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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의 비행기 긴빠이 대작전: TWA 85
하이재킹, 비행기나 자동차같은 탈것을 운전 중에 납치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다. 지금은 9/11사태로 인해 항공보안법이 대폭 강화되어 항공기 납치같은 사건이 잘 일어나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하이재킹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AP통신 피셜 1969년에만 54번의 납치 사건이 일어났는데, 거진 6일에 한 번은 비행기가 납치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 공항의 구조 때문이었다. 당시 공항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보안검색대도, 탐지견도, 복잡한 수화물 규정도 없었다. 승객들은 표를 구입한 이후 항공기까지 걸어서 탑승했다. 비행기에 M2 중기관총을 가지고 탑승하는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총기를 휴대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당연히 이는 개나소나 항공기 납치를 시도하는 원인이 된다. 모든 범죄가 그렇듯이, 항공기 납치의 동기는 정말 다양했다. 감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미제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한탕할 목적으로, 별거하는 아내가 보고 싶어서.... 이런 혼란스러운 배경 속에 한 청소년이 있다. 라파엘 미니첼로는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69km 떨어진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멜리토 아르피노의 가난한 집안에서 1949년에 태어났다. 1962년, 이탈리아 남부를 강타한 지진이 일어나자 모든것을 잃은 그의 가족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시애틀에 정착한 라파엘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멋진 제복을 입고 거대한 비행기를 능숙하게 조종하는 기장은 그에게 있어서 우상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꿈으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잔혹하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특유의 이탈리아 억양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극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라파엘은 조종사의 꿈을 접고 다니던 학교를 중퇴해야만 했다. 1967년 5월, 당시 17세였던 그는 해병대에 입대하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갔고, 캘리포니아주 팬들턴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5사단에 배치되었다. 1967년 12월 15일에 베트남에 도착한 라파엘은 이 지옥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시작한다. 훈련소에서부터 유능하기로 소문났던 그는 미국 사회에서 명예와 존경을 얻고자 최선을 다해 싸웠고, 1969년 4월에 팬들턴으로 복귀한 그의 가슴팍에는 주로 작전중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에게 수여되는 퍼플하트 훈장이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죽지도, 베트콩들의 AK-47에 맞지도 않았지만, 훈장의 재고가 남아돌아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면 뭐 어떤가,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훌륭한 군인이었다. 오티스 터너는 라파엘과 거의 같은 시기에 베트남에 도착했고, 같은 해병소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라파엘이 "용맹한 전사"같았다고 증언했지만, PTSD 증세를 앓고 있었던것 같다고 말한다. "라파엘은 훌륭한 해병이었고, 훈장까지 받은 해병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자원했고, 우리들의 생명을 수없이 많이 구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많았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라파엘)은 좀 이상한 상태였고요. 베트남을 떠날 때 우리 모두 혼란스러웠어요." 17세의 청소년에게 베트남은 지나치게 가혹한 전장이었다. 터너의 증언대로, 그의 인생은 그닥 잘 풀리지 않았다. 파병기간의 봉급을 정산하던 라파엘은 누군가가 그의 월급을 200달러나 횡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 200달러는 고작 30만원 남짓한 돈이지만, 1960년대의 200달러는 250만원 상당의 큰돈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돈은 자신의 목숨값이었다. 라파엘은 상관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미국 해병대는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도 않고 쉬쉬하며 덮기 급급했다. 그는 자신이 목숨바쳐 지킨 조국에 큰 회의감을 느꼈다.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군대에 요구한 사항은 말기암으로 죽어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에 자기를 파병시켜 달라는 것이었지만, 그의 상관은 이것마저 거부해버린다. '난 내 일을 할거야' 1969년 5월의 어느 날 밤, 조국에 크게 실망한 라파엘은 맥주 8병을 마시고 기지 내 PX에 침입하여 라디오를 훔쳤다. 그가 국가로부터 돌려받지 못한 200달러어치의 물건이었다. 술에 취해 PX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그는 다음 날 아침 헌병에게 체포되어 10일간 영창에 갇힌다. 