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대.
오늘만 해도 다섯대의 T-34가 이 전차의 포에 주저앉았다.
'아리안족의 승리로군'
전차장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전차장은 매 순간마다 위대한 아리안족의 걸작에 대해 곱씹었다. 전방을 주시하며, 발사 명령을 내리며, 타오르는 적 전차를 바라보며. 아리안족은 유례없는 단결력으로 아픈 역사를 딛고 있어났다. 아돌프, 그는 정말 대단한 남자이다. 그는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도이치 국민에게 힘을 불어넣고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그의 작품, 이 거대한 강철호랑이는 슬라브놈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부수며 자신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조국의 모든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이 걸작은, 그 노력에 정당한 보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차장이 이러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차내 무전기에서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방금 소련놈들의 조악한 강철관이 또 하나 묫자리에 들어갔다. 열등한 민족의 열등한 기술로는, 정밀한 푸른 눈과 탄탄한 팔 근육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호랑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이 전차는 말 그대로 하나의 강철호랑이였다. 적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놈들의 여린 살갗을 다 찢어발기고 그 피로 목을 축이는-
전차장은 새삼스레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지옥같았던 독일, 견딜 수 없는 굶주림....그리고 지금, 독일은 다시 떨쳐일어났다. 제 3제국! 위대한 이름이여!
그가 자신도 모르게 총통의 이름을 되뇌일 때, 장전수는 소련놈들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좆같은 놈들, 이 새끼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마치 바퀴벌레처럼. 한 놈을 죽이면 두 놈이 튀어나오는 게 슬라브놈들이었다. 두 놈이 튀어나왔단 얘기는 곧 다섯놈이 숨어있단 소리고. 소련놈들의 전차는 확실히 조악했다. 그러나 이 티거도 포탄이 무한한 것이 아니다. 하나 둘 줄어드는 포탄을 세고 또 세며, 장전수는 이제 슬슬 보급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차장은 나치당의 사상에 깊은 감회를 얻은 사람이었다. 전차장에게 있어, 설령 보급을 위한 것일지라도 뒤로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것이다. 그는 나치의 전차라면 돌멩이라도 발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제기럴, 일단 말이나 꺼내봐야지.
장전수는 차내 무전기를 통해 전차장에게 보급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전차장은 짐짓 못 들은 척,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민 소련놈의 대가리를 터트려버리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금발이 아니었으니까.
기관총이 불을 뿜고, 놈의 대가리는 땅에 굴렀다. 놈의 머리칼이 흙바닥에 굴러 누런 빛을 띄는 것을 바라보다가 전차장은 불현듯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차장은 방금까지도 아리아인이야말로 강철같은 민족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슬라브놈들은 한 놈을 죽이면 두 놈이 튀어나온다. 강철 또한 마찬가지다.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것이 바로 강철이다. 그렇다면 슬라브민족이야말로 강철이란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들이 아닐까? 전차장은 지금껏 자신의 조국이 해온 짓들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제 3제국은 소련이라는 강철을 계속 두드려왔다. 그 망치질로 강철이 부숴져버리길 바라며. 그러나 강철은 부서지기는 커녕 단단해져간다. 심지어 모루가 있어 친다고 휘어지지도 않는다. 그래, 미국! 미국이 바로 소련의 모루이다.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는 망치 자루가 부러져버리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독일 국민들도...
전차장은 조용히 루거를 꺼내들었다. 지금껏 자신이 한 짓이 전차장의 목을 옥죄어왔다. 그는 한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죽였다. 단지 그들이 푸른 눈에 금발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그는 땅을 짓밟고 시체를 태웠다. 아리안족의 허상에 속아넘어간 채로....
전차장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소련의 국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강철 전차를 만드는 데 각고의 노력을 쏟았을 것이다. 강철...

차내 무전기로 총성 한 발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