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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어떻게 당선되었나: 87년 항쟁과 중산층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를 꼽자면 1987년이 될 것이다. 1987년은 1월 박종철 열사 사망, 4월 호헌선언, 6월 항쟁, 8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12월 노태우 당선으로 민주주의 혁명의 기-승-전-결이 모두 이루어진 역동의 해였다. 87년 6월 항쟁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꽃이며, 500만의 민중이 함께한 인류사에서도 찾기 힘든 수준의 시민혁명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명이 결과적으로 민주정의당 정권의 재창출 - 즉 노태우 당선으로 귀결되었음은 아이러닉한 일이다. 그렇게 힘들게 항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것은 전두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양김(삼김)의 분열로 인한 노태우의 어부지리" 등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게으른 분석이다. 대안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태우의 당선은 사실 87년 항쟁의 결과이자, 필연이었으며, 87년 6월 항쟁의 성격 그 자체를 정의내리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태우의 당선과 뒤이은 삼당합당은 우연이 아니라 철저하게 87년 항쟁의 결과로서 정리되어야한다.1987년 항쟁의 성격1987년 항쟁을 단순히 "민주주의 항쟁"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자. 물론 대중적으로 87년 항쟁은 위대한 시민민주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87년 항쟁에 참여한 500만 주체는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민주항쟁으로만 규정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우선 재야세력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김영함, 김수환, 함세웅, 김영남, 문익환과 같은 사람들이 통틀어 재야 야권 인사로 칭해졌다. 이들은 분명하게도 시위 주도 세력이었으며, 목표는 전두환 군부정권을 무너트리고 서구식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대중적으로는 여기까지만 알려져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당대 대학생들의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정의 수립이었다. 즉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한열과 박종철 역시 공산주의자였다. 극우 세력의 악선전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이한열과 박종철이 투철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믿을 수 없다면 민주화 자료 아카이브에 올라와있는 이한열의 공산주의 서적 플로우차트를 보시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CDR파는 1987년 정국을 거치며 소멸되고,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한 PD파, 그리고 북한 노동당과의 연방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NL파가 당시 대학생 운동권의 주도 세력이었다.그리고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의 목표는 민주노조 수립이다. 196-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급속한 경제개발 정책은 750만의 지방민을 서울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노동여건은 참담했고, 유일한 노조였던 한국노총은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1970년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하여 "노조다운 노조"를 만들자는 일념 하에 1977년 노동교실 사수투쟁, 1976~78년 동일방직 노조투쟁, 1979년 YH항쟁과 같은 "민주노조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탄압으로 외면상 민주노조 설립 운동이 중단되었으나 실제로는 김문수를 주도로 하여 인천과 성남, 울산 등의 지역에서 수십개의 민주노조가 설립되었다 해체되고를 반복했다.또 중요한것은 이 당시 상경한 노동자 절대다수가 호남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5.18 광주 항쟁의 진실에도 민감히 반응했다.철거민도 항쟁에서 중요한 주체였다. 전두환 정권은 88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미관을 이유로 빈민가를 빠르게 철거하고자 했고 이는 철거민들의 극렬한 반발을 샀다. 82년 목동 철거민 투쟁과 86년 상계동 철거민 투쟁이 특히 유명하며, 그중에서 상계동 투쟁은 87년 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상계동 철거민들은 정부의 보상과 대책을 요구하며 명동성당 앞에서 움막을 짓고 농성을 벌였다.정리하자면 87년 항쟁에 참여한 주요 주체들은 서로 다른 목적과 배경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보상과 주거권을 요구한 도시 빈민, 민주노조 설립을 목적으로 한 노동자들, 공산주의 혁명이 목표였던 대학생 운동권 그룹,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지한 재야 세력 등, 당시 민주화 연합에 참여했던 항쟁 주체들은 "동상이몽" 그 자체였다. 그렇게나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전두환 타도" 다섯글자였다.왜 1987년이었나?그렇다면, 왜 이런 항쟁 주체들이 하필 1987년 6월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폭발해 혁명을 가능케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산층이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러 주체를 연결해, 500만이 참여하는 전민적인 항쟁으로 6.10의 성격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영화 <1987>에 보면 항쟁에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등장인물은 김태리가 역을 맡은 연희라는 가공의 캐릭터이다. 연희는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 유일하게 가공인물이며, 동시에 "일반적인 시민"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또 주목할만한 점은 연희가 당대 서울 중산층의 매우 보편적인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 가족을 두고 여유롭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자라서 서울의 대학교에 다니면서, 전두환 정권의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도 큰 관심이 없는 그런 성격이다.