베트남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지만... 라파엘은 아직 19살짜리 청소년일 뿐이었고, 자신의 행동을 온전히 책임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1969년 10월 29일에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될 예정이었지만, 감옥에 갇힐까봐 두려웠던 라파엘은 자신이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M14 소총과 7.62mm 소총탄 250발을 가지고 캠프 팬들턴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는 15.50달러짜리 TWA 비행기 티켓이 들려 있었다. 1969년 10월 31일, 캔자스시티 국제공항 TWA 소속 B-707 1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콜사인은 TWA 85편, 볼티모어에서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기장, 도널드 쿡, 31세, 1965년에 TWA에 입사했다. TWA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기장을 단 능력있는 인물이다. 웬젤 윌리엄스가 부기장으로, 로이드 홀라가 항법사로 탑승한다. 모두 TWA에 입사한지 얼마안된 신참들이다. 젊은 조종사들과 젊은 스튜어디스들이 비행기를 이끈다. 스튜어디스 대부분은 근무 경력이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승무원중 최선임은 23세의 샤를린 델모니코로, TWA에서 3년간 근무했다. 비행기는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로스앤젤레스에 착륙했다. 몇몇 승객들이 내리고, 다른 승객들은 잠이 덜 깬 채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1시간 30분의 야간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승객은 40명 남짓, 모두 각자 자리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1시간 30분 뒤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있으리라 기내에 남아 있던 승객들이 계속 잠을 잘 수 있도록 조명은 어두웠고, 새벽녘의 잔잔한 분위기가 기내를 가득 채웠다.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탑승할 때 티켓을 확인했지만, 델모니코는 새로 도착한 승객 중 한 명, 특히 그의 가방에 유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올리브색 얼굴에 위장복을 입고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납작하게 넘긴 한 젊은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B-707에 탑승했다. 그의 가방에는 길쭉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델모니코는 동료 타냐 노바코프와 로베르타 존슨이 승객들을 좌석으로 안내하고 있는 일등석으로 향한다. "젊은이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뭐였죠?" 델모니코가 물었다. "아마 낚싯대가 아닐까요?" 로베르타가 대답한다. 새벽 1시 반에 낚싯대 하나만 가지고 비행기에 타는 승객만큼 수상한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낚싯대를 든 남자 하나를 신경쓸 만큼 승무원은 한가한 직업이 아니다. 델모니코의 두려움은 금방 가라앉았다. 85편에는 1960년대 중반 비틀즈풍 노래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선샤인 팝 그룹, 하퍼스 비자르의 멤버 다섯 명도 타고 있었다. 사이먼 & 가펑클의 '59번가 브리지 송(Feelin' Groovy)'을 각색한 이 밴드의 최대 히트곡이 나온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들은 그날 밤 패서디나에서 열린 기이한 콘서트에 잔뜩 지쳐 있는 상태였다. 가수 겸 기타리스트 딕 스코페톤과 드러머 존 피터슨은 비행기 왼쪽 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웠고, 다른 멤버들은 긴 잠에 빠져들었다. 1시 30분, TWA 85편이 활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4개의 강력한 P&W JT3D 터보팬 엔진이 100톤이 넘는 B-707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승객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난다. 이륙 시 추력을 높이기 위해 엔진에 의도적으로 물을 분사하는 B-707 엔진의 특성 때문이다. 비행기 내부를 불길하고 깊은 소음이 가득 채운다. 승무원들이 조명을 거의 완전히 꺼버리자 기내는 어둠으로 물든다. 샤를렌 델모니코는 5개월 전 TWA에 입사한 21세의 언어학과 졸업생, 트레이시 콜먼과 함께 기내 뒤쪽 갤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M14를 파지한 라파엘이 갤리 안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내에는 항공보안관도, 권총도 없다. 델모니코는 침착하게 라파엘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손님, 기내에 전투소총을 가져오시면 안 됩니다." 1+1=2 수준의 간단한 사실, 라파엘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장난감 소총으로 장난치는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7.62mm 소총탄을 승무원에게 건네주며, 자신을 조종석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 딕 스코페톤은 잠이 들려고 했지만, 통로에서 들려오는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났다. 승무원을 따라오는 남자가 소총을 겨누고 있다. 이게 도데체 무슨 상황일까, 몇 줄 앞에 앉아 있던 밴드 동료 존 피터슨이 그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비행기 뒤쪽에서 승객 중 한 명인 짐 핀들리가 라파엘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상대는 베트남에서 2년을 보낸 베테랑이다. B-707의 동체 길이는 41~46m, 핀들리의 머리를 M14로 날려버리는건 라파엘에게 있어서 200달러를 돌려받는 것보다 수천배는 쉬운 일이다. 