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검은 머리카락, 원피스, 외투를 입은 소녀.
그 소녀를 향해 "죽지 않았다"고 말하던 <목소리>는 끔찍했어.
의학적 죽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 소녀는 그 때 죽은거나 다름없었거든.
빠울리나의 의상은 그녀의 정신적인 죽음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했어.

2. 헤라르도는 빠울리나의 말을 의심해. 자신을 도와준 로베르또를 신뢰하지.
난 헤라르도에게서 제3자의 느낌을 받았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제3자.
피해자의 말 보다 가해자 위치에 있는 로베르또의 인권을 변호하는 제3자.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꼈어. 나 또한 헤라르도의 위치에 있었던 적은 없을까.
아니,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는 헤라르도가 아니였을까. 
자신의 말을 백프로 믿지 못하는 헤라르도를 보는 빠울리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3. 이미 죽어버린 빠울리나의 슈베르트 음악을 다신 찾을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녀는 총를 겨누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목소리>를 향해.
극 내내 불특정한 로베르또 여기 저기에 겨누던 총구가 조명이 꺼지기 직전 지목한 그 확실한 대상은, 
빠울리나를 고문한 로베르또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그렇게 만든 고통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칠레가 벗어나고 싶어했던 그 시절의 비극이겠지.

4. 테이블, 의자, 배우 셋, 그리고 마이크.
이것들 만으로 한시간 내내 숨막히는 긴장감은 관객에게 절대로 빈틈을 보여주지 않더라.
아,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 올 초에 더뮤지컬에 실린 리뷰만 보고 궁금하네 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 조차 아깝지 않았달까. 내용도 물론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했음.    

5. 죽음과 소녀를 보면서 연극 '푸르른 날에'가 생각났어. 우리도 비슷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지.
빠울리나는 저 멀리 우리와 무관한 칠레의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었어. 

"왜 우리 같은 사람들만 항상 양보해야 하지? 우리가 그들 중 하나를 죽인다고 뭘 잃지?"
빠울리나의 악에 바친 대사가 잊혀지지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