이러한 성격의 인물은 당대 한국에서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5개년 경제계획은 경공업 중심이었던 한국의 경제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는 유의미한 가정경제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시기 때만 하더라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수입품 억제로 인한 저소비 경향으로 삶의 질은 풍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시기에 접어들며 삼저호황으로 경기 성장이 다시 호전세로 접어들었으며, 수도권의 중산층은 안정적인 경제적 축적과 강남 아파트로 대표되는 안정적 거주로 인하여 도시 중산층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어느때나 그렇다시피 중산층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급격한 사회 혼란은 원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군부정권보다 더 두려워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보다 내 집에 강도가 들지 않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정권의 "안보/안전 이데올로기"는 초기 중산층에게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1981년 제11대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현재의 서초구, 강남구를 포괄하는 서울시 제11번 선거구에서 35.92%를 득표했는데 이는 서울 14개 선거구 중 4번째로 높은 수치였다.1986년 건국대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중산층들이 가장 민감한 안보 이슈를 건드렸다. 이른바 평화의 댐 사건으로, 북한에서 댐을 지어 서울 시내를 수몰시킨다는 어처구니 없는 촌극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중산층이 건국대 사건보다도 평화의 댐 사건에 더 민감히 반응해 학생운동을 거의 무력화시킬 정도까지 갔다는 점이다.1985년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대참패를 당해 전두환 정권이 휘청이는 수준까지 갔음에도 정권이 섣불리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 즉 전두환 정권을 그다지 지지하지는 않지만 공산주의와 급진적 변혁에 더 두려움을 갖고 있는 중산층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학생, 노동자, 철거민, 재야 세력 대 전두환-민정당-안기부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여전히 전두환이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앞서 말했다시피 평화의 댐 사건 등은 중산층이 사회 주류 세력인 민정당 보수세력을 마지못해 지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이한열과 박종철의 죽음은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다시 영화로 돌아가, 그렇다면 "안락한 삶"에 의존하고 있던 중산층 캐릭터 연희가 항쟁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실제 1987년 1월 박종철의 충격적인 죽음은 중산층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으며, 1987년 4월의 호헌선언과 1987년 6월 이한열 사망 사건 등은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민주화 연합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무리 대학생들의 급진적인 요구가 못미더울지언정, 그것이 학생을 죽일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합리적인 공감대가 당시 전국의 중산층에게 존재했다는 것이다.다시 말하자면, "내 아들/형/연인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것"은 중산층이 지지하던 안전, 안심, 안보의 지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무도함이 선을 넘어 일반 가정까지 침입할 수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산층이 항쟁에 참여함으로서 민주화연합 대 독재정권의 균형추는 민주화연합으로 기울었고, 항쟁은 비로서 전민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다.1987년 6월부터 12월까지이제 12월 대통령 선거로 넘어가자. 1987년 12월 대선에서 중산층은 명확히 노태우와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산층 밀집 거주지였던 강남구에서 1위를 한 것은 김영삼으로, 35.3%를 득표했다. 2위는 노태우로 32.4%였다. 김대중은 25.2%로 3위였다. 김대중이 서울 전체에서 1위를 한 것을 감안하면 강남구의 결과는 특이하다. 특히 강남구와 마찬가지로 중산층 밀집지역인 강동구를 제외하면 김대중이 모든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이 특이하다.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블루칼라 유권자들의 33.7%가 김대중을 지지했지만 화이트칼라에서는 24.4%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화이트칼라는 모든 직업군 중 가장 김대중 지지율이 낮은 군이었다. 생활수준으로 따지면 중상류층에서 김대중은 23.9%를 차지하는데 그쳤고 중산층에서도 27.3%로 평균 이하였다.당시 한국갤럽의 회장을 지낸 박무익은 이렇게 평가를 내렸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우리 사회에 보수온건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65%쯤 될 것인데, 이것은 노태우, 김영삼 후보의 공동표밭이기도 했다. 그 동안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영향을 양김씨는 과소평가한 것 같다. (후략, 1987년 12월 한국갤럽)."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987년 항쟁의 주체였던 중산층이 노태우와 김영삼을 지지했다는 것, 둘째, 이들 중산층에게 있어 김영삼-노태우의 간극보다 김영삼-김대중의 간극이 더 컸다는것(즉 김대중을 결코 지지할 수 없었다는 것).6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항쟁의 주체가 노태우를 지지하게 된 것일까?