승무원들은 자신들 앞에서 누군가의 후두부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960년대의 고전적인 하이재킹이 늘 그렇듯이, 납치범의 지시대로만 행동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델모니코는 핀들리에게 좌석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다. 이제 델모니코와 라파엘은 콕핏으로 들어간다. 비행 전에 FAA의 보안규정 강화로 인해 노크하지 말고 초인종을 누르라는 기장의 지시가 있었으나 라파엘이 그런 세세한 규정을 신경쓸 이유는 없었다. 조종석 출입구를 발로 차버린 그는 콕핏으로 들어가 쿡 기장과 윌리엄스 부기장에게 소총을 겨누었다. 항공기 조종사가 되고싶었던 13살의 어린아이는 6년 뒤 항공기 납치범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라파엘은 이제 기장을 바라보며 나폴리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한다. "뉴욕 쪽으로 선회하시오" 6년 전이었다면 파스타 새끼라고 조리돌림당했을 일이지만, 조종석의 그 누구도 그의 억양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하퍼스 바자르 멤버들은 총격범이 지나가자마자 모두들 서로 비행기 앞에 앉으려고 달려갔다. 그들의 기묘한 저녁은 더욱 기묘해졌다. 멤버들은 그 남자가 어떻게 비행기에 소총을 몰래 싣고 올 수 있었을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도데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가는 걸까? 홍콩인가? 홍콩에 가본 적이 없으니, 재밌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팬미팅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편, 85편 안에는 8일간 아시아를 순회 비행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길인 TWA 승무원, 주디 프로방스도 타고 있었다. 매년 주디를 포함한 TWA 직원들은 항공기 납치에 대한 대처법을 훈련받았다. 당시 항공기 납치는 매우 흔한 일이었으니 뭐.... 그들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사항은 납치범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잘생긴 19세의 이탈리아계 납치범과는 더더욱 한편, 승무원에게 제지당했던 짐 핀들리는 이 항공편에 승객으로 탑승했던 TWA 조종사였다. 그는 납치범의 가방을 발견하고 그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무기가 기내에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라파엘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새끼가 만약 권총이라도 찾았으면 상황이 수습불가능할정도로 커졌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도데체 왜 납치범의 가방을 뒤지는 걸까...? 쿡 기장의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여기 아주 불안한 젊은이가 있는데, 그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데려갈 겁니다." 당시 항공기 납치의 흔한 대처법이다. '괜히 납치범에게 따지지 마라' 이건 9/11 테러 전까지만 해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승객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아바나(쿠바의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쿠바산 시가와 럼주를 맛볼 수 있을까? 콕핏 안의 조종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일부 승객들은 이 일이 마치 모험의 일부인 것처럼 느낀다. 잘생긴 탈영병과 함께하는 비행이라... 당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꽤나 낭만적인 여정이었으리라 TWA 85편에 탑승한 사람들이 쿠바로 향하는 줄 알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쿠바는 오랫동안 납치범들이 선호하는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 조국에 환멸을 느끼고 공산주의 이념에 매료된 많은 미국인들이 피델 카스트로 혁명 이후 쿠바로 도피했다. 미국에서 쿠바로 가는 정기편이 없었기에, 하이재킹은 사람들에게 쿠바로 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게다가 카스트로는 미국으로부터 납치범들을 받아들임으로써 CIA나 FBI를 짜증나게 하는 동시에 납치된 비행기를 반환하는 댓가로 돈을 요구할 수 있었다. 1961년 5월 1일, 안툴리오 라미레스 오르티스는 "엘피라타 코프레시"라는 가명으로 마이애미에서 키웨스트로 향하는 내셔널 항공 337편에 탑승하여 기장을 스테이크 나이프로 위협하며 비행기를 장악했다. 그는 쿠바로 갈 것을 요구하며, 쿠바에서 카스트로에게 라파엘 트루히요(도미니카의 독재자)가 꾸며낸 암살 음모에 대해 폭로할 것이라고 큰소리쳤고, 결국 망명에 성공했다. 1975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징역 20년을 선고받긴 했지만... 그 후 2개월 동안 2건의 항공기 납치 사건이 더 발생했고, 1972년까지 미국에서는 159기의 민항기가 납치되었다. 쿠바로 향할 목적으로 일어나는 항공기 납치는 매우 흔해서, 한때 미국 항공사는 기장들에게 예상치 못하게 하바나로 향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카리브해 지도와 스페인어 안내 책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플로리다 컨트롤과 쿠바 사이에 직통 전화가 개설되었고, 심지어 납치범들이 쿠바에 도착했다고 착각하게 하기 위해 플로리다에 아바나 공항의 모형을 건설하자는 제안까지 있었다. 정말 그야말로 미친 시대였다. 한편, 콕핏 내부의 조종사들은 라파엘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는 뉴욕이나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뉴욕까지 갈 수 있을까? B-707의 항속거리는 6,000km이 넘었지만, 85편에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기 위한 연료만이 채워져 있었다. 