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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70: 폭격기에서 미국 정치판의 장기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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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71만 봐도 발키리랑 비슷한 고도에서 비슷한 속도로 비행했으나 단 한번도 격추당하지 않고 냉전기 내내 사진찍으러 돌아다닌것만 봐도 발키리의 생존성 자체는 크게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근데 이건 그냥 일개 군붕이의 뇌피셜이고, 정작 미 공군의 수뇌부들은 XB-70의 생존성을 매우 낮게 보신듯하다. 1959년 11월 16일,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토마스 D.화이트 장군은 XB-70이 소련의 철도 이동식 ICBM을 타격하거나 정찰할 수 있냐고 묻는 합참의장의 회의적인 물음에 '소련이(지대공 미사일으로) XB-70을 타격할 수 있을 것' 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XB-70 계획 자체를 '연구 개발 프로그램'으로 격하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맞장구를 친건 놀랍게도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였다 그는 1958년에 배치된 SM-65 아틀라스 ICBM을 거론하면서 B-70을 위치가 고정된 ICBM 기지나 군사시설 타격용으로 쓰는 것은 '미친 짓' 이라면서 아틀라스 ICBM이 그러한 일들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ICBM의 등장 외에도 다른 문제가 생겼다. XB-70과 다수의 부품을 공유하던 XF-108 레이피어가 ICBM이 실전배치되고 소련의 폭격기들을 상대할 일이 줄어들자 1959년에 프로젝트 자체가 폐기되어버린 것이다. 여태껏 NAA는 최대 500기가 생산될 XF-108과 발키리의 엔진, 사출좌석, 동체부 구조 등의 부품을 동일하게 설계해서 개발 비용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순전히 XB-70용으로 모든 부품들을 개발해야만 했다. 이는 그대로 XB-70의 개발비 상승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1959년 12월, 미 공군은 단 1대의 XB-70 시제기만 만들기로 협의했으며, 향후 기체의 양산도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1960년,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건 민주당의 대선후보, 존 F.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공화당이 미국의 안보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기술 개발에도 소홀하기 때문에 소련과의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샌디에이고의 NAA 본사 앞에서 열린 유세에서 XB-70 계획을 '매우 진심으로 지지' 한다고 밝혔고, B-58과 B-52와 같은 폭격기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가만히 있을 공화당이 아니었기에 당시 케네디의 라이벌.......이라기엔 대선에서 일방적으로 쳐발린 리처드 닉슨 또한 XB-70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을 지원하기 위해서 XB-70의 존재를 계획보다 빨리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을 뿐 아니라, 1억 5,500만 달러 (현재기준 16억 달러)를 XB-70 프로그램에다가 기부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미공군도 높으신 분들의 의중에 따라 휘둘리기 시작했다. XB-70의 예산은 증액되었으며, 1960년 8월에는 XB-70 프로토타입과 11대의 YB-70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젠하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선거에서 졌고, 존 F.케네디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가 취임하고 깨달았던 몇가지 사실들 중 하나는 소련군이 생각보다 더 좆밥이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미국을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던 몇가지 '격차' 가 존재했는데, 첫번째로 소련 공군의 전략폭격기 운용량과 생산력이 미국을 개쳐바른다는 내용의 '폭격기 격차(Bomber Gap)' 와 소련군의 미사일 전력이 미국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미사일 격차'였다. 이중에서 미사일 격차의 경우, 케네디의 당선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물론 둘다 개소리였다. 