우선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6.29 선언이 있고나서 일주일도 있지 않아 울산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의 울산 노동자들이 옥교동에서 민주노조를 설립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불과 11일만에 민주노조 운동은 현대 계열사 노동자 전원이 참가한 울산 지역의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다. 8월 11일 시위 도중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슴에 수류탄을 맞아 사망한 사건으로 인하여 8월 중순에는 부평, 성남, 울산, 창원 등 전국 각지 공단 지역에서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들불번지듯 일어났다. 당시 노동쟁의는 하루 평균 44건에 달했다.학생운동도 격화되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즉 전대협이 1987년 8월 19일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고려대학교 학생회장 이인영이었고 부위원장은 연세대학교 학생회장 우상호였다. 당시 이인영과 우상호의 위상은 거의 야당대표 급이었다. 운동권 내 각 정파들의 정치적 운동도 강화되었다. PD파는 부르주아 혁명(6.10)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이 찾아올 것이라며 가열찬 시위를 벌였고, NL파는 전두환 정권 퇴진과 함께 예속적인 식민지 정권을 타도한 후, 주한미군을 즉각 철거하고 조선노동당 정권과 대등한 연방제 통일을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있었다.이때 우리는 6.10에 참여한 중산층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첫째, 중산층은 반공 통치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둘째, 이한열과 박종철이 불쌍해서, 전두환 정권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셋째, 막상 전두환 정권을 무너트리고 보니 길거리에는 학생들이 사회주의 대혁명을 외치며 뛰어다니고 있고, 주체사상 서적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고,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이병철, 정주영을 땅에 묻어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또 항쟁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인 주체였던 중산층은 전두환 퇴진에는 동의했을 지언정 민주노조 설립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이라는 의제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앞서 말했다시피 중산층의 주된 관심사는 경제적 안정과 군사적 안보이다. 전두환 정권이 일반 민중의 삶을 위협할정도로(이한열, 박종철 사건) 선을 넘었기에 그들은 87년 항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6월 29일 이후에 선을 넘은 것은 전두환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였던 노동자와 학생, 철거민이 되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6월 29일을 기점으로 빠르게 혁명 대오에서 이탈하였다. 한마디로 혼란이 아닌 안정을 택한 것이다.노태우, 안정의 후보더 재밌는건 노태우를 좋아서 찍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다. 콘크리트라고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노태우는 안정의 후보로, 김대중은 혼란의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 중간의 김영삼은 군정종식이라는 슬로건에 치중하며 수권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노태우는 명확하게 군부의 후보였다. 그런데 그 점이 이점이었다. 당시 재야세력은 물론 민주화연합의 모든 주체들이 군부 자체가 아닌 군부의 "경제개발"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과소평가했다.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뽑는게 맞지만, 그래도 경제는 민주정의당과 군부세력이 하는게 낫다는 서민-중산층 내에서의 여론이 상당히 강했다는 것이다.갤럽의 조사에서 노태우는 서민성, 국제감각, 결단력, 정직성, 합리성 등등 12개 항목중 국제감각을 제외한 11개 항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고, 후보 호감도 면에서도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을 압도했다. 호감도가 가장 낮은 후보는 김대중으로 호감도가 27.4%에 그쳤는데, 김대중의 최종 득표율은 27.0%로 거의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선거기간 유세 내내 평화민주당은 노태우를 광주학살의 원흉, 살인마, 12.12 군사반란 주모자 등으로 비판했지만 실제로 노태우에 대한 대중의 선호도는 선거기간 내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 지지자들은 갤럽의 조사에서 새 대통령이 해야할 과제로 가장 우선 경제문제 해결(42.7%)을 꼽았다. 국민 기본권 신장은 24%에 그쳤는데, 이는 36.6%에 달했던 노태우의 지지층이 기본적으로 민주화의 의제 이후의 문제였던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 중산층~서민층이었고 이에 따라 군부정권이 못미더워도 노태우에 표를 던졌다는 뜻이 된다. 특히, 선거 막판에 25%에 달하는 정치적 무관심자 중 약 70% 가까이가 노태우로 결집했음이 여론조사에서 확인되었다.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의 슬로건은 크게 두가지였다. "보통사람"과 "이제는 안정입니다"가 그것이다. 대단히 의도된 슬로건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중산층이며, 또 당선되면 이제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줄 "보통 사람들의 후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은 안정을 원했으므로...김대중에 대한 거부반대로 김대중에 대한 당대 중산층과 주류세력의 거부는 매우 명확했다. 사실, 김대중과 김영삼 지지층의 간극은 김영삼 지지층과 노태우 지지층의 간극보다 더욱 컸다. 한국갤럽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사퇴할 경우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이냐고 물었다. 김대중이 사퇴할 경우, 김대중 지지층의 반수(49.4%) 가까이가 김영삼을 지지하겠다고 응답했고, 노태우 지지 응답은 17.2%에 불과했다. 반면 김영삼이 사퇴한다면 누구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에서 김영삼 지지층은 겨우 26.1%만이 김대중을 고른 반면, 노태우는 32.5%, 김종필은 10.9%에 달했다.이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양김 중 한쪽이 사퇴할 경우 김영삼 대 노태우는 김영삼 44.20% 대 노태우 44.09%로 김영삼의 간발의 승리지만 김대중 대 노태우는 김대중 42.70% 대 노태우 45.59%로 노태우의 신승이다. (김종필 사퇴 시, 노태우 39.19%, 김대중 33.44%, 김영삼 29.80%로 노태우의 낙승이다) 민주정의당의 내부 조사에서도 김영삼 - 노태우의 양자대결은 노태우의 아슬아슬한 승리지만, 김대중 - 노태우 양자대결은 노태우의 압승이었다. 