이대로 뉴욕까지 비행한다면 연료부족으로 추락할 것이다. 중간에 급유를 받아야만 한다. 약간의 협상을 빙자한 조종사들의 호소 끝에, 라파엘은 85편이 덴버에 착륙하여 뉴욕까지 비행할 충분한 연료를 공급받는 것을 허락했다. 콜로라도 상공에서 쿡 기장은 라파엘 몰래 관제소에 비행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덴버에는 FBI도, 경찰관도, 장갑차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라파얼을 체포할 수 없다. 라파엘은 승객 39명이 덴버에서 내리는 것을 허락했지만, 승무원 중 한 명은 그대로 남아야 한다고 고집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예뻤던...델모니코를 선호했고, 쿡 기장은 네 명의 승무원 중 가장 잘 아는 로버타 존슨을 원했다. 그러던 와중, 트레이시 콜먼이 델모니코에게 말한다. "제가 갈게요" 콜먼은 뉴욕에 남자친구가 있어서 만나러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델모니코는 뉴욕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5개월짜리 신참을 홀로 남겨두고 내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뉴욕에 머물지 마세요." 그녀는 콜먼에게 말했다. "그는 거기 있으면 안 돼요. 나가면 체포될 거예요.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콜먼은 납치 사건 이후 TWA 스카이라이너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정말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건 아니라고 해명한다. "그냥 같이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라파엘은 85편이 덴버에 착륙함과 동시에 스테이플턴 국제공항 주기장의 조명을 모두 꺼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노련한 군인이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원치 않았다. 문제가 없을 경우에만 승객들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라파엘은 조명이 꺼지자 승객들을 하나씩 풀어주기 시작한다. 라파엘과 싸우려고 시도했던 짐 핀들리도, 아시아에서 돌아오는 TWA 승무원 주디 프로방스도, 홍콩 팬미팅을 고대했던 하파스 바자르 멤버들도 모두 비행기에서 내린다. 핀들리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홍콩에서 딸에게 주려고 구매한 할로윈 의상을 두고 내린 것을 깨닫는다. 핀들리는 그에게 비행기 뒤쪽으로 돌아가 딸에게 줄 할로윈 의상을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고, 라파엘은 정중하게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꽤나 젠틀한 남자였던 모양이다. 춥고 안개 자욱한 덴버의 날씨 속에서 해가 뜨기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은 가운데,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무표정한 FBI 요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공항 라운지에는 자다가 급하게 덴버에 도착한 FBI 요원들로 가득 찬 방이 있었는데, 그들은 39명의 승객과 3명의 승무원의 진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하퍼스 비자르 멤버들은 매니저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한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든, 어떤 일이든, 경찰서나 병원에 가기 전에라도 그들의 매니저에게 먼저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매니저가 사는 곳이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니저에게 먼저 연락했다. 연락받은 매니저는 자신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다. 모든 일간지의 기자들을 덴버 국제공항으로 끌어모은 것이다. 진술을 마치고 다른 방으로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고, 기자들은 밴드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으며, 미국 전역의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하퍼스 바자르와 인터뷰를 하려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딕 스코페톤이 BBC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경험한 최고의 홍보였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뭐....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한 후, 모든 승무원은 저녁이 되어서야 캔자스시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모든 TV 채널에서는 믿기 힘든 납치 사건에 대한 소식이 계속해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다음편에 계속.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LA에서 로마까지: TWA 85편의 기나긴 여행
