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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사기당한점붕소설14앱에서 작성

OoOo0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2.01 03: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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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베르씨와 전문 인쇄소로 미팅을 가고, 예산을 할당하는데 하루를 거의 다 썼다.

좋은 종이와 샘플이 이렇게 많은데 베르씨는 대체 왜 그런 싸구려 종이를 골랐던 걸까. 굳이 묻지는 않았다.



"흠."



나는 오타쿠 창고로 돌아와 베르씨를 도와서 예산안 작성을 마쳤다.

전에도 해봤던 일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베르씨는 엄지를 살짝 핥은 뒤 노트를 넘기며 남은 일정을 점검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오늘 근무는 끝이군요. 내일부터 저희가 동인지 업무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일단, 미팅."

"또?!"

"이번엔 다른겁니다."



베르씨는 가지고 있던 서류철을 가볍게 돌려 보여줬다.



"저희 3번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맨링, 그러니까 인간분들의 불편이나 요청을 수집해야 합니다. 본격적인 외교 업무인거죠."



나와 같은 사람들의 짤막한 프로필 사진.

그곳에는 누구에게 누가 배치되었는지, 어떤 성향을 가졌고 이전에는 어떤 직업을 가졌었는지 따위의 표가 적혀있었다.



"음."



한강은 첫날 이세계로 오던 출근 셔틀을 기억했다.

피곤한 얼굴로 셔틀에 몸을 싣고 일터를 향하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그들은 여기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세계에서 다들 외교관 같은 직무를 얻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외교 파트너인 베르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를 마찰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마찰이라고 하면..."

"가령, 주인이 똑바로 케어를 못 해줬다던가."



주인.

사람에게 붙이기에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현실세계에서도 노예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였으니까.



"주인... 이요."



베르씨가 노트를 넘기기 위해 핥았던 엄지를 쓱 소매에 닦았다.



"그게,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십시오... 외교관님께는 비상식적인 일이겠지만, 3번 서울에서는 맨링 분양을 반대한 제가 이상한 부류일 겁니다."

"인간 분양이요..."

"극소수의 맨링 분양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싶어 했던 일부 임원진들의 의견이라서요. 아무래도 회사는 이익집단인지라."



인간 분양. 고작 단어 두 개의 조합이었을 뿐인데.

내 입으로 뱉게 되는 음절 하나하나가 폭력적이었다.



"이건 현대판 노예제도잖아요..."

"우리 회사는, 맨링 관련 사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회사라서요."



맨링 관련 사업.

어떤 느낌인지는 알았다.

강아지, 고양이 분양 사업 같은걸 말하는 거겠지.



"처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매우 고가에 거래되는 데다가... 한 달마다 한 번씩 일주일간 원래 서울로 돌아갔다 올 수 있는 '귀소 휴가' 기간도 주어지니까요."

"값비싼 사치품이라는 거네요."

"그게... 그렇군요."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있다는 게 민망하다는 듯이 베르씨는 괜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걸 해결하는 게 정부의 목표고, 저희 일이라서요."

"그렇겠죠..."



그러려고 외교관을 불러온 거니까.



"동시에 지금 외교 외주를 맡긴 정부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정상적인 세계일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생각보다 더한 이세계의 현실이 머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갔다. 동인지나 그리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만큼 만만한 세상이 아니었을지도.



"2번 서울과 3번 서울의 인식 차이가 너무 심해서 정상적인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점점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교류가요?"



우리 세계에 수인은 없었는데.



"이건 국력의 문제거든요. 실제로 맨링 인권 선진국인 독일에서는 점점 교류가 늘어가고, 실질적으로 서로가 얻어가는 이익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직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요."



그렇구나. 그렇지만 나는 이런 현대판 노예제도 같은 걸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깜냥도 없을 뿐더러 진짜 외교관도 아닌데. 괜한 죄책감이 등을 타고 흘러갔다.



"인간 온리전 페스타는 그걸 완화하기 위한 초석 같은 겁니다. 중요한거죠."



난 월 800이나 받으면서.

...이런 세계에 위장취업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적어도 이상한 짓은 절대로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은한강은 베르씨와 창고를 나와 사무실 복도를 걸었다.



곧, 사내 테라스로 나왔다.

베르씨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걸리적거리는 듯,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툭, 옆 테이블에 던져두었다. 동인지 속의 도베르만 캐릭터도 담배를 피웠었지.



"담배, 피우십니까?"

"...아뇨 딱히."

"몸에 안 좋은걸 알아도 지금 당장 힘들면 저도 모르게 손이 가더군요."



익숙한 듯 얇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쥐고 불을 붙이는 도베르만.

개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면 매캐한 박하 향이 눈앞의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연기가 이쪽으로 오는데요."

"하하, 미안합니다."



베르씨가 고개를 테이블 반대편으로 슬쩍 돌렸다.



"내일 저희 담당인 딱 세 분만 모셔서 인터뷰하면 될 겁니다."

"...잘해야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봐야겠다.

물어볼 것도 좀 있고.

솔직히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무섭지만,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의외로 괜찮게 지내고 계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곳을 더 좋아하시는 분도 계시고."



베르씨의 하얀 담배 한 개비가 느긋하게 타오르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한강은 할 일 없이 테라스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육구 없는 한강의 검지에는 도시의 검은 먼지가 묻어나왔다.



"이런 질문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베르씨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즈음에는 살짝 시원한 공기가 주위를 감돌았다.