그만큼 김영삼 지지층 사이에서 김대중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이 있었다는 뜻이다.주목할만한 것은 김영삼의 주 지지층이 도시 중산층이었다는 점이다. 김영삼은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에서 1위를 한 것은 물론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도 대학교 졸업자 이상(47.0%), 화이트칼라(45.4%), 중상류층(38.5%)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다. 다른말로 하자면 당시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김대중을 "급진적 변혁의 후보" 혹은 "공산주의자"로 보고 거부하는 여론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이것이 사실상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지지자들은 김대중을 찍을 바에는 차라리 노태우를 지지할 정도로 변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중산층이었다.물론 김대중 본인은 사회주의자가 전혀 아니었고, 도리어 보수적 자유주의자였지만, 당대 사회에 알려진 김대중의 이미지는 급진적 투사 혹은 공산주의자였다. 반면 김영삼은 두차례 가택연금을 당했을 지언정 투사의 이미지는 아니었고, 보다 온건한 보수파의 이미지에 가까웠다(실제로도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의 후계자이고, 김영삼은 구파인 조병옥의 후계자이므로 얼추 맞는 감은 있다). 항쟁에 완전히 반대하는 시민들은 노태우를, 항쟁에 참여했지만 급진적인 노동쟁의나 학생운동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김영삼을, 그리고 항쟁과 급진적 변혁에 모두 동의하는 시민들은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으로 점차 유권자 그룹이 갈리는 현상이 1987년 연말에 나타났다.그런데 상술했다시피 1987년 6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와중에, 사회의 관심사는 민주화를 벗어나 혁명 이후의 급진적 변혁이냐 아니냐로 변화하고 있었다. 급진적 변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노태우 - 김영삼을 지지했고, 찬성하는 시민들은 김대중을 지지했다. 6월과 12월에는 반년의 시간 격차가 있고 이는 당대 사회의 쟁점을 바꿔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만큼 보수파가 노태우와 김영삼으로, 진보파가 김대중으로 갈리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의 유권자 이념 차는 생각보다 컸고, 김영삼과 노태우 사이의 이념 차는 생각보다 작았다고 볼 수 있다.선거를 며칠 앞두고 PK 지역을 중심으로 김영삼 지지자들의 큰 이반이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노태우에 표를 몰아주자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측은 내심 부산에서 80%대, 경남에서 60%대의 압승을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부산에서 김영삼 56% 대 노태우 30%, 경남에서 김영삼 52% 대 노태우 41%로 예상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경북 지역에서도 20% 정도는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6%가 노태우를, 9%가 김영삼을 지지했다. 이러한 이반은 김종필 지지자 내부에서도 존재했는데, 김종필은 10월 15%에 달하는 지지를 받았으나 최종 득표율은 8%에 그쳤다.삼당합당도 이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대중은 차마 찍을 수 없는, 안정을 바라는 온건보수 유권자들이 민주자유당이라는 연합 하에 뭉쳤다는 것이다. 14대 대선 결과를 분석해보면 강남구 전체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27.65%를 득표했다. 반면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표인 74.73%는 1992년 대선에서도 김영삼+정주영+박찬종의 71.24%로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계산을 해보면 대략 3~4% 정도의 유권자만이 삼당합당에 반발해 김대중으로 지지를 옮겼다는 뜻이 되는데, 그만큼이나 삼당합당이 1992년 시점에서는 중산층에게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중산층의 민심 이반을 겨냥한 민정당의 전략민정당의 전략은 치밀했다. 중산층이 "경제적 안정"과 "급진적 변혁 반대"를 위해 노태우로 결집하는 것을 주목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을 갈라치기하는 한편 김대중을 급진적 변혁의 후보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악선전을 한 것이다. 당시 MBC의 공정방송위원회가 제시한 증거는 이렇다:12월 12일 뉴스데스크가 노태우 서울집회, 김영삼 부산집회, 김대중 김천집회를 보도하며 노태우 4분 20초, 김영삼 2분 25초, 김대중 2분 28초로 확연히 노태우를 더 스크린에 많이 비추어 노태우를 "대세 후보"인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 또한 통상 MBC는 유세장 인파 수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12일 민정당 유세는 200만이 운집했다고 과장되게 명시했다.12월 5일 민주정의당 부산유세에서 관중동원과정의 자금살포 현장을 부산 MBC가 촬영해 전송했음에도 보도되지 않았다(게이트 키핑).12월 7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선거유세 이래도 좋은가]는 김대중-김영삼의 상호 비방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김영삼 측이 노태우를 비방하는 것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으며, 김영삼이 김대중을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주로 보도해, 사실상 김영삼의 주 지지층이었던 중산층을 자극하는 의도가 있었다.12월 13일 아침에 방영된 [민중민주주의를 분석한다]는 김대중과 당대 사회주의 운동권 경향이었던 민중민주주의[PD]를 연관지어 사실상 김대중을 급진 마르크스주의 후보로 보이도록 유도하였다. 선거 직전 민중민주파의 지지를 받은 백기완 후보가 급작스레 사퇴한 것은 마치 민중민주파가 김대중을 지지하기 위해 사퇴한것처럼 비추어지며 오히려 김대중의 지지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되었다.결정적으로 11월 29일 KAL기 실종 사건은 중산층의 주요 관심 사안이었던 안보 이슈를 자극했으며, "안정희구" 세력이 많은 중산층-중상류층 부동표를 여권으로 유도시키는 의도가 있었다.