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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ㅇㅇ고정닉
악마의 딸: 마린 르펜과 프랑스 국민연합의 50년
https://youtu.be/coBaMQ9_rl0?si=uqgRdSTaAt6MBKLv Thronebreaker - The Bloody Mistress ExtendedExtended version of The Bloody Mistressyoutu.be 2025년 3월 31일, 프랑스에서 정치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국민연합 소속으로 현재 지지율 1위의 유력 대선 후보 마린 르펜이 징역과 함께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이 소식은 프랑스 내부에서도 희비가 엇갈렸고,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마저 윤석열이 탄핵된지 약 30분 후에 그녀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며 두둔하는 글을 올렸으니 말이다. 마린 르펜과 국민연합의 길고 긴 이야기는 그녀의 아버지 장 마리 르펜에서 시작한다. 홀로코스트를 사소한 사건이라고 일축하고, 이순신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종 혼합을 막아냈다고 극찬한, 한 때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극우 정치인이자 대다수 프랑스인들에게 '악마'라고 불리우던 사람 말이다. 96살으로 오래오래 장수했다가 올해 초에 죽음을 맞이한 장마리 르펜은 프랑스 현대사의 왠만한 굵직한 사건들을 전부 경험한 인물이다.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그는 16살의 앳된 나이에 레지스탕스에 가입하려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거절당했고, 점차 우익 극단주의의 길로 빠져든다. 장마리 르펜은 종전 후 반공주의 운동과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활약하다가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은 우파 포퓰리즘 운동인 푸자드 운동에 참여해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알제리 전쟁에 다시 한번 참전했고, 알제리 전쟁을 종식하려는 드골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장마리 르펜은 다른 극우 민족주의 운동들을 돕다가 한계를 느끼며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인사들과 함께 1972년 국민전선을 창당했다. 당시 국민전선은 자유무역과 자유시장, 서방 세계의 통합을 옹호하는 한편, 국내적으로 공산주의와 이민에 반대하며 극우적인 사회문화 성향을 지닌 정당이었다. 국민전선은 한동안 그저 그런 극우 군소정당으로 연명했다. 그러나 오일쇼크의 여파와 좌파 성향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하고 난 후 그의 정당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전선은 10%~15% 정도의 고정 지지층을 확보했고, 장마리 르펜은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꾸준하게 국민전선의 당수이자 유럽연합 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국민전선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90년대부터 경제적으로 보호주의와 제한적 개입주의를 외치며 노동 계급에 호소했고, 세계화와 유럽 통합에 반대했으며, 철지난 반공주의 대신 반-이민 이슈에 극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마리 르펜은 계속해서 개인적인 구설수를 만들어냈다. 나치 강점기가 비인간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다는 것이나, 황당하게도 축구팀에서 흑인과 아랍인들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아예 대놓고 인종 사이에는 우열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망언의 정점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기자에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사소한 사건’일 뿐이라고 일축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이후 그는 물론 그의 딸의 정치 커리어를 내내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다가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이변이 연출되었다. 우파 여당에 맞선 좌파 세력의 분열 속에 장마리 르펜이 2등으로 결선 투표에 진출한 것이다(프랑스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유명세는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일축하고 축구대표팀에 아랍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 남자는 프랑스인들의 눈에 그닥 대통령감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좌부터 우파를 아우르는 국민들이 현직 시라크 대통령에게 대대적으로 결집했고, 1차 투표에서 17%를 받은 르펜은 2차 투표에서 겨우 18%를 받아 자신에게 확장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장마리 르펜의 정치일대기는 거기가 고점이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는 르펜을 집중적으로 견제했고, 그는 지지층 일부를 빼앗겨 대선을 4위로 마감했다. 