폭격기 격차의 경우, 1954년 말에 양산된 미야시셰프 M-4 폭격기가 1955년 7월에 열린 모스크바 에어쇼에서 28기나 등장해버리며 나타났는데, 소련군은 미군을 속이기 위해 실제로는 18기만 동원하여 돌려막기로 비행을 펼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에 완전히 속아서 1960년까지 무려 800기의 M-4 폭격기가 배치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B-47과 B-36만 몇백대씩 굴리던 미국 전략공군이 도데체 왜 고작 소련제 폭격기 800대 상대로 쫄았냐면 B-36은 소련 영공에 도달하기도 전에 격추당할게 뻔했으며, 소련을 폭격하려면 공중급유기가 필요했던 B-47과는 달리 M-4는 미국 전역에 논스톱으로 핵폭격이 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B-52는 어따 팔아먹었냐고 물어볼수도 있지만, 당시 B-52는 실전배치된지 1년도 채 안된 신삥이었고 사정거리도 짧고 기술적 문제로 가용성도 떨어지던 B-47과 1950년대 기준으로도 씹구닥다리 비행기였던 B-36이 미 전략공군 폭격기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게 현실이었다. 이에 완전히 패닉에 빠진 미 전략공군은 의회에다 땡깡을 부려 B-47 2000대에다가 B-52 750대를 찍어내버렸으며, 이들 중 1/3은 언제라도 소련으로 날아가 모스크바에 핵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항상 출격 대기상태로 유지시켰다. 근데....사실 애초에 폭격기 격차의 주범이었던 미야시셰프 M-4는 작전반경이 5,600km 수준이라 미 본토에 폭격이 불가능했고, 엔진부터 동체까지 싹 뜯어고친 3M형에 와서도 8,000km에 불과해 전략폭격기로는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소련 공군은 M-4를 고작 125기만 만들고 단종시켰고, 이마저도 대다수는 공중급유기나 해상초계기로 운용되어서 폭격기로 운용된 기체는 단 19기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소련의 허세에 미국이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이다 미사일 격차는 더 심했는데, 사건의 발단은 소련의 서기장인 흐루쇼프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미국 정부가 별 반응을 안하니까 긁혀서 자국의 ICBM들이 미사일 공장에서 소시지처럼 뽑혀나온다고 말도안되는 허세를 부리면서 시작되었다. 이게 왜 허세냐면 당시 소련의 ICBM은 3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과 정치인들은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며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소련의 인공위성 계획을 사전에 알고있던 미 정부와 다르게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스푸트니크 쇼크' 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미국이 소련보다 우주 경쟁과 기술력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훗날 암살당한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은 (당시에는 민주당 원내대표였으며 미국 민주당의 실세 중 하나였다) "지금, 왠지, 어떤 면에서인지, 하늘이 아주 낯설어 보인다. 다른 나라가 위대한 우리 나라보다 기술 우위를 점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발언하며 소련에 대한 기술적 열세를 인정해버렸고 당시에는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 또한 "미국은… 안일한 계산 오류, 인색함, 예산 삭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경영, 낭비적인 경쟁과 질투로 인해 소련과의 위성 미사일 경쟁에서 지고 있다" 라며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대차게 까버렸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거짓말이 먹히니까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는지 "새로운 소련 ICBM이 현재 대량 생산 중임" 이라고 또다시 허세를 부리면서 불난데 기름을 들이부어버렸다. 이에 더해 이러한 흐루쇼프의 발언 5일 뒤 소련이 진짜로 사거리 13,000km짜리 R-16 ICBM의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 대중들은 진지하게 소련이 미국을 미사일 기술로 찍어눌렀다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 미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타이탄 ICBM이 발사하다가 그대로 폭발해버리자 이러한 생각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럼 이게 진짜였을까? 당연히 좆구라였다 1961년 당시 미군의 ICBM 댓수는 57기, 소련은 10기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10기의 ICBM들조차 매우 비범한 친구들밖에 없었는데, 우선 소련 최초의 ICBM인 R-7 세묘르카는 발사를 위한 사일로 1기를 건설하는데만 소련 국방예산의 5%가 들어갔으며, 발사 준비에만 2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무기였다. 심지어 연료를 주입한 이후 발사를 취소할 경우, 공장으로 ICBM을 다시 보내서 연료탱크를 교체하고 재조립해야만 했다. 