[시리즈] 하이재킹 · 해병대원의 비행기 긴빠이 대작전: TWA 85 덴버에서 뉴욕까지 가는 3시간의 여정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일등석에서 총을 옆에 두고 쭉 뻗은 라파엘은 캐나디언 클럽 위스키와 진, 두 개의 작은 병으로 만든 특이한 칵테일을 따라 마셨다. TWA 85편에는 이제 다섯 명만 남았다. 쿡 기장, 부기장 웬젤 윌리엄스, 항공 기관사 로이드 홀라, 승무원 트레이시 콜먼, 그리고 라파엘 85편은 오전 늦게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착륙하여 터미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주기되었다. 덴버에서처럼 조종석에서는 최대한 적은 인원만이 비행기에 접근하도록 지시했지만..... FBI는 덴버에서와는 다르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납치범이 다른 대륙으로 도망가기 전에 그를 막아야만 했다. 100명에 가까운 FBI 특수요원들이 85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 다수는 정비사로 변장하여 비행기에 몰래 탑승하려고 시도했다. 착륙 후 몇 분 만에, 재급유가 시작되려는 순간, FBI 요원들이 비행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쿡은 조종석 창문을 통해 한 요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요원은 라파엘에게 창문 가까이 다가와 FBI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지시했다. 라파엘을 단순한 19살짜리 애송이로 바라본 FBI의 실수였다. 그는 베트남에서 2년간 싸우며 살아남은 남자였다. 미국에서는 퍼플하트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는 십자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당연히 전투중에 창문으로 다가가는게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들(FBI)가 비행기에 몰래 타려는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통로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웬젤 윌리엄스는 50년 후 BBC에 이렇게 말했다. "창가로 가면 총에 맞을 것 같았죠." 기장은 라파엘을 잘 모르지만, FBI가 바보같은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요원들에게 비행기에서 떨어지라고 경고했지만, FBI는 장갑차를 앞세워 비행기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M14 소총을 FBI에게 난사한다. 20발들이 탄창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7.62mm 소총탄 탄피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다. 총알 1발이 707기의 천장을 뚫고 비상용 산소통 옆에 박힌다. 만약 동체에 구멍이 뚫리거나 산소통이 폭발했다면 라파엘의 기나긴 여정은 여기서 끝났겠지만, 7.62×51mm 소총탄은 조종석 구석에 얌전히 쳐박혔다. 쿡은 나중에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FBI의 계획은 승무원 전원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소년과 여섯 시간 동안 함께 앉아 있었고, 그가 사실상 미친 놈에서 유머 감각이 있는 꽤 자만심이 강하고 지적인 젊은이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책임하게 그 소년을 어떻게 다룰지 스스로 결정했고, 우리가 거의 여섯 시간 동안 쌓아온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총격은 분명히 우발적이었지만, 승무원들은 다시한번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 뒤에 서있는 용감하고 무모한 사나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쿡 기장은 라파엘을 도우려고 시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라파엘 모두를 구하려고 했다. 소총이 고의로 발사되었다고 확신했던 쿡 기장은 창문 너머로 요원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재급유 없이 바로 이륙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는 국제선을 비행할 수 없다. 만약 이대로 출발해 로마에 도착한다면 기장 자신도 감옥에 갇히거나 TWA에서 쫒겨날 것이다. TWA 측에서는 라파엘과 쿡을 위해 조종사 두 명, 빌리 윌리엄스와 리처드 헤이스팅스를 JFK로 보낸다. 둘다 TWA에 입사한지 24년이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납치범을 달랠 기분이 전혀 아니었던(그들은 모두 비번이었다) 두 명의 노련한 조종사들이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라파엘은 모든 사람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조종석 안에 머물라고 명령했다. 비행기는 빠르게 이륙했고, FBI 요원들은 자신들이 어떤 바보짓을 했는지 그제서야 깨달았지만, 그들이 할수있는 것이라고는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B-707을 바라보는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JFK에서 급유를 받지 못했기에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할 만큼 충분한 연료는 없었다. 또 어딘가에 기착해 연료를 보급받아야만 했다. 비행기가 천장에 1발의 소총탄이 박힌 채로 JFK 국제공항을 떠난 지 20분이 지나자, 기내의 긴장은 다소 누그러졌다. 이는 쿡 기장이 라파엘에게 85편을 조종하고 있는 승무원들은 케네디 공항의 멍청한 FBI 요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끈질기게 설득한 덕분이었다. 연료를 다시 급유받아야했던 TWA 85편은 뉴욕에서 이륙한지 1시간만에 미국 북동부 메인주에 위치한 뱅거 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대서양을 횡단할 연료를 보충했다. 납치 사건과 뉴욕에서 벌어진 드라마틱한 총격전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흥미로웠고, 사진기자들과 방송국 기자들이 뱅거 공항 터미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찰은 기자들이 M14 소총에 피격당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기에 약 80명의 경찰관이 공항에 급파되어 기자들을 비행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놨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현장을 보기 위해 공항으로 차를 몰았지만, 터미널에서 800미터(0.8km) 떨어진 곳에 머물러야 했다. 707기 안에서 라파엘은 두 사람이 공항 터미널 꼭대기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게 FBI 저격수인지 단순한 구경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쿡은 관제탑에 "서둘러야 합니다. 