이후 국민전선의 재정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의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는 국민전선이 의석을 얻는 것을 사실상 방지했고, 국고 보조금을 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민연합은 파리에 있던 당사를 팔아 치우고 후술할 EU 자금 비리 의혹이 나올 정도로 재정적 위기에 놓여 있었다. 2009년 EU의회 선거에서 국민연합은 프랑스에 할당된 74석 중 겨우 3석을 얻으며 창당 이후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런 위기에서 장마리 르펜은 결국 알제리를 테러국가라고 지칭한 사건 때문에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선에서 후퇴해 다음 세대의 르펜에게 길을 열어줬다. 그를 옆에서 오랫동안 보좌해온 딸 마린 르펜에게 말이다. 당을 접수한 마린 르펜은 곧바로 ‘탈악마화’ 작업을 시작했다. 국민연합이 프랑스에서 가장 오른쪽인 15%만의 정당이 아니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내 집권 가능한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게끔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우익과 중도층, 일부 좌파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마린은 당의 이미지를 온건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녀는 당 내부의 반유대주의자들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당직에서 배제하거나 출당하며 내부 단속을 했다. 탈-악마화 전략의 정점은 2015년에 일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은 당수에서 물러난 후에도 몇 차례 극우적 소리를 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홀로코스트가 ‘사소한 사건’이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었다. 당 내외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고, 마린은 고뇌한 끝에 결국 그녀의 아버지마저 역사의 저편으로 보내버렸다. 장마리 르펜은 자신이 만든 정당에서 자신이 만든 딸에 의해 퇴출당했다. 부녀의 관계는 다시는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이 시기 르펜은 정책과 언어도 중도화시켰다. 장마리 르펜이 동성애를 혐오하고 낙태를 반대했다면, 마린은 동성애자들도 포용하고 낙태도 제한적으로 찬성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민자들과 이슬람을 상대로 대놓고 인종차별을 했다면, 마린은 그보다는 이민자들이 프랑스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테러를 저지르며 성범죄를 일으킬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제한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을 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외치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고, 유로존과 유럽연합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이민과 경제 정책의 공통된 키워드는 반세계화였다. 르펜은 ‘세계화란 이민자가 들어와서 일자리를 훔치는 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 포퓰리스트 연대를 밀어붙이며 자신을 세계화의 물결에 맞서 프랑스인들을 지켜내려고 분투하는 투사로 그려냈다. 마린 르펜은 극우 딱지를 거부하면서 그녀가 프랑스의 복지 국가 시스템을 지켜내려고 한다는 점을 강조해 스스로를 오바마의 왼쪽에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르펜의 탈-악마화 전략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은 이슬람주의를 탄압하고, 이민을 95% 축소하고, 그들에게 가는 혜택을 없애면서 프랑스의 복지 시스템을 보호하고, 유럽연합 탈퇴를 추구하며, 대기업에게 부담을 씌우고 소상공인을 보호하는 플랫폼을 선보였다. 그녀는 18% 가량을 득표해 준수한 3등으로 마무리했고, 사르코지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해 선거의 승패를 가르며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2002년 정점을 찍고 하락하던 영향력과 지지세가 반등한 것이다. 2014년 유럽연합 의회선거와 2015년 지방선거는 마린에게 더욱 힘을 실어줬다. 국민전선은 전자에서 무려 24석을 획득하며 의석수를 8배나 불려 충격을 주었다. 지방선거의 경우, 비록 투표율이 낮았던 영향도 컸지만, 당 사상 처음으로 득표율 1등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시장직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한때 사회당과 공산당 같은 좌익 정당들을 지지하던 노동자들이 대거 국민연합을 지지했다. 2017년 대선 기간 동안 르펜은 난민에 대한 분노, 이슬람에 대한 분노, 유럽연합에 대한 분노,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 엘리트에 대한 분노를 모두 하나로 묶어서 그에 기반한 공격적인 포퓰리스트 캠페인을 펼쳤다. 분노의 파도에 올라탄 그녀는 선거 기간 거의 내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강력한 맞수가 등장했다. 정부여당 출신 에마뉘엘 마크롱이 중도신당을 창당해 출마한 것이었다. 경제적 우파와 사회문화적 진보를 내세운 마크롱은 신선함과 성공적인 선거전략을 통해서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1차 투표에서 르펜을 제치며 그녀와 함께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마린 르펜의 최대 관건은 그녀가 아버지에 비해 얼마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 수 있는지였다. 