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NBA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는 포인트가드 크리스 폴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뉴올리언스 호네츠 소속으로 이제 3번째 정규시즌을 마친 폴은 이번이 첫 플레이오프 무대임에도 불구, 마치 10번째 플레이오프를 맞는 것처럼 농익은 플레이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2연패로 몰아넣어 화제가 되고 있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폴처럼 괴력을 보여준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 매직 존슨, 르브론 제임스 등 첫 PO 무대를 정규시즌 경기 치르듯 플레이했던 선수들의 활약상을 돌아보았다.
데뷔하자마자 결승行
데뷔와 동시에 NBA 파이널에서 우승한 가장 유명한 신인은 단연 매직 존슨이다. 매직은 80년 NBA 파이널에서 발목 부상을 입은 카림 압둘-자바의 공백을 동료들과 분담하며 LA 레이커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레이커스가 승리를 확정지은 파이널 6차전에서 그는 42득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 1블록을 기록했다. 신인으로는 믿기지 않는 여유가 돋보였던 경기였다. 그의 첫 플레이오프 평균기록은 16경기 출전에 18.3득점 9.4어시스트 10.5리바운드였고, 준우승팀의 줄리어스 어빙(필라델피아 76ERS)은 " 그저 놀라울 뿐 " 이란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매직처럼 신인 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선수로는 빌 러셀이 있다. 56-57시즌에 보스턴 셀틱스에 가세한 그는 첫 PO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후 보스턴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10번 더 우승했다.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인의 젊은 혈기로 첫 플레이오프를 무난히 치러낸 스타들도 있다. 그 중 1994년의 샘 카셀은 가장 의외의 스타였다. 어느덧 보스턴에서 자신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우승에 도전하고 있는 카셀은 93년 드래프트 24위에 지명됐지만, 그리 큰 기대는 받지 못했던 선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전문가들은 카셀과 케니 스미스의 포인트가드 진영을 낮게 평가했다. 그러나 카셀은 오히려 스미스보다도 대담한 플레이를 펼치며 휴스턴의 첫 우승을 도왔다. 정규시즌 중 30%에도 못 미쳤던 3점슛 적중률은 플레이오프 들어 급상승했다. 또 정규시즌 66경기에서 자유투 90개를 던졌던 그가 플레이오프에서는 겨우 22경기만을 뛰면서 64개를 던졌다. 카셀의 이러한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플레이는 이듬해에도 이어져 휴스턴은 NBA 2연패를 달성했다.
비록 우승은 거머쥐지 못했지만 리차드 제퍼슨과 대니얼 깁슨도 슈퍼스타를 선배로 둔 덕분에 첫 해 플레이오프부터 파이널 무대를 밟았다.
제퍼슨은 데뷔하자마자 2년 연속으로 NBA 파이널에 올랐지만 두 번 모두 LA 레이커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완패를 당하며 쓴 잔을 마셨다. 그러나 제퍼슨은 " 제이슨 키드라는 포인트가드를 선배로 둔 점, 그리고 데뷔하자마자 큰 무대를 밟아봤다는 점은 NBA에서 생활하는데 있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 고 말한다. 비록 신인 시즌에는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했기에 플레이오프에서도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런 제퍼슨의 의지는 그를 팀내 최고 스타로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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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2007년에 데뷔한 대니얼 깁슨은 폭발적인 외곽포로 농구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자칭 세계 최고의 3점 슈터인 데이먼 존스보다도 더 정확한 3점슛으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구했기 때문이다. 정규시즌에 그가 올린 성적은 4.6득점. 그러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동부 컨퍼런스 결승 4차전에서는 21점을 올리며 승리(91-87)를 견인했고, 6차전에서는 3점슛 5개를 모두 적중시키면서 31득점을 퍼부었다. 덕분에 클리블랜드는 창단 후 첫 결승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첸시 빌럽스를 따라잡기 위해 집 앞마당에서 빌럽스만 연구했다는 그의 노력이 통하던 순간이었다. 그는 6차전 후 " 이게 꿈이라면 제발 날 깨우지 마세요 " 라 말하기도 했다.