그들(옥상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건물을 향해 총격을 가하겠다고 합니다." 라고 경고했고, 두 남자는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85편은 급유를 마치고 아일랜드 섀넌을 향해 이륙한다. 비행기가 공역으로 향하면서, 9시간 넘게 동고동락한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승무원들은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새로운 조종사들이 탑승하자, 쿡은 라파엘과 함께 일등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는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미 공군에서 관제사로 일했다. 쿡 역시나 라파엘처럼 조종사들을 동경했고, 마침내 1965년에 꿈에 그리던 TWA에 입사했다. 꿈을 현실로 가져오는데 성공한 사내와 현실의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엇나가버린 청년 라파엘은 쿡을 부러워했을까, 어쩌면 그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M14 소총은 일등석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승무원들은 납치범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되어 굳이 소총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미니키엘로는 쿡에게 결혼했는지 거듭 물었고, 그는 독신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고 답했다. "그게 더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습니다." 쿡은 나중에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총을 든 초조한 사람이 기혼자를 해칠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가 제게 아이가 몇 명 있냐고 물었고, 저는 하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승무원들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저는 '네, 모두 결혼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승무원 네 명 중 결혼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지만, 뭐 어떤가, 라파엘이 만족했으면 그만이었다. 트레이시 콜먼 역시 대서양을 횡단하는 도중에 라파엘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1950년대에 생산된 비행기 내부에 VOD가 있을ㅇ리 엏었고, 라파엘은 그녀에게 솔리테어를 포함한 카드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콜먼은 라파엘이 "아주 편한 사람" 이었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아마 그의 잘생긴 외모가 꽤나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는 콜먼에게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냥 이탈리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뱅거에서 아일랜드 서해안에 위치한 섀넌까지 6시간 동안 비행하는 도중에 그녀는 잠깐 잠을 잤다. 85편은 섀넌에서 한밤중에 다시 연료를 보급받았다. 기내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무 긴장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웬젤 윌리엄스는 회상했다. 기내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볼티모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첫 비행에 남아 있던 컵케이크 몇 개뿐이었다. 윌리엄스는 인터뷰에서 "음식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제 등 뒤에 그가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다른 문제는 거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85편이 아일랜드 상공에 도착하면서 시간대가 넘어갔고, 10월 31일이 11월 1일로 바뀌었을 때, 라파엘은 마침내 20살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20살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일랜드에 착륙한 지 30분 후, 85편은 이륙하여 여행의 막바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1969년 11월 1일 아침, TWA 85편은 마침내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라파엘은 이때까지 덴버와 뉴욕에서 했던 것처럼 비행기를 터미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기시키고 비무장한 경찰관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하이재킹이 캘리포니아 중부 상공에서 시작된지 18시간 30분만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윌리엄스 부기장의 말에 따르면, 707기가 로마에 착륙하는 몇 분 동안 라파엘은 착륙 후 승무원들을 호텔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승무원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려고 했던 예비 살인자이자 PTSD 환자와는 더이상 겸상하기 싫었을 것이다. 