마크롱과 르펜의 양자대결 지지율은 선거기간 내내 줄곧 65~35와 60:40 사이를 오갔다. 비록 그녀를 경계하던 좌파들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마크롱을 지지해 승산은 없는 싸움이었으나, 여전히 그녀의 아버지보다 두 배나 잘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르펜에겐 다른 문제점이 두 개 있었다. 첫째로 그녀는 마크롱과의 TV 토론을 망쳤고, 둘째로 당시 국민전선의 지지층은 투표율이 낮은 청년층과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편중되어 있었다. 결국 결선투표 당일날 르펜은 최종 33.9%를 득표했다. 아버지와 비교해서 두 배 가까이 늘어나 탈-악마화 전략의 효용성을 입증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직 수권정당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과제를 안겨줬다. 또한 여론조사보다 부진했던 점은 르펜 개인에게도 약간의 아쉬움을 주는 결과였다. 대선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드디어 8석의 의석을 확보해 (비례대표제로 치뤄진 1986년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 성적을 받았다. 자신의 길이 옳았다는걸 증명해낸 르펜은 탈-악마화 작업을 가속시켰다. 그녀는 2018년 마침내 국민전선의 이름을 국민연합으로 바꾸면서 당을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방점을 찍었다. 국민연합은 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고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대를 지지하는 등 꾸준히 마크롱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들의 압력은 마크롱 정권이 당초 진보적인 편이었던 이민과 이슬람 정책을 보수적으로 틀게 만들었다. 하지만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5년 전에 살짝 못 미치는 성적을 얻고, 2021년 지방선거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마크롱과 함께 공동으로 패배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르펜은 당의 지지층을 확대하기 위한 신인 육성을 시도했고, 조르당 바르델라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알제리와 이탈리아 이민자 혈통인 바르델라는 청소년때 국민연합에 가입한 후 르펜의 총애를 받았고, 당 대변인을 거쳐 유럽연합 의회 의원이 되었다. 뛰어난 언변과 준수한 외모가 강점인 바르델라는 르펜의 최측근이 되어 ‘국민전선’이 아닌 ‘국민연합’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2022년 말 르펜에게서부터 당대표직을 물려받게 된다.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르펜은 더욱 더 중도화된 정강정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사형제 폐지, 나토와 유로존, 유럽연합 탈퇴 같이 국민 다수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공약들을 철회하거나 더 온건하게 수정했다. 또한 이미 그녀의 강점이자 아이덴티티인 이민과 이슬람 이슈는 덜 강조하고, 대신 프랑스인들의 구매력을 촉진시키기 위한 간접세 감세 정책 등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는데, 바로 극우 후보 에릭 제무르의 등장이었다. 르펜의 중도화 전략은 필연적으로 극우 유권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유명 극우 작가이자 논객인 제무르는 그들의 불만을 이용해 부상했다. 그는 동성혼 재금지를 주장하고 가부장제의 부활을 외치면서 반동주의에 가까운 사회문화관을 내비쳤고, 경제적으로도 감세와 연금개혁 같은 우파적 의제들을 보호무역과 섞었다. 제무르는 이민을 사실상 완전히 틀어막는 것을 주장했고, 이슬람주의만 비판하던 르펜과 달리 이슬람 자체를 비난하면서 스스로를 이슬람에 맞서는 수호자로 그렸다. 제무르는 이 모든 것을 매우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어조로 주장했다. 마린이 그토록 틀어막고 싶어했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유산들이 돌아와 그녀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장마리 르펜과 여러 구 국민전선 인사들은 르펜 대신 제무르를 지지했다. 국민연합에서 르펜의 조카를 비롯한 여러 당원들 및 당직자들도 이탈했고, 제무르는 순식간에 약 15%의 지지층을 확보하며 르펜을 위협했다. 르펜은 이런 제무르의 위협에 대해 제무르의 강점을 역이용하자고 했다. 그녀는 제무르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자신이 쫓아낸 극단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면서 그에게 오히려 극우 프레임을 넘겼다. 또한 제무르는 문제점들에 대해 선동만 할 뿐이고, 그에 비해 자신은 현실적인 대책을 가지고 있다면서 집권 시 준비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제무르 캠프는 극보수주의적이고 선동적인 색채를 계속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르펜의 프레임에 힘만 실어줬고 피로감을 유발했다. 급부상한 제무르는 얼마 안가 그 동력을 상실해 르펜보다 조금 더 낮은 박스권에 갇혔다. 결정타는 바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르펜과 제무르는 모두 과거 푸틴과 러시아를 두둔하고 옹호하는 전적으로 인해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둘의 정치적 인프라와 노련함의 차이가 드러났다. 