담뱃불을 끄는 베르씨의 뒤로 하나둘씩 도시의 불빛이 켜진다. 이곳에 반딧불이는 없었지만,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라이트가 마치 그것처럼 이리저리 빛나며 정신없게 돌아다녔다.



"애완동물은 아니죠."



묘한 어감이구나.

덧붙는 말은 없었다.



공기가 은근히 쌀쌀해져서 테라스를 나왔다.

아직 조명이 완전히 켜지지 않아 어둑한 복도 끝에서 남은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뭔가요."

"그, 동인지에 들어가는 내용은 전부 저희가 경험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음, 어... 그건 진작에 이해했어요."



확실히 동인지 자체에는 별 내용은 없어도 사람들의 일상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묘하게 있을 법하고,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베르씨가 전임자를 애완동물처럼 씻겨주려다가 뺨을 맞는 모습도 나오고, 전임자가 아플 때는 베르씨가 정성스럽게 간호해준다던가.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전임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한다던가. 자신이 가져온 약을 줘도 되는건지 모르겠다며.



"그래도 막 나쁜 부분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재밌는 부분도 있었고."

"좋은 결말이 난건 아니니까요."

"그걸 발매하고 싶지는 않으신거에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혹평하셨기도 하고."

"설명적인 부분만 조금만 덜어내고 결말만 정하면 좋은 만화가 될 텐데요."



베르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은 흑백으로 칠해진 만화의 톤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너머를 보고있기라도 한 것처럼.



"만약에 한강씨가 이 만화의 정상적인 결말을 예상했다면 뭐였을까요."

"그건..."



아무래도 로맨스였겠지.

만화에서 보이는 둘의 일상은 좋아보였다.

같이 사용하는 숙소의 침대 밑에서 숨어있다가 도베르만을 놀래키는 전임자의 모습이라던가.

전임자의 머리칼을 빗겨주는 도베르만의 즐거운 모습이라던가.

같이 소파에 누워서 봉지 팝콘을 뜯고, 영화를 보는 모습이라던가.



"좋아했었나요."

"조금요."



그런거였나.



저편에서 몇몇 사람들이 짐을 챙겨 퇴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말을 건네며 인사를 나누는 여러 종족이 섞인 수인들. 어둑한 복도 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우리 뿐이었다.



"결말을 임의로 바꿔볼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새로운 만화를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하루하루를 일기처럼 써 내려가야겠네.

실시간 일기 연재가 가능하려나...

아무래도 데포르메를 빡세게 줘서 캐릭터의 그림체를 간략화해야 그나마 스케줄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밌을 것 같네요."



이런 도전은 색다른 경험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베르씨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저희가 새로 만화를 만들기 전에 먼저 합의했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뭘까요."

"일전에 이야기하신 그 결말 말입니다."



뭐였지.



"그건 안 됩니다..."



베르씨는 이번만큼은 꽤 단호했다.

무슨말을 하시는 걸까.



"이 만화는 실화 기반이니까요."

"뭘 말하는 거지..."

"말하셨지 않습니까. 동인지의 꽃은... 그거라고."



아, 그거.



"기승전, 떡이요?"



쿨럭! 쿨럭...

급기야 베르씨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베르는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한강에게서 살짝 뒷걸음질 치고 숨을 가다듬었다.



"네, 네... 그거요."

"음..."



하지만 동인지가 잘팔리려면 무조건 그건데.

아무래도 도베르만은 정말로 현실에 있었던 일만 만화에 수록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떡, 중요하긴 한데."

"안됩니다... 저는 ...수컷이랑 교미하는."



베르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런 취미가 없습니다..."



굉장히 곤란해 보였다.

마치 직장 상사에게 무언가를 강요당한 불행한 직원처럼 베르씨는 괴로워했다.

그런 걸 강요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예시로 들어드렸던 것 뿐인데요."

"예?"

"아까 그건 장르가 거의 로맨스처럼 보였으니까."



로맨스 장르의 꽃은 당연히 떡이니까.

그리고 베르씨의 만화에는 그게 없었고.



"결말은 극적이어야 한다는 걸 설명했던거였죠..."



베르씨는 잠시 입을 벌리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넓은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퇴근하죠."



베르씨는 생각보다 순수한 사람이었던 걸까.



* * *



우린 회사에서 퇴근 절차를 밟고 건물을 나왔다.

겸사겸사 사내 카페에서 마감 세일을 하고 있는 샌드위치를 하나씩 샀다.

숙소로 같이 돌아가는 겸 먹으려 했는데.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해치워버린 내 옆의 멍멍씨는 디카페인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엄청 빨리 먹네.



베르씨는 뒤통수를 슬쩍 긁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럼 저희가 만들 동인지의 장르는..."



이 멍멍씨.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은한강은 슬쩍 웃으며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베르씨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었다.



"일상물로 가야죠. 저희는."

"그렇죠. 역시."



베르씨는 그제야 웃으며 안심했다.

나같은게 하는 말에 왜 이리 쩔쩔매시는 걸까. 내가 뭐라고.

한강은 웃긴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쌉싸래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수 밖에 없었다.

난 아무것도 아닌데.



"제가 로맨스로 가자고 하면 갈 것도 아니잖아요."

"그게 필요하다면..."



어색함에 한 입 베어 물었던 샌드위치의 소스가 유난히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던 건.

괜한 착각이었을까.



"시도는 해볼 용기는 있습니다."



베르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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