라파엘는 또한 기회가 있었을 때 자신의 M14 소총을 승무원들이 훔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들이 처벌받을까 두려워했다. "정말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라파엘이 쿡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쿡은 라파엘을 끝까지 위로해준다. 조종사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라파엘이 불쌍해서였을까, 어쩌면 앳된 그의 모습에서 동정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하게 쿡의 머리통을 M14 소총으로 한번에 날려버리지 않아서 고마워했을 수도 있다. 오전 5시가 조금 지난 시점, 공항에서 보낸 알파 로메오 한 대가 TWA 85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안에는 납치범을 만나겠다고 자원했던 세관원 피에트로 굴리가 타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치켜든 채로 비행기 계단을 올라갔고, 라파엘은 그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 돈." 납치범은 떠나면서 쿡에게 말했다. "이런 번거로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라파엘은 나중에 쿡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려고 캔자스시티에 있는 쿡의 주소를 적어 두었다. 그리고 라파엘과 피에르토는 대기하고 있던 알파로메오를 향해 내려갔다. 부기장 웬젤 윌리엄스의 말에 따르면, 그제서야 비행기에 타고있던 인질 6명은 "완전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 그들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인질들 모두는 라파엘이 부디 나폴리에 입원해 있는 그의 아버지를 볼수있기를 바랬다. 로스앤젤레스, 덴버, 뉴욕, 뱅거, 섀넌, 그리고 로마를 거쳐 이제 남은 목적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나폴리로 데려다줘." 라파엘은 피에트로 굴리에게 명령했다. 그는 단지 아버지가 보고싶을 뿐이었다. 경찰차 네 대가 알파 로메오를 따라왔고, 경찰관들의 목소리가 인질의 무전기에서 지직거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라파엘은 무전기를 끄고 인질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줬다. 로마 중심부에서 약 6마일 떨어진 시골에서, 알파 로메오는 추격하는 경찰차들을 어떻게든 피해 점점 좁아지는 골목길을 달렸다.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두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남은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은 공황 상태에 빠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TWA 85편이 LA에서 이륙한지 23시간이 지나서야 라파엘의 여정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로마 근교에서 5시간 넘게 수백 명의 경찰관들이 탐지견과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납치범을 추적했지만, 결국 그를 발견한건 한 교회의 신부였다. 11월 1일 토요일은 만성절이었고, 성당은 아침 미사를 보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잘 차려입은 신자들 사이에서 조끼와 속바지를 입은 한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라파엘은 군복을 벗고 총을 헛간에 숨겨둔 후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제 유명해졌고, 부주임 신부인 돈 파스콸레 실라도 그를 알아보았다. 경찰이 마침내 라파엘을 교회 밖에서 포위했을 때, 라파엘은 그가 사랑하는 이탈리아 동포들이 자신을 구금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근데 시발 비행기를 훔쳐놓고 안잡힐거라 생각하는게 말이 되냐 " Paisà, perchè m'arresti? " "파이사(동포)여, 왜 나를 체포하는가?" 그가 경찰에게 체포되며 남긴 말이었다. 여담으로, 라파엘의 아버지인 루이지 미니키엘로는 라파엘이 비행기를 훔쳐 자신을 보러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병원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전쟁이 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겁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제정신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다음에 라파엘을 만나면 귀를 잘라버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선량한 시민보다는 비행기를 훔친 테러리스트에 가까웠지만, 라파엘은 이탈리아에서 만인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언론들에 의해 비행기 승객들을 총으로 위협한 범죄자가 아니라, 위대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싶었던 씩씩한 이탈리아 소년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재판을 받았는데, 미국은 길길이 날뛰며 라파엘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이탈리아는 깔끔하게 미국의 요청을 씹었다. 아마 송환했다면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을 것이다. 재판에서 그의 변호사 주세페 소트기우는 라파엘로를 무의미한 베트남 전쟁의 희생자, 불쌍한 이탈리아 젊은이로 묘사했다. "이탈리아 판사들은 전투기와 폭력으로 이루어진 문명, 이 불쌍한 청년을 범법자로 만든 문명에서 비롯된 행위를 이해하고 용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이탈리아 영공에서 저지른 범죄 혐의로만 기소되어 7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탈리아 국민들이 그를 위한 팬클럽까지 만들어준 덕분에 항소심에서 형량이 감형되어 사건 1년 6개월만인 1971년 5월 1일에 석방되었다. 