르펜 캠프는 푸틴을 비판하고 당 공보물 등에서 그의 흔적을 지우면서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한편, 전쟁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생활비 부담 증가 같은 경제적 여파를 강조하면서 이미 자신이 예전부터 준비해온 경제 공약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지갑을 보호하겠다는 프레임으로 전환했다. 반대로 제무르는 오히려 친러 프레임에 스스로 걸어들어갔다가 황급히 이를 다시 부정하며 혼선을 빚었고, 이 위기를 타개한답시고 더욱 극단적인 이민 정책을 내놓는 등 스스로 자멸했다. 기존 제무르 지지층의 과반이 이탈했고, 르펜은 그들을 모조리 흡수하며 결선투표로 직행했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위기 상황에서 다시 한번 좌파들에게 극우 르펜은 안된다고 호소했고, 대부분의 좌파들은 그 말을 듣고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마크롱에게 투표했다. 르펜은 그래도 자신이 오래 준비해온 경제 이슈를 부각시키며 한때 마크롱의 턱밑까지 쫓아왔지만, 결국 좌파 세력의 결집 때문에 막판에 격차가 다시 벌어져 58:42로 최종 마무리를 했다. 승리가 눈앞에 보였던 르펜에겐 아쉬운 결과였지만, 프랑스 극우 진영에게 있어서 역대 최대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 두 달 후에 치뤄진 국민의회 선거에서 국민연합은 대약진했다. 바람을 잘 타고 의석수를 8석에서 89석으로 11배나 불린 것이다. 국민연합 당선을 막기 위해 극좌부터 중도우파까지 결선투표에서 전부 힘을 합치던 자칭 ‘공화국 전선’도 점점 허물어져감을 뜻했다. 국민연합은 당 역사상 최초로 의회에서 유의미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르펜은 탈-악마화, 중도화 작업의 정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기존의 전투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강경 대여투쟁보다는 협치와 토론을 통해 의제를 주도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국민연합이 단순한 항의투표가 아니라 실제로 국정 운영이 가능한 프로페셔널한 정당이 되었음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국회에서 난동을 피우는 프랑스의 극좌/좌파 정당들과 대비되어 현대 프랑스 사상 처음으로 국민연합보다 극좌파가 더 민주주의에 위협이라는 여론조사가 나오게 했다. 이런 태도는 2023년 프랑스 연금개혁 국면에서도 극명히 드러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중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퇴직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인상하는 조치를 밀어붙였고, 좌파 세력은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지지층을 거리로 불러들여 폭동을 일으켰다. 르펜은 연금개혁 자체는 반대하면서도 폭력 시위 역시 용납할 수 없다며 양비론을 펼치면서, 그 대안으로 국회에서 토론을 통해 합의하자고 말하며 합리적인 정치인 이미지를 얻어 가장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르펜은 정책적으로도 다시 한번 변신했는데, 옆나라 이탈리아에서 똑같이 ‘파시스트의 후예’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범-우파 연정을 수립해서 집권하는데 성공한 조르자 멜로니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강경우파 정치인 멜로니는 노동자들과 소상공인, 거대자본의 적절한 균형을 맞추면서 동시에 외교적으로 러시아와 거리두고 범서방주의적 모습을 보여 극우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희석시키며 집권에 성공했다. 2010년대 초중순과는 다르게, 오늘날 르펜은 더이상 대기업에 대한 증세와 복지 확대, 좌우를 가리지 않는 포퓰리스트 연대를 외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는 규제 완화와 법인세의 추가적 인하를 주장하며 부르주아들과 화해하고 있고, 이민자 혜택 폐지를 비롯한 일부 지출 감소를 통해 재정 안정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노동 계급의 이탈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자본가들의 지지도 얻어내는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는 기존의 ‘좌도 우도 아닌 프랑스’식의 포퓰리스트 연합의 구호에서 벗어나 범-보수 진영의 단합을 말한다. 이미 그녀에게 올 수 있는 좌익 표는 다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외교적으로도 기존에 비해 러시아와 확실히 거리를 뒀다. 2010년대 르펜은 프랑스 은행들이 자금을 빌려주지 않자 러시아 계열 은행에서 돈을 빌린 적이 있고, 푸틴의 크림 반도 점령을 옹호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그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한적 지원은 찬성하고 있고, 그녀의 최측근 바르델라는 그보다도 더 대서양주의적이다. 기세를 탄 국민연합은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득표율은 31.5%, 의석은 80석 중 31석을 차지하면서 다른 정당들을 훨씬 앞서가는 독보적인 1등이 되었다. 국민연합은 이 대승에 환호했지만, 승리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선거 국면에 돌입해야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돌연 국면 전환을 위해 의회 해산을 선언하며 긴급 총선을 연 것이다. 마크롱의 도박수는 국민연합에게 호재였다. 국련은 유럽연합 선거 대승의 기세를 몰아 총선에서 아예 과반을 목표 삼았고, 여론조사는 이를 뒷받침했다. 