눈물과 함께 큰 샤크와 코비 샤킬 오닐의 초창기 플레이오프는 \'스윕(한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싹쓸이 패배 당하는 것)\'으로 얼룩졌다. 마침내 오른 첫 플레이오프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맥없이 3-0으로 무너졌다. 이어 95년 NBA 결승에서는 휴스턴 로케츠에 4-0으로 졌고, 96년 동부 결승에서는 이를 갈고 나온 황소 군단 시카고 불스에 4-0으로 패했다. 스윕의 악몽은 LA 레이커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98년에도 이어졌다. 유타 재즈를 맞아 4-0으로 완패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패할 때마다 언론의 빗발치는 화살을 몸으로 견뎌야 했다. 94년과 95년에는 " 더 성숙해야 한다 " 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그 이면에는 농구 외적으로도 신경을 썼던 오닐의 외도 아닌 외도에 대한 기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한 몫 했다.
코비 브라이언트도 마찬가지였다. 97년 플레이오프 9경기에서 그는 8.2득점을 기록했다. 올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올리고 있는 34.4득점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성적이었다. 그러나 이기고 싶다는 마음만은 여전했다. 유타 재즈와의 컨퍼런스 준결승 5차전에서 그는 팀의 운명을 좌우하는 3점슛을 과감히 던졌으나, 이것이 에어볼이 되면서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샤크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 그때 그 슛을 던지고 싶어했던 선수는 우리 팀에서 오로지 코비 뿐이었다 " 며 그의 용기를 높이 샀다. 그렇다면 코비의 생각은 어땠을까? 마침 얼마 전 유타와의 1차전이 끝난 후 뉴욕 타임즈의 한 기자가 " 97년의 그 슛을 기억하는가 " 라고 질문을 던졌다. 코비는 그 질문에 " 그렇다. 아주 끔찍했던 경험이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줘서 고맙다 " 고 답했다. 11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제리 슬로언 감독의 재즈를 상대로 코비는 1차전에서 무려 22개의 자유투를 성공시키며 팀 기록을 새로 갈아치웠다.
결실 맺은 아이버슨
" 생애 첫 플레이오프인데 떨리지 않는가? "
이 질문에 대한 \'해답(Answer)\'의 대답은 \'당연하지!\'였다.
99년에 마침내 첫 플레이오프의 꿈을 이룬 앨런 아이버슨의 이야기다. 래리 브라운 감독과 함께 필라델피아 76ERS를 91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로 이끈 아이버슨은 첫 상대인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37득점 9어시스트로 활약하며 팀의 승리(101-91)를 이끌었다. 매직을 이끌던 척 데일리 감독은 당시 " 1차전은 앨런 아이버슨 쇼였다 " 라며 극찬했다. 아이버슨도 "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무대였고, 그 첫 승을 따낸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 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후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을 앞세워 매직을 3승 1패로 꺾고 2라운드에 올랐으나,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에 밀리면서 첫 경험은 짧고 굵게 마쳤다.
그러나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아이버슨은 2년 뒤 팀을 NBA 파이널로 이끌면서 스타의 진면목을 과시했다. 아이버슨은 99년 플레이오프 당시에도 부상을 떠 안고도 매 경기 44분 이상을 소화하는 강철체력을 보였다. 그에 대한 나쁜 평판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그는 2001년 PO를 기점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명암 엇갈렸던 빈스 카터와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는 NBA 인기 회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수다. 화끈한 슬램덩크와 쇼맨십, 여기에 게임 속 주인공이 아이템 주워먹듯,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도 성장을 이뤄내며 99-00시즌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적어도 정규시즌만 보면 그랬다.
그러나 자신의 첫 플레이오프였던 2000년 플레이오프는 실망스러웠다. 그들의 첫 상대는 승리에 굶주린 뉴욕 닉스였고,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닉스는 노련하게 카터와 토론토 랩터스를 요리하면서 3-0으로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다.
정규시즌에 3승 1패로 앞섰던 랩터스였지만, 아마 그들은 플레이오프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카터도 마찬가지였다. 카터는 닉스와의 정규시즌 맞대결에서 평균 33득점을 올렸고, 야투성공률은 무려 60.2%였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스프리웰은 카터를 평균 19점으로 묶었다. 야투 성공률은 30%에 불과했다. 1차전 성적은 16점으로 야투는 20개를 던져 17개를 실패했다. 스프리웰은 이 결과에 대해 " 빈스에게 도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이긴 것은 내가 아니라 \'팀\'이었다 " 고 말했다. 카터는 자신의 부진에 대해 스프리웰 의 수비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 닉스의 수비 때문은 아니었다 " 고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카터의 사촌이자 팀 동료였던 트레이시 맥그레디는 첫 플레이오프를 통해 주가를 높인 케이스였다. 카터와 마찬가지로 닉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1차전이 데뷔전이었던 그는 부진했던 카터대신 25득점 10리바운드로 활약했다. 자유계약선수를 앞두고 있었던 그는 공격 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부치 카터 감독은 스프리웰의 수비수로 그를 붙이면서까지 카터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했을 정도로 맥그레디가 수비적인 면에서 갖고 있던 재능을 높이 샀다. (결과적으로 매치업 싸움은 실패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 시리즈는 지금은 NBA에서 부치 카터 감독의 무능과 불화가 망쳐놓은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카터의 부진을 전적으로 카터에게만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카터에게 집중됐던 스포트라이트를 생각해보면 0-3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주가 올린 신인 비록 우승이나 파이널 진출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활약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들도 많다. 1994년 토니 쿠코치(시카고 불스)는 뉴욕 닉스와의 동부 준결승에서 위닝슛을 성공시켜 화제가 됐다. 그 슛은 당시 스카티 피펜이 거부했던 것으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대에 대표적인 선수로는 히도 터코글루와 테이션 프린스, 토니 파커가 있다.
