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5년 차

그다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오늘이다. 작년이나 저번 달이나, 이번 주나 어제나 변함없는 하루다. 우리에겐 권태기가 찾아왔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예상은 했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눈을 뜨면 머릿속에 떠오르던 너의 새하얀 목선도, 호탕하게 웃던 너의 표정, 새하얀 피부, S라인 몸매, 시원시원하며 가식 없는 너의 성격, 축축히 젖어있던 너의 손바닥, 품속에 안기며 풍기던 샴푸 냄새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별것 아닌 선물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너를 보며 죄책감과 싸우던 나의 모습 또한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다.

어느샌가 눈만 마주치면 충혈된 채 싸우던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모든 걸 포기하듯 회피했다. 화가 나도, 재미있는 걸 봐도, 맛있는 걸 먹어도 무표정인 우리들의 표정이 회피 속 긴장감을 한층 높여준다.

회피와 함께 어떠한 자극도, 쾌락도 느껴지지 않는 왠지 모를 허무함과 무력함이 찾아왔다. 사랑이 끝난 걸까? 아님 눈이 충혈된 채 내뱉던 너의 “헤어지자”는 말에 앙금이 풀리지 않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유명한 책에 나와 있는 동굴로 숨어든 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이 다가온다. 화려하지도, 빛이 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다. 촌스러운 안경과 목이 늘어난 티셔츠, 삐걱거리는 걸음걸이, 빨개지는 귀와 얼굴, 힐끗거리며 나를 소심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은 새로움으로 다가왔고 그사람의 소심함은 진지함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진지함 속에 가까워 졌고 진지함은 어느샌가 나의 작은 마음 한켠에 소심하게 자리 잡았다. 그 사람의 진심이 행여 상처가 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어 괜찮다고 되내이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죄책감이 찾아온다.

죄책감과 무력감, 허무함과 설렘의 어느 선상에 서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한다. 권태는 당연한 거라 수십 번 되뇌던 그날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설렘은 죄가 아니되, 배신은 죄라며 호탕하게 웃으며 맥주와 함께 삼키던 약속들도 함께 떠오른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둘 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어쩌면 내 자신도 학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다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권태로운 밤이 찾아왔다. 평생을 함께 사랑하자며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도, 사랑스럽고 발랄했던 너의 모습,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는 촌스러운 나의 멘트도, 별것 아닌 거에 숨도 못 쉬게 웃었던 우리의 모습도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소심하고 연약한 그 사람도 스며들었다.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 생각했던 권태기는, 세 사람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제는 권태와 이별해야겠다.

그다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오늘 밤은 조금은 소란스럽게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