정통 우파 공화당 내의 친-국련파와 선거연합을 맺어 지지세를 확장하고 변수를 줄인 국민연합은 1차 투표에서 33.2%를 얻으며 압승했다.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 특성상 국민연합이 총리 후보로 내세운 바르델라가 마크롱과 동거정부를 꾸릴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극좌부터 중도우파를 아우르는 다른 정당들은 국민연합의 승리를 막기 위해 뭉쳤다. 이들은 2차 투표 직전 대다수 지역구에서 자발적으로 단일화를 이끌어내며 극우만큼은 안된다고 호소했고,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국민연합의 의석 예측치는 점점 하락했다. 결국 선거 당일 한때 최대 350석도 가능해보였던 국민연합은 겨우 142석을 차지했다. 또다시 신기록을 돌파했지만, 기대에는 턱없이 못 미쳐 실질적으로 패배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선거의 열기가 가라앉자, 국민연합이 찜찜하긴 해도 승리를 거둔게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좌파와 타협하고 싶지 않던 마크롱은 새로운 우익 총리를 뽑으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국민연합의 동의가 필요했다. 국민연합에 대적하려고 총선을 열은 주제에 오히려 국민연합에 정권의 목줄이 잡힌 형국이 된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합은 처음 인준해준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지나친 긴축을 추구한다면서 몇 달 후 그를 날려버리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르펜과 국민연합에게 이토록 강력한 힘이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2025년은 지금까지 마린에게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척 힘든 한 해가 되고 있다. 우선, 그녀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은 1월 7일 노환과 오랜 심장 지병으로 인해 결국 사망했다. 당시 마린은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마요트를 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그녀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충격과 슬픔에 빠져 우는 모습이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적 위기도 찾아왔다. 2022년 대선 도중, 르펜은 동료 의원들과 함께 과거 EU 자금을 빼돌려서 당을 운영하는데 썼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이미 그 전에도 비슷한 류의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 의혹은 그 규모에 있어서 훨씬 심각했다. 르펜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1심에서 징역과 피선거권 박탈형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항소를 제기했고, 그 결과는 2026년 중순에 나올 예정이다. 만약 여기서도 출마가 제한된다면, 그녀는 그토록 꿈꿔온 대통령직을 얻을 최적의 기회가 직전에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애제자 조르당 바르델라가 대신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르펜을 혈육처럼 따르는 바르델라는 젊은 나이와 빼어난 언변,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이미지 등이 개인적인 강점으로 꼽힌다. 200만명이 그의 틱톡 계정을 팔로우하며 그의 SNS에 열광한다. 그는 마린에 비해 장마리 르펜의 망령에게서 훨씬 자유롭다. 개인적인 가정사로 노동 계급에게 호소력이 있고 프랑스의 기업가들과도 친분이 있어 전통적 지지층과 중도우익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하지만 바르델라에겐 약점도 많다. 그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20대 전체를 당직 생활을 하면서 보냈기에 일을 할 줄 모른다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식의 공격에 취약하고, 반대로 그가 맞설 상대들에 비해서 정치 경력도 짧다. 엘리트주의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과 다르게 대학교를 중퇴했고, 게임을 좋아한다고 공격도 받는다. 르펜이 만들어낸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도움 없이 자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많다. 그럼에도 당장은 국민연합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 진출은 여전히 매우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르펜과 바르델라 모두 1차투표 가상 다자대결에서 30~35%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상당한 격차의 1등을 유지하고 있다. 당의 세력과 조직력은 역대 최고 수준이고, 점점 더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지금껏 이런 기회가 온 적이 없는 국민연합에 있어서, 다음 대선의 관건은 과연 창당 50여년 만에 마의 50%를 뚫을 수 있는지가 되리라. 