2008년 식스맨상 수상자인 히도 터코글루가 처음 전국방송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LA 레이커스와 붙었던 2001년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시리즈에서였다. 새크라멘토 킹스 소속으로 출전해 8경기에서 7.5득점을 기록한 그는 l릭 팍스에 꽁꽁 묶인 페자 스토야코비치를 지원사격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1차전에서 12점으로 깜짝 활약을 보인데 이어 그는 2차전에서는 17분간 10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러자 샤킬 오닐은 범상치 않은 그의 움직임과 투지에 강한 인상을 받은 듯, 데드타임의 막간을 이용해 " 넌 도대체 뭐야? " 라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터코글루의 치솟았던 주가와는 달리, 킹스는 레이커스에 4-0으로 완패하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터코글루가 적극적인 공격으로 눈길을 끌었다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테이션 프린스는 수비로 이름을 알린 케이스다. 캔자스 대학출신의 그는 2002-03시즌에 데뷔해 3.3득점과 1.1리바운드의 평범한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올랜도 매직과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가 1승 3패로 탈락위기에 몰리자 릭 칼라일 감독은 특단의 대책을 내린다. 바로 맥그레디의 수비수로 프린스를 붙인 것이다. 4차전까지 치르는 동안 두 번이나 D-N-P(Did Not Play)처리가 됐던 프린스는 긴 팔과 탄력을 이용해 T-MAC을 견제했다. 5차전에서는 데뷔 후 최고 득점인 15득점을 올렸고, 맥그레디를 19점으로 묶으면서 디트로이트의 31점차 완승(98-67)을 이끌었다. 7차전에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데뷔 후 최고 득점(20점)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시에 T-MAC을 21점(실책 4개, 야투 7-24)으로 묶은 것이다.
덕분에 디트로이트는 1승 3패를 극복한 역대 8번째 팀이 되면서 다음 라운드로 넘어갔고, 맥그레디의 1라운드 악몽도 계속됐다. 벤 월러스와 칼라일 감독은 디트로이트 승리의 일등공신 중 하나로 프린스를 꼽았는데, 이후에도 프린스는 팀의 주역으로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등 주 득점원의 전담 수비수로 떠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2007년 파이널 MVP 토니 파커도 신인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그는 한때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집으로 돌려보낼까 고민했던 풋내기였지만 빠른 적응력을 보이면서 스퍼스의 돌격대장으로 자리잡았다. 포포비치가 그를 내보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2년 플레이오프에서 당대 최고 수비수였던 게리 페이튼을 상대로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1차전에서 그는 21득점을 올리며 기선을 제압했고, 102-75로 완승을 거둔 3차전에서도 23점으로 코트를 휘저었다. 23점은 그의 NBA 데뷔 후 최고 득점이었고, 덕분에 스퍼스는 데이비드 로빈슨 없이도 시애틀을 극복하며 2라운드에 올라섰다.
슈퍼스타 3인방의 첫 플레이오프 2003년 NBA 드래프트에 지명된 슈퍼스타 3인방의 첫 PO 성적은 어땠을까?
드웨인 웨이드는 3명 중 PO를 가장 먼저 밟아 가장 선전한 선수가 됐고, 그 임팩트도 가장 컸다. 뉴올리언스 호네츠와의 1라운드 시리즈 1차전에서 경기종료 1.3초를 남기고 점프슛을 성공시켜 팀의 극적인 승리(81-79)를 이끈 것이다.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던 그는 " 난 언제나 빅 슛을 성공시킬 수 있는 선수였다. 감독님께서 자랑스러워 해주길 바란다 " 고 답했다. 당시 그를 지도하던 스탠 밴 건디 감독은 " 웨이드는 불리하고 긴장되는 상황을 이겨내길 바라는 의지가 강하다 그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할 선수다 "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히트는 7차전 접전 끝에 호네츠를 4승 3패로 따돌리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비록 2라운드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4승 2패로 패했지만, 2005년에 동부 결승에 오르고, 2006년에는 NBA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도약했다. 웨이드는 2006년 NBA 파이널 MVP를 수상하면서 슈퍼스타 3인방 중 가장 먼저 우승한 선수가 됐다.
