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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성추행 피해자 고소후기 (3줄요약 있음)
지하철타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 이상한 할줌카스가 엉덩이만지면서 갑자기 욕하면서 소란피움소란이 커지자 경찰에 전화 후 신고함경찰에게 사건피해 설명하고 피해사실 접수종이를 적음현장에서 할줌카스 신병확보후“이년맞음?” 하면서 사진찍어서 보여줌지하철에서 발생한 일이라 철도경찰으로 넘어가고 피해자 조사함피해자 조사과정중 CCTV에 모든 장면 다 녹화됨하지만 경찰이 피해자가 남자고 피고소인이 여자라서 힘들 수도 있다 이지랄함(당시 수사관도 여자였음)이렇게 고소인, 피해자 조사가 끝났음(이시점 작년 3월즈음)그런데 피고소인이 자기는 아무죄 없는데 왜 수사받아야함? 이러면서경찰 출석요구 거부해서 경찰이 체포영장 발부 후 피고소인 수사했다는 연락받고 검찰 송치되었다는 연락을 받음(이시점 작년 8월)그런데 우리 갓한민국은 3등시민인 남자에겐 자비롭지 않다.(내 사건은 맨위 성폭력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건인데 경찰이 함께 넘김)난 일관된 진술과 CCTV를 증거로 (모든 정황과 엉덩이 만지는거 나옴) 주장하였지만 수사관이 송치의견으로 혐의없음 제시함이상태에서 검찰 수사관이 3번이나 교체되고 계속 시간만 질질 끌림올해 3월 말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검찰 수사관분이 전화를 줌“이사람이 전과도 많고 출석도 안하고 증거와 진술을 볼때 경찰의 송치의견이 다소 납득이 안간다. 검사님이 이에 대해 다시금 진술 해줄 수 있을지 동의를 구하고 싶다. 또한 좀 길고 자세하게 사건에 대해 다룰꺼라 좀 싫은 기억이고 불편한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가능한가?”대충 이런 느낌의 말을 함난 동의하고 3시간 가량 별도 진술을 따로 헀음진짜 엄청 자세하고 세세하게 다 물어봄거진 탈북자가 국정원가면 이런식으로 물어볼까 싶을정도로 다 물어봄그리고 약 1주일 뒤구약식 500만원이 피고인한테 청구됨오늘 민사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검찰에 문의 한 결과별도의 이의제기가 없어서 다음주 쯤 확정이 날 것이라고 통보받음통보 받는대로 피해보상을 청구할 계획임3줄요약1. 남자가 성추행 피해자면 경찰부터 비협조적이다.2. 검찰에셔 사건이 밀리고 조직개편때문에 의외로 오래걸린다.3. 검사를 잘 만나야 일이 잘 해결된다.이외에 질문받음
작성자 : ㅇㅇ고정닉
정성글) 히틀러는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나 -2-
https://m.dcinside.com/board/newconservativeparty/4452403?headid=350 정성글) 히틀러는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나 -1- - 새로운보수당 마이너 갤러리아돌프 히틀러 하면 대중적인 이미지는 ‘민주주의의 결함’,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재자’라는 것이다.지금도 한국의 여러 TV 교양 프로그램에선 이런 시각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이 사실을 전파하며, 그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m.dcinside.com우리는 이전까지 파펜의 계획에 따라 히틀러가 ‘얼굴마담’으로 총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원래대로라면’ 히틀러는 아무 영향력 없이 부총리 파펜 이하 관료들에게 휘둘려야 했다. 그런데 왜 역사의 수레바퀴가 히틀러를 권력자로 안내했을까?총리로 취임한 히틀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언론통폐합이었다. 그는 친공산당, 친사민당 언론을 정간하고 공산당의 집회를 원천봉쇄하는 명령을 발표했다.당연히 공산당, 사민당 지지자들은 언론 탄압을 중단하라며 곳곳에서 시위를 일으켰는데, 히틀러는 자신을 따르던 나치당 돌격대(SA)를 보조경찰로 집어넣어 탄압을 강화했다. 돌격대에게 공산당원을 향한 발포 허가도 내려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당, 공산당 지지자들의 반발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형국에서 갑자기 독일 국회의사당이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한다.현재까지 진범이 누군지 모르는 이 사건은 히틀러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당시에도 국회의사당 방화에 대해 독일 사회에서 이런저런 말이 돌아다녔지만, 히틀러는 이것이 공산당원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방화 혐의로 체포된 공산당원 마리누스 판 데르 루페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히틀러 내각의 결론은 그러했다.