참고자료 https://jacobin.com/2018/10/jean-marie-le-pen-front-national-memoir https://www.politico.eu/article/marine-le-pen-trial-sentence-jean-marie-france-far-right-politics-jordan-bardella-national-rally/ https://www.theguardian.com/world/article/2024/jun/25/france-far-right-national-rally-history-1972-marine-le-pen https://www.politico.eu/article/marine-le-pen-for-frances-national-rally-the-past-still-looms/ https://apnews.com/article/jordan-bardella-profile-france-far-right-le-pen-afb0b80470a814b8d6bacf70ef9bd267 https://berlinpolicyjournal.com/la-dediabolisation/ https://www.lemonde.fr/en/opinion/article/2022/03/29/the-slow-fall-of-eric-zemmour_5979275_23.html https://jacobin.com/2024/06/marine-le-pen-france-business-elite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인질은 죽이면 그만: 이집트 대테러부대 잔혹사
대테러부대, 말 그대로 테러범들 때려잡는 부대다. 1972년에 일어난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각국은 앞다투어 대테러부대를 만들었고,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집권중이던 욤 키푸르 전쟁의 영웅, 안와르 시다트는 친미정책을 펼치면서 소련군 고문관들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을 국가로써 인정하는 등, 아랍 근본주의자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로 낙인찍혔고, 이들에 의한 테러 활동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에 대응하여 '사이카 특수부대'가 1978년에 창설된다. 이후 1978년 2월 18일.... 키프로스, 니코시아-힐튼 호텔 컨벤션홀에서는 제6차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회담에는 이집트측 대표로 당시 이집트 문화부 장관이자 사다트의 절친, 유슈프 시바이가 참석한 상태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도 옵저버로 회담에 참석했다. 회담이 끝나고 시바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2명의 암살자가 그에게 9mm 권총을 난사했고, 그는 현장에서 바로 즉사했다. 암살 후 두 테러리스트들은 정상회담에 참가한 대표단 구성원 중 약 30명을 호텔 식당에 감금한 뒤에 키프로스 당국이 그들에게 비행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수류탄으로 인질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키프로스 당국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신속하게 키프로스 밖으로 꺼지라는 의미에서 키프로스 항공 소속의 DC-8 1대를 제공했다. 테러범들을 태운 비행기는 라르나카 국제공항에서 이륙, 지부티,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에 망명을 시도했으나 이들 국가들이 모두 착륙을 거부하는 바람에 몇 시간 후에 다시 키프로스에 착륙해야 했다.... 한편, 풀려난 인질 중에는 PLO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의 수석보좌관이 있었는데, 전직 테러리스트였던 그는 키프로스 대통령 스피로스 키프리아누에게 전화를 걸어 12명으로 구성된 '포스 17' 특수부대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아라파트의 개인 경호부대로써, 창설자부터가 1972년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쏴죽이고 다닌 '검은 9월단'의 핵심 멤버였던 하산 살라메였다. 변변찮은 대테러부대가 없었던 키프리아누는 이를 수락하고 포스 17이 주둔하고 있는 베이루트로 비행기를 급파해 그들을 키프로스로 데려왔다. 이들은 납치범들과의 상황이 악화될 경우를 대비하여 터미널 내부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배치된다. 한편, 자신의 부랄친구가 암살당했다는 것을 보고받은 안와르 사다트는 격노하며 즉시 키프리아누에게 인질을 구출하고 테러리스트를 카이로로 인도하라고 요구한다. 키프로스 대통령은 사다트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서 구출 작전과 협상을 직접 감독하겠다고 약속하며 직접 공항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던 사다트는 마침 얼마전에 창설된 사이카 특수부대를 C -130에 태워 키프로스로 파견하라고 지시한다. 근데 문제가....이집트 국방부에서는 보안을 위해 키프로스에게 "인질 구출을 돕기 위해 사람들이 오고 있다"고만 말하고 비행기에 누가 타고 있는지, 어떤 비행기가 오는지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행기가 키프로스에 착륙하자마자 사이카 부대원들은 즉시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고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 3명이 탑승한 지프차를 필두로 약 58명의 부대원(74명이라는 주장도 있음)들이 주기된 DC-8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문제라면 이미 테러리스트들은 키프로스 군대에 항복했고, 인질들은 전원 석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뭘까 이 병신들은 한편, 갑자기 C-130이 활주로에 착륙하더니 소총을 짊어진 군인들이 빠르게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키프로스군은 이집트군인지 도적떼인지 모를 무언가에게 즉각 진격을 멈추고 투항하라는 경고방송을 내보냈지만..... 이집트군 지프차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기관총을 키프로스군에게 난사하기 시작, 이에 기겁한 키프로스군은 들고있던 RPG를 지프차에 발사해 탑승자 3명을 통구이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교전이 시작된다. 