도 배고팠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그래서 각 지역별로 생각나는 기근이 뭐 뭐 있을까 생각해 보았고 대략적으로 우크라이나 중국 한국 일본 인도 등등의 지역에서 차마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근이 있었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그래서 각 국가를 대표하는 기근과 그 피해 등등을 정리하여 서술하도록 하겠다.경신대기근조선에 일어난 최악의 사건을 꼽는다면 늘 들어가는 경신/을병 대기근으로 전란을 겪은 조선이 이후 떡락한 식량 생산과 소빙하기로 인한 이상기후가 겹쳤고, 그 상황에서 어마아마한 자연재해가 쉬지 않고 몰아친 나머지 대흉작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굶기 시작한 상황에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까지 같이 돌기 시작하며 기근과 역병이 같이 몰아치며 조선에서 100만 가까이 되는 사망자가 나왔다.그런 상황에서 병든 가축이나 인육을 먹고 병에 걸려 죽는 등, 최악의 최악을 갱신하며 국가 멸망 테크를 탈 뻔했다.여담으로 1600년도 당시 조선의 인구는 1500만 정도로 농토를 한계지까지 개발하여 국토 대비 인구가 많았던 만큼 그 피해는 상당히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중책인 고위 관료들조차 죽어나갔던 형편인 만큼 조선을 이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근이라고 할 수 있다.여담으로 지방의 균등한 발전은 이때부터 좆박기 시작했다, 대기근으로 어마아마하게 죽은 이후 높은 한양의 부동산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구휼미가 넉넉했던 한에서 살아간다면 대기근이 오더라도 다른 지방보다는 조금 더 먹을것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로 한성부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며 수도 집중화가 심해졌다.이후 소빙하기가 지속되는 동안 한번 더 을병대기근을 쳐맞았고 기근으로 140만 질병으로 25만의 사상자가 더 나왔다고 한다.삼년대기근여담으로 중국의 인구 성장은 가히 폭발적인 수준이였다.60년 이전까지 대약진운동을 겪으며 이미 기근이 시작되고 농업 생산력이 작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구가 그대로 불어나며 농촌의 생활이 고달플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었다.60년 이전까지 인구가 늘었다, 그리고 61년 이후에도 2023년이 되기 전까지 인구가 줄었던 적이 없다.공산당 통치 아래 유일하게 인구가 줄었던 시기이자 인민들이 수천만명이 죽어나갔던 시기인 삼년대기근은 독특한 부분이 있다.'왜 들고 일어나지를 않았음?'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너무도 못먹고 못 살았으며 민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식량 창고를 기습하는 정도에 그쳤던 당시의 농민들을 간단하게 서술하자면 생물학적으로 반기를 드러낼 수 있는 힘 자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기근이였다.그 1년 사이에 중국 각지에서 드러난 식인 사건은 1300건이며 6억 인민들 가운데 사망자는 과거 미국 추산 200만으로 예상되었으나 그것조차 너무 과도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이내 중국 공안부의 발표 결과는 가히 5000만에서 6000만의 사망자.핑핑이 정권이 들어온 현재의 '제대로 집계되지 못한 사망자'의 숫자는 2000만에서 4000만 정도로 추산하는 걸 생각해보면 가히 대륙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그렇기 때문에 규모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근이라고 할 수 있었다.물론 노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젊은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노인들은 수시로 기근을 겪어왔고 허난성의 경우는 성 하나에서만 300만이 죽은 기근이 일어난 만큼..가히 더 지독한 예방 주사를 맞아보았기 때문이다.벵골 대기근조선이 천재를 겪었고중국이 천재와 인재를 같이 겪었다면벵골 대기근은 말 그대로 천재가 1할이고 인재가 9할인 독특한 기근이라고 할 수 있다.일본군이 버마로드를 따라서 인도를 공격하려는 시도에 영국은 발작을 시작했다, 왕관의 보석이라고 불리던 인도는 당시 독립을 코앞에 두고서 영국과 사이가 안 좋은 형편이였지만 전쟁이 끝난 뒤 인도를 독립시켜주겠다는 약속에 그나마 진정하고서 영국의 뿌리 깊은 수탈과 징발을 인내하고 있었던 형편이였으며 이내 영국은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다.갑자기 왜?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싱가폴 말레이 버마를 빼앗긴 영국은 인도가 그대로 점령당하고 추축국이 되는 것의 병적인 경계를 가지고 있었고.결국 동방에서 진격해 들어올 일본군의 손에 들어올 점령지인 벵골을 대상으로 초토화를 시작했다.말 그대로 초토화, 길을 부수고 곡물을 모조리 빼앗고서 수운을 틀어막더니 그대로 방치를 시작했다.시간이 지나 1943년이 될 즈음 본격적인 기근은 정점을 맞이하였다, 많은 이들이 굶어 죽어나갔고 면역력이 떨어져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창궐, 치료제인 퀴닌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서 백인이 아니면 구매할 수 없는 형편까지 된 상황.그 당시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증언이 있다."거지가 싼 설사 속의 곡물을 주워먹기 위해 아이들이 설사를 뒤져 곡식을 주워먹었다."이후에도 이전에도 인도에 많은 기근이 있었지만, 한 지역에서 이토록 참혹한 기근은 거의 없었다.우크라이나 대기근가장 끔직한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우크라이나 지역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 제도에 반발하기 위한 재산 파괴와 가축 도축 등으로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고.