이런 ICBM으로는 선제핵공격이란게 가능할리가 없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ICBM이라기보다는 우주여행용 로켓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소유즈 로켓의 기반이 되기도 했으니 뭐.... R-16의 경우, R-7보단 훨씬 나았지만 얘도 발사 준비까지 3시간씩이나 기다려야만 했으며, 추가적으로 유도 시스템의 자이로스코프를 작동시키는데 20분이 걸렸다. 반면 미국의 미니트맨 ICBM은 고체 추진제로 구동되었고, 몇 분 안에 발사할 수 있었으며, 수량도 훨씬 더 많았다. 한마디로 미사일 격차는 완전한 허구였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를 선거전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애초에 '미사일 격차'라는 단어 자체가 케네디가 만든 단어였다 다만 케네디 또한 처음에는 미사일 격차가 진짜라고 믿었다. 공군 출신이던 동료 의원이 케네디에게 과장된 미 공군 보고서를 건네줬고, 케네디는 보고서가 과장됐단걸 알지 못했다. 미사일 격차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대응 또한 미적지근했다. 그는 소련 영공 내에서 이루어지는 U-2 비행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공개적으로 주장을 반박하기를 거부했고, 케네디는 미사일 격차가 진짜인줄알고 더더욱 날뛰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좆된다고 느낀 아이젠하워는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1960년 7월에 케네디와 린든 존슨에게 미사일 격차는 허구라는 증거사진들을 CIA와 군부의 동의 하에 보여줬지만, 이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마당에 그런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야기가 존나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튼 다음편에 계속....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반격태세: 경상우도 (1)
https://youtu.be/K3MsiaOd3qA이전에 이어서 이번에는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의 조선군 움직임에 대해 살펴보는 글이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제1번대의 상륙으로 시작된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는 완전히 지리멸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제승방략 체제 하에 경상도관찰사의 동원령을 받든 경상좌우도의 조선군은 신속히 각지의 병력을 인솔하여 부산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했지만 상상 이상의 화력을 내뿜었던 일본군의 맹진으로 인해 채 제대로 집결하지도 못한 채 고위 지휘부가 붕괴하면서 와해되어버린다. 다행히 일본군의 주된 목표는 수도 한성으로의 진공이었기 때문에 충청도로 향하는 상주 방면 진격로에 해당하지 않는 경상도 대부분 지역이 적의 칼날을 일단은 비껴갈 수 있었으니, 일단 와해된 경상도 전력은 각각 좌우도 병력으로 나뉘어 경사좌도군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재집결, 경상우도군은 현재의 경남의 서부 지역으로 순차적으로 물러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빠르게 물러난 전력을 수습하고 각지의 현령, 현감들의 주도로 관군이 곧바로 결사항전에 나선 경상좌도의 사정과는 다르게 경상우도의 조선군은 창원, 김해, 밀양 등지에서 계속해서 참패를 거듭하며 일패도지하여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답은 단편적으로는 대군이 잇달아 상륙하여 적의 주력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던 경상우도 남해안 지역의 절박한 상황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란 전에 이루어졌던 중앙조정의 '전란 대비책'에 있었다. 임진왜란 전 병란 발발의 조짐을 직감한 조선 조정은 경상도 남해안 지역의 군비를 확충하고 각지의 성지를 보수, 증축하는 등 전쟁 대비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 총책임자 격으로 관민을 닦달한 것이 바로 경상도관찰사 김수였다. 김수는 평소에도 깐깐하고 세심한 일처리로 이름 높은 청백리였기에 조정의 명을 받아 때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경상도 관민을 몰아붙였고 이에 따라 경상남도 라인 관민들의 불만도 끝을 모르고 치솟아 있던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지방 향촌사회를 잡고 있던 재지사족의 불만이 극도로 팽배했는데, 조정이 군적 등을 재정비하면서 이들이 불법적으로 잠식해오던 향촌사회의 자산과 인적 등을 밝혀내여 뜯어갔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개전과 함께 4월 짧은 기간 동안 경상우도 조선군은 지속적으로 진주 방면으로 밀려나면서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한다. 