결론이 글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987년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목표와 배경을 가진 변혁의 주체들이 중산층이라는 지원군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산층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의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었고, 그들이 항쟁에 참여한 것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사망으로 전두환 정권이 더이상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세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6월 29일 이후, 급진적 변혁을 주장하는 노동자 학생 세력과 결별해 오히려 구 체제를 옹호하였는데 이 역시 안정과 번영을 지지하는 중산층의 보편적 성격에 의함이다. 이들은 주로 김영삼과 노태우를 지지했고 따라서 김영삼은 근본적으로 김대중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고, 단일화가 불가능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결국 노동자, 빈민, 재야의 후보를 자처한 김대중이 참패하고, 김영삼이 노태우와 연합하면서 삼당합당을 통해 "주류 중산층 온건보수 세력" 대 "비주류 야당 세력"의 구도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즉, 1987년 대선과 1990년 삼당합당은 1987년 항쟁 이후의 급진적 변혁을 저지하기 위한 중산층 온건보수 세력의 철저한 노력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초점이 군부 타도에서 변혁 저지로 옮겨온 시점에서 김영삼-김대중 단일화는 불가했고, 오히려 김영삼은 노태우와 성격이 비슷한 면까지도 있었다.때문에 김대중은 1991년 지방선거, 1992년 총선, 1992년 대선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봤고, 당시 한국 야권과 변혁 세력은 고립되어 각개격파될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다행인 것은 김대중이 평범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영국 유학과 아태재단 설립, 보수 성향 인물 영입 등 부단히 중도화에 노력해 투쟁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빼고, 정책 제시자이자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1997년 대선 때는 IMF 사태를 노리고 아예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1987년 대선 패배가 중산층의 노태우 지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김대중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산층을 민주당 지지자로 돌려놓기 위한 김대중의 노력은 가히 존경스러운 수준이다. 그런 모든 노력에도 김대중은 겨우 1.3%p 차이로 199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다른 한편으로, 87년 항쟁에서 "주류 중산층 보수파"의 승리로 인하여, 진정한 혁명의 주체였던 노동자, 빈민, 학생운동 세력은 대부분 고립되어 현재는 아무도 기억을 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다. 사실 87년 항쟁의 공은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변혁적 대학생과 민주노조 설립운동가들 그리고 도시 철거민들에게 돌아가야함에도 말이다.
작성자 : 천대녀프리렌고정닉
[스압] 브로큰 연대기 23화- 바비 래쉴리
[지난화 다시보기]
"단 한번의 킥, 그리고 3카운트.. 그렇게 제 인생은 달라졌죠."
"2011년 10월, 저는 제 인생의 첫번째 월드 챔피언에 올랐습니다."-그 후 5년동안 전 단 한번도 1 ON 1으로 챔피언쉽을 가져보지 못했죠-날 믿은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전 연연하지 않았습니다.-욕심이 없었으니깐요. 전 부정하지 않았어요.
-이 TNA엔 '경이로운 자' AJ 스타일스가 있었고-'사모안 서브미션 머신' 사모아 조가 있었으며-그리고 나의 형제 바비 루드가 있었으니깐요.
-그들은 이 TNA가 자랑하는 오리지널이자 이 업계의 '진짜'이자-진정한 TNA의 월드 헤비급 챔피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월드 타이틀급의 선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이 업계를 뒤흔드는 슈퍼스타는 더더욱 아닙니다.-제가 자격이 있든 없든 저에게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었으니까요.
-저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절 믿어준 팬들이었습니다.-레슬러에게 팬의 존재는 축복과도 같지요.-그들의 환호와 열정과 경기장에 강렬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열기는-저를 지난 20년간 이 바닥에 몸담게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생 일대의 기회가 왔습니다"
-전 지금 지난 20년간의 레슬링 인생중 가장 좋은 몸상태입니다.-매일 아침에 일어나, 곧장 체육관으로 향해 운동을 하고-끊임없이 저를 단련하고 단련해 왔습니다.
"흠... 모르겠어요.. 제게 다음 기회가 찾아 올지...."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제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습니다.-이 바닥에 20년을 몸담았고, 그 중 14년은 TNA에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어냈고, 많은 것을 받은 나날들이었습니다.-그 이상의 행복은 없었기에, 전 저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한 맘으로-현재에 만족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다릅니다.-내 자신, 내 자신의 행복,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닌
-나의 첫 순간부터 나를 지켜봐주고 믿어주었던-이 아무것도 아닌 테네시 촌놈이 '월드 챔피언감'이라고 믿어준-나의 사람들을 위해.....!
"전 다시 한번 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을 쟁취할겁니다!"
TNA의 마지막 대들보, 카우보이 제임스 스톰그의 말대로 그는 내노라하는 대단한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의 TNA를 만들었으며, TNA가 그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 백전노장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도전에 이 날의 에피소드는제임스 스톰의 지난 영광의 순간을 재조명하며,지난 그의 14년의 헌신을 헌정하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됐다.
백스테이지, 쇼의 운영에 얘기를 나누던 빌리 코건과 딕시 발년의 앞에X-디비전 챔피언이자 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 래쉴리가 나타난다.
