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곳을 구하기 위한 용사입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에?"
이게 흔히 말하던 이세계 클리셰인 것일까.
그저 망상을 좋아하던 내게 이세계물의 만화나 소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지만, 실제로 그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늦은 저녁 퇴근길을 달리던 내 앞에 나타난 환한 빛의 구멍.
갑작스레 출현한 미상의 공간옆으로 핸들을 틀지 못해, 차체 그대로 돌진해버린 내가 도착한 곳은 중세시대 영화에서나 보던 왕궁안이었다.
빛나는 구멍으로 돌진하는 순간,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고 풀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들려오는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꽉 쥐고 있던 핸들을 놓치 않은채로 슬며시 눈을 뜨니 차문으로 다가와 유리를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오오... 이것이 용사님의 무기인가"
"이리 신통한 물건을 가지고 오시다니, 이분은 필히 우리나라를 구원해주실 분이 분명하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은 적대적이지 않아보여,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용사님 어서 마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마왕이라니요?
"늑대왕이던 울파가 마족과 일부 수인세력들을 규합해 마왕의 자리로 올라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신께서 당신을 보내셨으니, 이제 승전보를 울릴 시간입니다"
늑대가 마왕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같이 입고있는 옷은 또 중세풍인걸로 보아, 여기가 이세계인건 확실한데 나한테 마왕을 잡을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헌데 지금 이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알겠다고 하며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 밖에 없었다.
이어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조와 함께 갑옷과 무기를 지급받은 내가 향한 곳은, 수많은 격투가들이 가득한 콜로세움 아래의 노예상이었다.
"동료를 원하신다면 용병길드로 향하는게 편하실겁니다. 아니면 궁정 내부에 있는 기사단에서 차출하셔도 되구요."
용병길드라... 분명 용병길드에는 타고난 능력자들이 있을법하다만, 그들은 콧대높은 자들일테고 그저 돈으로만 엮인 관계는 나중에 화를 자초할지 몰라서 패쓰.
그런다고 기사단에서 데려오자니, 준귀족인 그들이 어디서 굴러왔을지 모를 나를 살갑게 맞이해줄 리는 없으니 고민끝에 온 곳은 격투 노예들이 모여있는 콜로세움이었다.
다양한 이종족들 전사들이 한데 모여있는 이곳에서라면, 어쩌면 동료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기판에 판돈을 거는 거물처럼 분장한채로, 아래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자들을 지켜보았다.
인간족이 대다수였다지만, 개중에는 드문드문 이종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녀석이 없다는 점이랄까.
과연 믿을만한 자로 삼을 녀석이 있을까.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첫 만남을 시작하는게 옳은 일일까. 생각이 많고 복잡했다.
"마음에 드는 자들이 없으십니까."
수행원은 잘 보이지 않는 내 눈치를 보면서 안절부절 못하든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게 어떻게든 내 뒷바라지 일을 빨리 끝내고 다른곳으로 가고싶겠지.
갖가지 생각이 난무하면서도 쉬이 눈을 떼지 못하던 순간, 저 멀리서 남들보다 큰 굉음을 내며 훈련중인 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척추를 중심으로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색 줄무늬가 등판의 양쪽으로 갈라져 무늬를 이루고 있는 거구의 몸뚱이.
호기심에 옆으로 걸으며 내려보았다.
줄무늬 가득하고 길다란 꼬리를 잔뜩 부풀린채로 샌드백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모습은 꽤나 힘있고 강골해보였다.
"흠..."
"저자에게 관심이있으십니까?"
"누구든 도움이 된다면 함께해야지 않을까요"
"딱히 추천드리고싶지는 않습니다. 싸움은 잘하는데 성깔이 보통이 아닌 놈인지라."
싸움은 잘하는데 굽히는 성격이 아니다라... 오히려 호기심이 가는 녀석이었다.
"저놈 말고 저쪽은 어떠신지요?"
안내원을 따라 한바퀴 돌고나니, 격투대회 시간이 되었던 탓에 관중석에는 사람들이 물밀들이 몰려든 것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옛날 로마인들처럼 남들이 싸우는걸 구경하는게 낙인가 보다.
"와아아!"
수많은 박추갈채소리와 함께 시작된 격투대회는 아주 치열했다.
구슬땀을 흘렸던 자들이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며 심지어는 사지가 절단되기까지.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광기어린 목소리로 야유와 응원을 보내기 일쑤였다.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강자들은 점차 두각을 드러냈는데 개중에는 아까 눈여겨보았던 줄무늬의 사나이.