지역 군민들의 민심을 얻을 수 없었던 기존 수령과 관리들은 한 번 모았던 병력을 잃어버린 다음엔 어떻게 재기의 기틀을 마련할 방도도 없이 적의 대군이 밀려오면 그대로 임지를 내버리고 도망쳐 숨어버리기 일쑤였고, 민초들 또한 조정에 애초에 기대도 없었다는 듯이 도망쳐 산 속으로 숨어들거나 허망하게 적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밑에서 부역하게 되는 순왜 혹은 부왜자들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경상남도 지역 민심 이반이 얼마나 심했던가 하면 이왕 답도 없으니 밀려든 일본군에 굴종하는 겸 아예 앞잡이가 되어 그동안 쌓인 조정과 관리들에 대한 분노를 역으로 푸는 경우도 다발했다. 이처럼 개전 극초기 심각한 민심 이반상황 속에서 경상우도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군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는 아래와 같았다. 1. 녹아버리다시피 한 조선군 전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 경상좌도의 경우,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주력군과 고위 지휘부가 무너진 다음에도 각 행정구역의 하급 수령들인 현령, 현감들의 주도 하에 적극적으로 관군이 재정비되고 이를 통해 병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상우도의 당시 상황은 이러한 결사항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2. 무너진 민심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재지사족들의 이반이 너무나도 뼈아픈 상황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당시 조선군에게 피와 같은 인력과 물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기에 조정에게서 반 쯤은 등을 돌려버린 재지사족을 반드시 규합해내야만 했다. 이런 난관 속에서 경상우도 조선군을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문제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관군의 빈자리를 채우며 급속도로 솟아나기 시작한 무장세력이었다. 문제는 경상우도의 당시 민심이반 상황과 어우러져 극초기에는 이 무장집단들이 조선군 세력으로 흡수되지 않고 그 성격도 굉장히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사방에서 기존 관리들이 내버리고 떠난 임지들을 재지사족들이 차지하고서 사적으로 병력을 끌어모았는데, 가진 물자가 없으니 이들이 먼저 털어가기 시작한 것 또한 각지의 조정 물자창고들이었다. 거기에 일부는 그대로 도적떼로 화해 역으로 일대의 조선군민을 핍박하기도 했고 그대로 돌아서서 일본군에 붙어버리는 집단들까지 있는 등 이들의 향방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단적으로 4월 22일 이른 시기에 봉기한 곽재우의 의병집단을 예로 들 수 있다. 고향 의령에서 친족들과 향촌 사족들의 지지를 받아 일어난 곽재우는 곧바로 관리가 도망하여 무주공산이 된 인근 초계군의 읍성을 털어 자신의 의병집단을 무장시켰고 주변 일대를 기점으로 활동에 들어간다. 조정과 관군의 입장에서 보면 난리를 틈타 관아를 침탈하고 사적으로 봉기한 위험천만한 반군으로 보이기 딱 좋은 상태였다. 비슷한 시점에 동현에서 일어난 정대성이라는 자는 곽재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병력을 일으킨 뒤 그대로 도적떼로 변해버려 오히려 관군이 없는 병력을 쪼개 토벌해야 했을 정도였으니, 이처럼 우후죽순 솟아나기 시작한 무장집단들에 대한 관군의 우려는 기우라 할 것도 없이 또 하나의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거기다 경상도에 아예 진을 치기 시작한 일본군의 움직임 또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주력군은 개전 초기의 기세를 타고 급속도로 북상했으나 경상도에 남은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모리 테루모토가 이끄는 일본군 7번대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작계에 따라 최종적으로 경상도를 평정하기로 되어있는 병력으로, 대부분의 주력이 한성 점령을 목표로 급속 전진할 때 뒤에 남아 후방인 경상도를 완전히 제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최중요 보급 거점인 경북 상주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위치한 경북 성주성에 본진을 두고서 동쪽으로는 격렬하게 저항을 이어가는 경상좌도 조선군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사실상 최후 거점인 진주성 일대로 밀려나고 있는 경상우도군을 완전히 말려죽이려 들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내우외환이 겹쳐 무너지고 있었던 경상우도의 조선군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다 같이 진주 남강에 살자하면 되겠다 싶은 지경이었는데, 이런 지리멸렬한 흐름을 또 한번 틀어줄 사람이 경상우도에도 나타난다. 바로 '초유사 김성일'의 등장이었다. 경상좌도에 좌병사 박진이 있었다면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에는 바로 이 꼬장꼬장한 양반 김성일이 있었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하히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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