-와우, 이게 누구신가?! TNA의 '권력자'들이 납시었네?!
-여긴 회장님이시고, 여기는 전설의 락스타시군-당신들의 그 대단한 영감에 아주 박수가 절로 나왔어
-대단한 영감? 이봐요 바비!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죠?
-몰라서 물어!!? 오늘 하루 종일 틀어진 저 제임스 스톰의 영상말이야!!-오늘 저 망할 테네시 촌놈을 헌정하는 기념일이라도 되는거야?
-이 회사의 얼굴은 난데 왜 오늘의 주인공은 저 제임스 스톰이지?
-왜 그랬을까? 맞춰볼까? 그의 인생사는 파란만장하고-그는 이 회사의 첫 시작부터 함꼐한 TNA의 오리지널이니까.. 맞지?
래쉴리는 오늘 쇼의 중심이 정점인 자신의 3관 챔피언 도전이 아닌'카우보이' 제임스 스톰에게 포커스를 준것에 큰 불만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자신이 스톰과 같은 TNA 오리지널이 아닌것에자신을 철저히 소외하고 차별한것이라 여기며 큰 모욕감을 느낀것이다.
이에 보다 못한 빌리 코건이 직접 나서보는데..
-바비, 당신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 회사의 개국공신입니다. -지금의 TNA를 위해 헌신한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래?! 그게 바로 TNA를 지배하는 권력자의 선택인가? 대단하군?!-너의 그 멍청한 생각과 쓰레기같은 주둥이로 나불대는 말 한마디가 -이 회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내비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거 아나?-봐! 난 X-디비전 챔피언이자, 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이야
-그리고 오늘 밤, 난 세번째 황금을 손에 쥐게 될거야...-이 TNA에서 유일무이한 3개의 타이틀을 쥔 남자게 될것이라고..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나 역시 '힘'을 가지게 된다는거야....."권력자들의 차별과 적개심에 분개한 이 남자하지만, 권력의 힘이란 그 무엇보다 강하고 무서운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그들과 동등한 힘을 가져야만 했다.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은 오직 단 하나...'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TNA의 모든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는 것'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불가결의 존재에 오르는 것만이 그가 권력자들에 맞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메인 이벤트TNA X-디비전 타이틀, 킹 오브 더 마운틴 타이틀 그리고TNA 월드 헤비급 타이틀이 걸린 'TNA 3관 챔피언쉽'이 시작됐다!
뜨거운 열기 속, 도전자 제임스 스톰의 선수소개가 시작되던 그 때...!
난데없이 래쉴리가 카우보이를 기습한다!!!
선수소개 순간에 일어난 돌발상황! 놀란 심판은 황급히 래쉴리를 저지,이어 당황한 링아나운서 JB를 진정시키고 링 밖으로 내보내던 그 떄....!
제임스 스톰의 '라스트 콜'이 래쉴리의 턱에 작렬된다!!??!!하지만, JB를 신경쓰느라 미쳐보지 못하는 레프리!! 결국 뒤늦게 브라이언 헤브너가 카운트 해보지만래쉴리가 2카운트에서 가까스로 킥아웃한다!!빠르게 카운트를 하지 않은 브라이언 헤브너에게 신경질적으로 크게 항의하는 '카우보이' 제임스 스톰
그럴 수 밖에 없었다. 5년 전 첫 타이틀 획득때와 같은 상황이었고단 한번의 킥으로 TNA 역사상 최강의 괴물이라 불리던 래쉴리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그 아쉬움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하지만, 초장부터 터진 라스트 콜의 효과는 만점이었다.예상치 못한 일격에 래쉴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제임스 스톰의 파상공세는 계속됐다.
하지만, 상대는 'TNA 역사상 최강의 남자'였다.단 한번의 립프로그와 단 한번의 슬램으로 경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래쉴리
경기의 흐름은 이제 '디스트로이어'의 것이 되었다.코너에 몰린 스톰의 복부에 '도미네이트 숄더 슬러스터' 그리고
그의 무지막지한 파워를 상징하는 '딜레이드 버티컬 슈플렉스'까지터지며, 경기의 승기는 완전한 바비 래쉴리의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완벽한 승기를, 승리의 결실로 끝맺음을 준비하는 래쉴리
그렇게 작렬되는 그의 스피어... 하지만...!!이를 피하는 제임스 스톰의 전광석화 같은 슬링 블레이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카우보이의 진정한 반격이 시작됐지만그것도 잠시, 래쉴리의 바디 스플래쉬에 당하고 만다.
그리고 또 한번의 끝을 준비하며 래쉴리의 '빅 라이트 핸드'가 작렬...!하지만, 이를 킥으로 막고선 백 스태버로 반격하는 제임스 스톰!!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 오브 스톰'!! 강한 승리의 예감이었을까?!!
임팩트 존의 모든 관중들이 기립한채 함께 카운트를 외친다!