갈색 정장을 입은 21세의 그는 바티칸 근처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나와 수많은 카메라맨들을 마주했다. 기자가 "당신이 한 짓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왜 미안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이탈리아 대중들은 여전히 라파엘을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했고, 소녀들은 그의 뛰어난 미모에 매료되었다. 한 소녀는 그가 줄리아노 젬마보다 잘생겼다고 말했는데... 그건 아닌거같다. 비빌걸 비벼야지 시발 하지만 그 후로도 라파엘의 인생은 잘 풀리지 않았다. 누드 모델 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를 영화배우로 만들겠다는 영화 제작자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후, 라파엘은 로마에 정착하여 바텐더로 일했다. 한때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했다. 바 주인의 딸인 친치아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고, 장인어른의 가게를 물려받아 '하이재킹'이라는 이름의 피자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사건으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980년 11월 23일, 규모 6.9의 지진이 이탈리아 남부를 강타했다. 진앙지는 1962년에 일어난 지진의 진앙에서 불과 32km(20마일) 떨어져 있었다. 이번 지진은 70년 만에 이탈리아를 강타한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4,690명이 사망하고 2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어 이르피니아 지역 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대규모로 모여들어 구호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라파엘레 미니키엘로도 있었다. 당시 31세였던 그는 아직 로마에 살고 있었지만, 구호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단 2주 만에 300마일(약 480km)이나 되는 거리를 세 번이나 자동차로 왕복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비행기를 납치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르피니아의 지진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고, 제 모든 고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병대 시절부터 형성된 권위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상태였다. "저는 기관을 신뢰하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직 라파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985년 2월, 라파엘의 아내 친치아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진통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그녀와 갓 태어난 아들은 의사의 의료 과실로 인해 사망했다. 분노한 라파엘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로마 외곽에서 개최되는 유명 의학 학회를 표적으로 선정한 그는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의사들을 총기난사로 죽여버리려고 시도했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라파엘은 토니라는 한 전도사와 친해진다. 라파엘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복수극을 포기한다. 그리고 1999년, 라파엘은 미국으로 향했다. 바로 TWA 85편에 탑승한 사람들을 찾아서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8월, 85편에서 총을 든 라파엘과 처음 마주쳤던 샤를렌 델모니코는 1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그녀는 2000년에 TWA에서 퇴직했고, 미국의 최대 항공사였던 펜암이 1991년에 파산한데 이어 북미 제 2의 항공사이자 그녀가 수십년간 몸담았던 TWA(트랜스 월드 항공)은 2001년에 파산했다. TWA는 US항공에 인수되었고, 전체 직원들의 27%에 불과한 5,000여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해고되었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라파엘과 그의 옛 소대원들이 초대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델모니코는 집에서 남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미주리주 브랜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85편의 부기장인 웬젤 윌리엄스를 만났는데, 그는 라파엘의 만남을 수락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로이드 홀라 항공기관사, 트레이시 콜먼을 포함한 승무원들, 하퍼스 바자르 멤버들, 그리고 도널드 쿡 기장조차 라파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는 일등석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믿었던 라파엘에게는 꽤나 깊은 상처로 다가왔다. 델모니코와 윌리엄스가 떠나기 전에 그는 두 사람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건넸다.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험에 빠뜨린 행동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생을 바꾼 이 책을 받아주세요. 라파엘레 미니키엘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많은 축복을 주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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