이후 소련 정부의 과도한 수탈로 인하여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이유? 정말 그게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적백내전과 독소전쟁보다도 농부들과의 싸움이 더 위협적이고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내부 체제 정비에 힘을 써 왔으며.그 과정에서 부농들이 많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는 왜 이곳이 유럽의 빵바구니인지 알려줄 정도의 곡식 산출이 나왔다.다르게 말하자면 소련은 부농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가히 정상적이지 않은 수준의 수탈을 자행하였고.농사 짓는 방법을 모르는 공산당원들의 집단농장 경영과 남 줄 바에는 잡아먹자는 식의 행동이 겹친 그 결과 나중에 파종하기 위한 모종마저 남기지 않고 가져간 수탈을 버티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모든 부농들이 전부 말라죽을 때 까지 기근이 발생.다른 사례가 기근이 있을지언정 구휼 시도가 있던것에 비하여 비옥한 농토와 별다른 재?!!@앙이 없었다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구 10분의 1이 죽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공산당의 가혹한 징발과 더불어 일절 전해지지 않은 구휼이라는 원인이 있었다.벵골대기근보다도 더 심한 말 그대로 인재 99퍼의 끔찍한 대량학살에 가까운 기근이라고 할 수 있다.아일랜드 대기근피해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인구가 800만이니까 죽은 사람도 적었다만.비율로 본다면 이 이상의 기근은 찾기 힘들다, 인구의 4분의 1이 사라졌다.100만은 죽고 100만은 도망갔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또 시발 또또 영국이다, 지겹지도 않아 싶지만 대영제국 이 새끼들은 남 괴롭히는 걸 존나 좋아해서 질리지도 않나 보다.아무튼 아일랜드 대기근의 배경에는 아일랜드의 시장 경제에 달려있다.아일랜드인들은 농사를 지었다, 밀 농사와 감자 농사를 지으며 세금으로 수확한 모든 밀과 유제품을 바쳤고.영국인들이 세금으로 가져가지 않았던 버터밀크와 감자를 먹으면서 인구가 800만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감자임금제도라고 부르며 척박한 토지에서 지어지는 감자 농사의 압도적인 인구 부양력이 돋보이는 사례임과 동시에.한 가지 작물만 기르는 나라가 얼마나 역병에 취약한지 알려주는 증거가 되었다.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일랜드 사람들의 감자 농사는 개작살이 났다, 감자 역병이 돌면서 아일랜드의 밀과 축산물은 이전과 비슷하게 수탈당했지만 그나마 버티게 해 주었던 감자가 없어졌다.감자 말고 다른 걸 심으면 되지 않느냐고?북유럽에서도 자라는 호밀도 제대로 안 자라는 일조량 낮은 땅이 아일랜드이기 때문에 다른 걸 심지도 못 했고, 심었더라도 결국은 세금으로 빼앗겼다.이후 사태가 개 존나게 심각한 것을 알게 된 영국 정부는 구휼미를 보내자는 의견을 의원들에게 제출했지만 영국인들의 민의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에선 말했다.'시장 경제를 존중하라.'당연히 구휼미는 보내지지 않았고 세금은 여전했다, 결국 세금을 감면해줄 때 즈음에는 아일랜드가 초토화 당한 이후였으며 그 넘쳐나는 아일랜드인을 케나다와 호주로 보내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당시 영국 정부의 무능은 상상을 초월했던 덕분에 멜서스 트랩을 그냥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드는 것으로 해결하는 기합찬 선택지를 보여주었다.역시 해병대의 원조격 국가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해병이고 하는 생각도 해병이다.물론 끝끝내 구휼미가 들어올 수 있었지만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았다.항구에 쌓아두고서 알아서 배분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방치했고.그렇게 쌓인 곡식은 영국인들이 아일랜드인에게 '기근 가격'이라는 바가지 가격으로 아일랜드인에게 팔아치워서 막대한 이득을 냈으며 그렇게 아일랜드인들은 굶어 죽고 도망치며 현 2025년에도 200년 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여담으로 이 개미친 혐성새끼들은 다른 나라에서 기근 모금을 보내주려고 했더니 자존심 상한다면서 거부했다, 어차피 영국인 입장에서 아일랜드인은 가축보다 못한 일종의 흑인 노예보다도 못한 찌꺼기 비슷한 취급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죽어도 상관 없었던 것이다.이후 인도는 독립했고 인도 정부는 2500만명이 굶주리는 대기근이 닥쳐왔지만 주 정부 수준에서 대처를 잘 한 덕분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그 어떤 기근도 전근대 이후의 기근이라면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저건 흉작으로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말려 죽이기 위해 죽인거구나.왜냐하면 저 당시 인도는 개도국 언저리의 수준으로 경제가 안 좋은 상황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만의 힘으로 기근을 해결했다, 필리핀 또한 코로나 당시 쌀 부족 문제를 겪었지만 겨우 비닐봉투에 쌀을 담아서 나눠주는 것으로 대처하여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기근이란 보통 하늘이 도울 순 있어도 인간이 만드는 재!@!@앙인 것이다.그런 부분에서 당시 조선은 개시발 진짜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하늘이 말려 죽이려고 들었던 개억까를 당한 셈이다, 그러니 다들 왜란이랑 기근이랑 다 겪고도 살아남은 조선을 너무 억까하지는 말자, 조선 후기는 ㄹㅇ 하늘이 죽이려던 걸 어떻게 살아남아서 반신불수 된 꼴이다.
작성자 : 김볶밥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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