키프로스군이 공항 터미널 근처에서 매복중이었던 반면에, 탁 트인 공항 활주로와 주기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이집트군은 키프로스군의 기관총 사격에 하나둘씩 벌집핏자가 되어갔고, 여기에 더해 키프로스군이 106mm 무반동/포를 이집트군의 C-130H의 기수부에 명중시켜버려 조종사와 항법사 3명을 즉사시켜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 활주로에서 거의 1시간 동안 산발적인 교전을 벌인 양측은 교전 과정에서 에어프랑스 항공기 1대를 벌집으로 만들었고, 이집트군과 키프로스군 양측 모두가 제압사격을 가한답시고 키프리아누가 있던 관제탑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버리는 등.. 온갖 병신짓을 저질렀다. 참고로 팔레스타인이 파견한 포스 17 대원들은 여기에 합세해서 이집트군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고... 결국 이집트 특공대원 중 15+3명이 사망했으며, 15명은 총상을 입고 라르나카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시바르를 암살한 암살범들은 키프로스인들에게 체포되어 이집트로 인도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았다. 2월 20일, 이집트는 키프로스 주재 외교관들을 철수시키고 자국에 있던 키프로스 외교관들을 모두 추방시켰다. 이집트와 키프로스는 1981년에 안와르 사다트가 암살될 때까지 수년간 단교했다. 근데 여기서 키프로스가 잘못한게 도데체 뭘까...? 키프리아누 대통령은 이집트에게 화해와 사과를 제안했으나 키프로스가 이집트의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고 못박았다. 시리아나 리비아같은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를 비난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달래기 위해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해줬다. 국제적으로 개망신을 당한 이집트군은 부대 이름을 '사이카 특공대'에서 '777부대'로 변경함과 동시에 서방 특수부대의 교관들을 초빙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부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프로스 사건이 일어난지 7년이 지난다. 1985년 11월 23일, 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 이집트항공 소속의 B-737 1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콜사인은 이집트항공 648편, 6년 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들어진 B-737-266으로 아테네와 카이로를 잇는 정기편이다. 39세의 하니 갈랄과 이마드 무닙이 조종을 맡는다. 승객 92명, 승무원 6명이 탑승한 737기는 오후 8시가 되어서야 활주로에서 이륙한다. 2시간 뒤에는 카이로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이륙한지 10분 후, 3명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팔레스타인 파타 혁명위원회(ANO/FMT)소속의 알딘 모하메드, 살렘 차코레, 오마르 레자크였다. AK-47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그들은 순식간에 비행기를 장악했고, 리더인 살렘 차코레가 탑승객들의 여권을 확인하는 동안 오마르 레자크는 조종석으로 가서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했다. 동시에 차코레는 유럽, 호주, 이스라엘, 미국 국적의 승객을 항공기 앞부분에 앉히고 나머지 승객은 뒤쪽으로 보냈다. 이후 여권을 압수하기 위해 차코레는 항공보안관으로 탑승한 이집트 보안국 요원인 무스타파 카말(26세)에게 다가갔는데, 카말은 자신의 여권을 꺼내려는 듯 코트에 손을 넣었다가 9mm 자동권총을 꺼내 차코레의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이후 그와 2명의 항공보안관들은 다른 납치범인 나르 알딘 모하메드와 총격전을 벌였고, 총소리를 들은 오마르 레자크가 합류하여 3:2 멸망전이 시작된다. 19발의 총격이 가해진 끝에 동체에 여러개의 구멍이 생겨 기체 내부에서 압력차로 인한 감압이 발생했고, 648편은 14,000피트(4,300m)까지 급강하한다. 리비아는 납치범들의 원래 목적지였지만 (사진은 1977년부터 2011년까지 사용된 리비아 국기) 리비아까지 가기엔 연료가 부족했기에 비행기는 몰타로 향했다. 그러나 몰타 당국은 648편의 착륙을 거부한다. 몰타 정부는 이전에도 납치된 항공기의 착륙을 거부했는데, 1982년 9월 23일에 이탈리아로 가던 알리탈리아 항공기가 납치되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납치범들은 고집을 부리며 조종사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몰타에 위치한 루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도록 강요했다. 루카 국제공항에서는 648편의 착륙을 막기 위해 ILS를 꺼버림과 동시에 무전망을 닫아버리고 활주로 조명까지 꺼버렸지만, 노련한 조종사들은 손상된 항공기를 몰타에 안전하게 착륙시킨다. 처음에 몰타 당국은 이 사건을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몰타는 아랍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12년 전 KLM 861편이 비슷한 상황에서 몰타에 착륙했을때 테러범들과의 협상을 통해 상황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몰타 총리 카르메누 미프수드 보니치는 공항 관제탑에서 테러범들과 직접 협상하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승객이 풀려날 때까지 항공기에 연료를 공급하거나 비행기를 포위한 몰타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테러범들은 필리핀인 16명과 이집트인 승객 16명, 그리고 부상당한 항공보안관 2명을 비행기에서 내보냈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몰타 정부가 거부하자 납치범들은 인질들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첫 희생자는 24세의 이스라엘 여성 타마르 아르치로, 머리와 등에 7.62mm 소총탄이 쳐박혔다. 