그러나, 3카운트 바로 직전 킥아웃하는 래쉴리!!탄식과 아쉬움이 가득찬 임팩트 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관중들은 느끼기 시작했다.'뭔가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아주 강한 예감'을 말이다..!
계속되는 치열한 공방 속, 코너에서 오코너롤을 시도하는 카우보이
그런데 그 과정에서 래쉴리의 손에 의해 턴버클이 벗겨지고...!?결국, 오코너롤에 성공하며 커버에 들어가는데...
킥아웃하는 래쉴리, 그런데?! 킥아웃 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없는 턴버클에 그대로 안면과 충돌하고 마는 카우보이!!
예상치 못한 상황! 그리고 이어지는 래쉴리의 무지막지한 스파인버스터!
그리고 완전한 승기속, 래쉴리의 '스피어'가 스톰에게 꽂히게 된다!!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듯 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다! 제임스 스톰이 2에서 킥아웃을 한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래쉴리.. 하지만들려오는 관중들의 미친 환호, 눈 앞의 레프리의 2카운트 판정그리고 아직 싸우고자 하는 백전노장의 꺾이지 않는 결의
이것이 바로 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여전했지만, 몸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압도적인 강함의 차이는 극명했고, 분명했고, 잔인했으며정점은 이제 백전의 노장을 향한 분명한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래쉴리를 밀어내곤 카우보이 최후의 라스트 콜 2연타가 작렬된다!!!!!
임팩트 존이 광란의 도가니로 물든 가운데 카운트 1-2....!
3카운트 직전 가까스로 킥아웃 하는 래쉴리!!!!???!!!!!!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에도 닿지 못한 승리의 순간에너무나도 아쉬워하는 '카우보이' 제임스 스톰
"THAT WAS 3!!! THAT WAS 3!!! THAT WAS 3!!!"저건 3카운트였다는 챈트와 함께 더욱 더 뜨거워지는 경기장의 열기개인적으로 필자가 봐온 임팩트 존의 모든 경기 중 이보다 뜨거운 열기의 경기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열기 앞에 확실한 승리를 향한 마지막 한방을 준비하는 스톰그리고 작렬되는 또 한번의 라스트 콜..! 하지만 래쉴리가 잡아채고이를 돌려 반격하지만, 오히려 스톰이 렁블라워로 카운터를 날린다!!
모두가 카우보이의 승리를 확신한... 그 순간...!
이를 곧바로 '롤링 스피어'로 받아쳐버리는 래쉴리!!!!
결국, 이 벼락같은 일격 하나로 래쉴리가 3카운트를 가져오며'TNA 역사상 최초의 싱글 3관 챔피언'의 주인공에 오르게 된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승패의 희비앞에, 패자는 말이 없었고승자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룬것에 감격했다.
그리고, 승자의 눈앞에 3개의 황금이 놓여졌다.
전무후무한 '절대적 지배자'의 탄생이라는 충격과 공포앞에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는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것이다.
"과연 누가 이 '파괴자'를 막아세울것인가...?"
그리고 나타났다. '파괴자'에 맞설 TNA의 유일한 '한 남자'가
바로 부정할수 없는 부동의 'TNA의 탑페이스' EC3였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그가 거쳐온 지난 날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7월 21일, TNA는 10월에 열린 최대의 PPV '바운드 포 글로리'의메인이벤트에서 TNA 월드 챔피언 래쉴리와 맞설 도전자를 뽑는'바운드 포 글로리 플레이오프' 8인 토너먼트를 개최하게 된다.
EC3는 1회전에서 일라이 드레이크를 가볍게 물리치고2회전에선 브로큰 맷의 술수에도 멋지게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의 상대는 다름 아닌 '미라클' 마이크 베넷이었는데...?
"너는 내게 아주 기분 좋은 추억을 줬었지?? 이 패배자야!"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그렇다. 사실 그들에겐 역사가 있었다. 4월, 마이크 베넷은 지난 3년간 단한번도 핀폴패를 당한적 없는EC3를 상대로 첫번째 핀폴승을 얻어낸 인물이었다.
거기다 지금 그의 옆에는 든든한 '와이프 디스트로이어' 무스까지함께하니, 심리적으로나 전력적으로나 EC3에겐 모든것이 불리했다.
그 모든 불리함을 안은채 나선 마지막 결전,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고예상대로 반칙과 술수가 난무하며 승패를 알 수 없는 혼전 속에서
결국, EC3는 그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며 승리하며
TNA 최대의 PPV 바운드 포 글로리의 메인 이벤트 티켓을 거머진다!
그리고 1주일 후, 임팩트 레슬링에서 도전자 자격으로써챔피언 래쉴리와의 대면을 위해 등장하는 EC3
많은 팬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자연스런 핸드 터치 그리고 심지어어린 꼬마팬에게도 훈훈한 팬서비스로 이젠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TNA의 탑페이스임을 보여주는 EC3였다.