이름은 모르지만 여타 수인이 그러하듯, 튼실한 체격조건으로 싸움을 압도해나가는 호랑이는 처음에 눈여겨 본 대로 강자가 맞았다.
승리를 거두고 커다란 송곳니를 활짝 드러내보이며 포효하는 모습에 모두가 열광의 도가니였다.
다만, 문제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 상대와의 대결에서 발생했다.
"크흑..."
상대의 공격을 흘리면서 가볍게 허벅지를 스치는 것이 분명했건만, 어느 순간 상처부위를 붙잡으면서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상황같지가 않았다.
"무슨 짓을 한거지!"
"딱히.. 재수없는 네놈을 골로 보내버리는 것 뿐"
검은 복면을 쓴 상대는 기력을 잃어가는 호랑이를 보면서 큭큭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 안면부를 발로 걷어차기까지.
이는 상대의 검에 독이 발라져있지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중들은 그가 자신의 순수한 능력을 이용해 호랑이를 제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황호성만 높아져갔다.
콜로세움의 결투는 어떠한 부가적인 활용수단을 써서는 안되는 순수한 기술적인 대결로 알고 있었다.
활용된 독이 눈앞에 보이는 저 호랑이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저건 반칙아닌가요?"
"글쎄요. 명확하게 반칙여부가 보이지 않는다면 문제 될 건 없을겁니다."
옆의 수행원은 앞에서 호랑이가 쓰러져 죽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워낙에 많은 자들이 죽어나가는 곳이니 그러려니 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난 저대로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호랑이를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왠지 모르게 그를 놓치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아쉬움 한가득에 나도 모르게 경기장 한가운데로 난입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리고 환호소리가 들리며 경기장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로 가득찬 상태였다.
"엥? 넌 뭐야. 결투장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될텐데?"
"그렇긴 한데... 반칙쓰고 있는걸 계속 보고만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반칙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네."
상대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에 호랑이를 공격했던 대검을 끼운채로 흔들고 있었다.
분명 대검의 날에는 호랑이를 빈사상태로 만든 독이 발라져있을 것이다.
"그럼 너도 직접 한번 경험하게 해줄까?"
"아니. 그건 좀 곤란해."
"뭐야, 그럼 무슨 배짱으로 여길 내려온거냐?"
"내가 너와 직접 싸우는건 좀 무리같고... 어디보자."
나는 뒤로 돌아 무릎을 굽힌채 고통받고 있는 호랑이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더욱 위압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호랑이의 얼굴과 몸.
탄탄한 근육아래에 식은땀이 흐르는게 보였다. 어떻게든 이겨내보려하지만 독에 면역이 없는 이상 이를 이겨내는건 사실상 불가능 한 일이다.
안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고통과 함께 더욱 일그러져 누구든 가까이서 본다면 오줌이라도 지릴만한 상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요런거?"
난 호랑이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 허벅지 부위에 손을 가져다댔다.
손등위에 손을 포개니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달됐고, 이에 호랑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여타 호랑이들과 같은 노란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는 호랑이를 마주보며 난 조용히 읊조렸다.
"힐(Heal)"
내 손 끝에서 시작된 녹색빛이 호랑이의 허벅지 상처로 향했고, 이에 반응하듯 시간이 지나니 점차 안색을 회복하는게 보였다.
거칠었던 호흡도 점차 안정되어 오히려 전보다 더 안정적이게 된 듯 했다.
다른건 모르겠고 내가 이곳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을 뜬게 치유마법인 탓에 여기에서 곧바로 실험해보니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제대로 된 상황에서 붙어야지. 편법을 써서는 안되지"
"이 개자식이!"
[쾅!]
내가 호랑이를 살려낸 것을 보고는 상대는 달려들었지만, 금세 내 앞을 가로막은 호랑이에 의해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단번에 아웃되지 않으면 뒤가 비참해질지도 모르는 파괴력이 실린 펀치였다.
"고맙다. 당신은 누구지?"
내 앞에 선 호랑이가 나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지만 꽤 차분하게 말하는 것이 성정 자체는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난 수호라고 해. 여기서는 용사라고 부르더라고"
이게 나와 호랑이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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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갔다가 집에와서 끄적거린 소설
이어나갈지 말지는 고민중...
다들 해피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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