얼떨결에 납치범들의 리더가 된 레자크는 자신들의 요구 (군대의 철수, 비행기 급유/수리)를 몰타 정부가 들어줄 때까지 15분마다 1명의 승객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다음 희생자는 또 다른 23세의 이스라엘 여성 니찬 멘델슨이었다. 멘델슨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았고, 끝까지 저항했지만...레자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비행기 출입구로 끌고 나간 후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멘델슨이 피격당한 직후, 몰타군이 비행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조종석에서 그들을 발견한 레자크는 군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대기하고 있던 협상가들은 그에게 비행기가 몰타를 떠나면 주이탈리아 미군이 비행기를 격추할 것이라 말하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레자크는 이에 격분하며 옆에 앉아있던 28세의 미국인 생물학자 스콧 베이커를 총으로 쏴버렸고, 15분 후에는 38세의 미 공군소속 군무원이었던 스칼렛 로겐캠프를 살해하고 시신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인질들이 지루한 대치 끝에 하나둘씩 죽어나가자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를 포함한 NATO 국가들은 모두 몰타 정부에 자국 대테러부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니, 사실 제안이라기보단 노골적인 압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소 냉전에서 중립을 표방하던 몰타 정부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도착하여 해당 공항을 장악하는 것을 우려했기에 이들의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미군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위치한 라인마인 공군기지의 중증외상 후송팀을 태운 미 공군 C-130 허큘리스와 비스바덴 공군 의료센터의 신속 파견 수술팀이 나폴리의 미군 병원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손가락만 빨고있어야 했다. 대신 미국은 자타공인 이집트 채강의 특수부대인 777부대를 활용하기로 결정, 몰타 당국에 미 델타포스 수준의 특수부대 대테러팀을 이집트가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줬고, 몰타는 이들을 동원해 납치범들을 진압하기로 결정한다. 카말 아티아 소장이 지휘하는 777부대는 미군 연락장교 4명과 함께 몰타로 출동했고, 11월 25일 아침에 항공기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작전 자체는 1994년 에어프랑스 8969편의 사례처럼 군인들이 닥돌후 문을 파괴시켜 기체 내부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새끼들이 계획대로 움직였으면 이 글이 써지지 않았겠지.. 일단, 이집트 특공대원들이 새벽부터 야음을 틈타 648편으로 접근하는 순간, 몰타 국제공항에서 전기세를 아낀답시고 예고도 없이 활주로와 주기장의 라이트를 전부 꺼버리는 병신같은 일이 일어났다. 근데 이게 몰타측의 잘못은 아니었던게 애초에 777부대가 사전합의도 없이 원래 계획된 작전시간보다 2시간 일찍 작전을 시작해버렸다... 당연히 이에 이상함을 느낀 납치범들이 비행기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는 와중에 777부대원과 눈이 마주쳐버렸고, 테러범들은 곧바로 부대원들에게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좆됐다싶은 777부대원들은 멘탈을 붙잡고 C-4로 승객석과 화물칸 문을 폭파, 기체로 진입해야 했는데 2kg에 달하는 C-4 폭약을 사용했던 탓에 화물칸에 장착된 비상용 산소탱크가 폭압으로 폭발해버려 화재가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임산부와 어린이를 포함한 승객 52명이 항공기를 뒤덮은 화재로 인해 질식사했고, 5명은 이집트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 항공기 습격으로 인해 납치범들에게 살해되지 않은 87명의 승객 중 54명과 승무원 2명, 납치범 1명이 사망한다.. 그와중에 777부대는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었지만, 자기가 설치한 폭약에 다리가 날아간 대원 1명이 있었다. 오마르 레자크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레자크는 조종석에서 나오다 777부대원에게 총을 맞았고, 갈랄 기장이 조종석에 배치된 도끼로 레자크를 공격했지만 레자크는 승객으로 위장해 항공기를 성공적으로 탈출, 이후 병원에서 몰타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는 미국으로 송환되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777부대는 이후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고 그냥저냥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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