"EC3!!! EC3!!! EC3!!! EC3!!! EC3!!! EC3!!!"그가 마이크를 잡은 그 순간, 임팩트 존엔 그의 이름이 울려퍼지고
-EC3!! -알고 있다고! -EC3!! -듣기 좋네!-EC3!! -맘에 들어! -EC3!! -좋아 계속해!-EC3!! -YEAH!!!!!-EC3!! -YEAH!!!!!!!!-EC3!! -YEAH!!!!!!!!!!!!!!!!!!!!-EC3!! -예에.... 여기까지!
-오늘 여러분들 반응이 정말 죽여주는군요!!-저를 위한 이 순간을 만들어준 여러분꼐 감사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자신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챈트에 맞춰 추임새로 화답하며관중들에게 자신을 향한 응원에 감사함을 전하는 EC3하지만, 팬들의 챈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NEXT WORLD CHAMP!!! NEXT WORLD CHAMP!!!"
불과 몇개월전까지 모두의 미움을 받았던 이 남자.. 하지만 이제그는 모두의 지지를 받는 진정한 한 단체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넥스트 월드 챔프? 거 당연한 스포일러 발설은 안되죠..!-오늘 분위기도 죽여주는데, 여기 링에서 이야기 할게 아니라-자아, 여기 여러분과 가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전 이 곳 TNA에 온 이래, 아주 많은 일을 경험했습니다-그 중엔 좋은 일도 있었고, 때론 나쁜 일도 물론 있었죠
-최고가 되기 위해 수많은 레전드들과 자웅을 겨루고-마치 대선 후보 마냥 월드 챔피언을 위한 캠페인도 하고-한떄는 배신에 대한 복수를 향한 긴 여정을 걷기도 했죠-아? 모두에게 지옥을 안겨준 엄청난 연승행진도 있었네요?!
-참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이뤘던 커리어였죠...
-그런데! 딱 하나!-제가 해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최고의 무대에서 진정한 최고를 이기지 못한것'이죠!-전 '진정한 최고'와 맞서고 싶습니다! '진정한 최고'를 말입니다!
-저는 이제 '진정한 최고가 되기 위한 모험'에 나섰습니다-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말이죠!-그리고 저와 모두의 염원을 담아 저는 기필코-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이 될겁니다....!
"저의 영광을 향한 여정(BOUND FOR GLORY)'은 이제 시작됐습니다"
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을 향한 출사표를 던진 EC3그 순간, 그의 앞에 '진정한 최고' 챔피언 래쉴리가 등장한다!
-EC3! 시작부터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방금 너의 '영광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고 말했나?!-진정한 최고를 이겨 진정한 최고가 되겠다?
-결론부터 말하지, 넌 최고가 될 수 없다. 내가 그 최고니까!-여기 이 벨트는 X-디비전의 모두를 짓밟고 얻어낸 것이며-너의 친구였던 드류를 개박살내고 이 월드 챔피언을 거머졌어!
-그게 바로 나다. 근접하려는 모두를 무참히 쳐부수는 -니 눈 앞에 서있는 이 남자가-바로 '진정한 최고'라고 불리는 남자란 말이다!!
-니가 아까 지껄였던 '스포일러'를 정정하지.. 래쉴리 VS 이든???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는 애새끼' 이게 바로 내 '스포일러'다!너무 바짝 익은 타코야끼의 일침에 말문 막힌 EC3"YES HE DID! YES HE DID! YES HE DID!"-계속 지껄어봐라!! EC3 빠돌이 빠순이 새끼들아!!!!
일방적 응원에 빈정 상한 바짝 탄 타코야끼,그 순간 가만히 지켜보던 EC3가 마이크를 드는데,꽤나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상황이 연출된다?!
-여러분, 자 우리 현실을 직시합시다! 좋던 싫던 인정을 하던 안하던-여기 있는 이 남자는 '진정한 최고'가 맞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이 바닥의 유일무이한 진정한 최고'죠!
자신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상대에게 오히려 최고라고 인정하는 EC3
-그래서 어쩌라고!!?? 니가 진정한 최고면 어쩔건데?!-챔피언? 디스트로이어? 완벽한 운동선수? 그게 뭔데?! -내가 챔피언 되는거랑 1도 상관없지?! 안그래??!!
-긴 말 필요없어 정말이야?! 바포글에서 넌 나와 만나게 될것이고-싸움은 치열하겠지, 승리와 패배의 순간은 한끗차이로 결정날거야 -그 마지막엔 내가 서있을거고, 난 진정한 최고가 되어있을거다!
-이던, 난 정말 그런 말들이 끔찍히도 지겨워...-과거 모두가 너처럼 내게 그리 말했지...
-'날 이기고 최고가 되겠다'고...
-그리고 난 그렇게 말한 그들에게 언제나 이리 말했다.
"너를 완전히 쳐죽여버리겠다고....."
범접할 수 없는 포스, 압도적인 강함, 이것이 바로 래쉴리였다.하지만, TNA의 팬들은 믿고 있었다.자신들의 영웅 EC3가 저 극악무도한 파괴자를 무찌르고새로운 정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될 것을..!하지만, 이 날이 바로 시작이었다. EC3에게 다가올 '생애 최악의 시련'이..[다음화에 계속]
작성자 : 조커스팅아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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