전체 2위로 지명된 앤써니도 웨이드처럼 데뷔 첫 해에 덴버 너게츠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강했다. 전체 8위였던 너게츠에게, 사상 첫 우승(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을 노리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너무 버거웠던 것이다. 이 경기에서 샘 카셀은 플레이오프 데뷔 후 최다득점인 40점을 올리면서 앤써니의 PO 데뷔전을 망쳐놓았다. 미네소타도 106-92로 이겼다. 카셀이 폭발적인 중거리 슛으로 게임을 리드하는 동안 앤써니는 19점에 그쳤다. 1쿼터에 파울 2개를 범하면서 리듬을 놓친 그는 3점슛 5개를 던져 하나도 넣지 못했다. 앤써니의 부진은 계속됐다. 2차전에서는 실책만 7개를 범했고, 4차전에서는 트렌튼 하셀에 막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무릎까지 다쳐 경기를 마치지 못했다.
앤써니는 이후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아직까지 1라운드는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는 1라운드에서 LA 레이커스를 만났지만 또 다시 0-4로 지면서 고배를 마셨다.
제임스는 3인방 중 가장 늦게 플레이오프에 데뷔했지만, 그 임팩트는 2명 못지 않았다. 워싱턴 위저즈와의 2005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그는 32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NBA를 떠들썩하게 했다. 소속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도 97-86으로 승리했다. 플레이오프 데뷔전에서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선수는 제임스가 세번째였다. 3차전에서도 그의 활약이 빛났다. 97-96으로 승리한 이 경기에서 제임스는 팀의 마지막 10점 중 8점을 혼자 올리면서 41득점을 기록했다. 결정타도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클리블랜드도 1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원정경기에서 이겼다. 비록 클리블랜드의 이러한 질주는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막을 내렸지만, 그는 2007년에 팀을 NBA 파이널까지 올리면서 매 시즌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플레이오프 데뷔도 쉽지 않았던 스타들 그런가 하면 \'이름 값\'으로는 올스타인데 정작 플레이오프 때만 되면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선수들도 있다. 약체 팀의 에이스들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96년과 2000년에 데뷔한 샤리프 압둘-라힘과 엘튼 브랜드는 플레이오프 탈락의 설움을 많이 겪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멤버이자, 2002년 NBA 올스타였던 압둘-라힘은 밴쿠버 그리즐리스, 애틀랜타 호크스, 포틀랜드 블레이저스 등 성적 안 나오는 팀들만 골라 다녔다. 통산 평균 득점은 18.2점이었지만 동료 복이 없었다. 그는 데뷔 후 거의 10년이 지난 2006년에야 새크라멘토 킹스 소속으로 마침내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진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하필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상대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였으니 말이다. 스퍼스는 1차전부터 122-88로 대승을 거두면서 기를 확 죽였다. 압둘-라힘은 1차전에서 17분간 뛰면서 마침내 포스트시즌의 분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이후 그에게 다시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무릎 부상으로 시달리던 그는 이번 시즌에 은퇴설이 나돌았지만 계속해서 재기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2000년 신인상 수상자인 브랜드(LA 클리퍼스)의 포스트시즌 경험은 짧았지만 대단히 굵었다. 한동안 LA 클리퍼스에서 마음 고생이 심했던 그였지만, 2005-06시즌에는 샘 카셀-코리 매거티-크리스 케이먼 등 쟁쟁한 동료들 덕분에 마침내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아 1라운드에서 덴버를 4승 1패로 꺾었다. 브랜드는 이 시즌에 올-NBA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브랜드는 덴버와의 1차전에서 팀을 89-87로 승리로 이끌었지만,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기보다는 "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 " 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 생애 최고의 경험이 됐다 " 는 말은 잊지 않았다. LA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사상 최고의 기록을 올렸던 클리퍼스는 그러나, 2년 연속 갖가지 부상과 사정으로 다시 예전의 익숙한 자리로 돌아왔다. 브랜드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브랜드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8-05-08 손대범 기자(sondaebu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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