히틀러는 사건 이후 ‘국민과 국가의 보호를 위한 긴급명령’을 통해 정부의 자의적 판단 하에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총선을 4일 앞둔 1933년 3월 1일에는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1,500명의 공산당원과 국회의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지니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1933년 3월 4일, 공산당원 50명이 나치 돌격대와 충돌해 사망하던 혼란 속에 치러진 총선 결과 나치가 득표율 43.9%를 얻어 1당이 된다.그런데 우리는 득표율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 그냥 보면 나치가 1당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서도 나치의 득표율이 50%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아무리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고, 죽여대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도 나치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다지 동의 받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다가 3월 24일, 독일 국회에선 이른바 ‘전권위임법’ 표결을 앞두고 논란이 증폭되었다.전권위임법은 입법권을 국회가 아니라 히틀러 내각이 가져가는 것을 핵심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법이 통과되면 히틀러가 위헌이든 합헌이든 법률을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었고, 외국과의 조약도 국회 동의 없이 체결할 수 있었다.히틀러는 법안 표결을 앞두고 "이 법은 4년간만 유효할 것... 4년만 주면 독일을 바꿔놓겠다"고 말하며 가결을 종용했다.당시 규정에 따르면 국회 재적의원의 2/3 이상 출석, 출석의원의 2/3 이상 찬성으로 법안이 가결될 수 있었다. 당시 재적의원은 647명, 히틀러에 적대적이었던 사민-공산당 의원들은 201명으로 사민-공산당이 손잡고 15명의 의원만 설득해 국회에 출석하지만 않아도 통과될 수 없었다.그런데 히틀러는 여기에 부칙을 달았다. '정당한 사유 없이 무단으로 출석하지 않은 의원은 출석해서 기권표를 던진 것으로 판정하겠다'는 유권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결국 전권위임법은 '찬성(기권 포함) 444, 반대 94'로 통과된다.전권위임법이 통과되자마자 사민당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이제 국내의 반대 세력을 일소한 히틀러는 당 내부까지 정리하려 했다.당시 나치의 정치깡패인 돌격대는 반나치 인사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폭력 행위로 인해 민중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였다. 이미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자신에 대한 시선을 바꿀 겸 하여 쓸모없어진 돌격대를 숙청할 생각이었다.돌격대 수장인 에른스트 룀은 눈치 없이 히틀러에게 ‘돌격대를 정규군으로 편입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며 히틀러의 신임을 잃는다. 거기에 더해 히틀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던 파펜이 자신의 뜻대로 정국이 흘러가지 않자 1934년 6월 연설에서 ‘무근본 이기주의 품위없는 거짓말쟁이‘ 등의 발언을 하며 나치를 저격했다.히틀러는 파펜의 연설 2주 뒤인 6월 30일, 군부와 손잡고 보수 세력 내 자신의 경쟁자들을 대거 숙청하는 ’장검의 밤‘을 일으켰다. 그간 정부와 상호불가침의 관계였던 군부 장성들은 돌격대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되자 바로 히틀러와 손잡고 에른스트 룀을 포함, 9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장검의 밤 한 달 뒤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사망했다.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고향 노이데크에 매장되길 바랐지만,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타넨베르크 전투 전적지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독일인들에게 자신이 힌덴부르크의 후계자임을 보여주려 했다.힌덴부르크 사망 후 히틀러는 분리되어있던 대통령과 총리직을 합치는 법안을 발의했고, 각종 조작과 위협 속에 90%에 달하는 지지율로 이 법이 통과되며 히틀러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우리는 히틀러의 집권을 통해 여러가지를 알 수 있다. 그간 국내 교양서적, 방송에 소개된 대로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와 선동만으로 권력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히틀러는 기존 독일 보수 세력이 좌파의 약진에 공포를 느끼고 앞세운 ‘인형’이었고, 공포분위기 속에 치러진 1933년 총선에서도 과반 득표를 달성하지 못했다.히틀러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사민당과 공산당은(효율적인 견제와 반나치 투쟁을 했는지는 둘째치고) 나치에 명백히 반대했고, 파펜을 비롯해 기존 보수세력들은 통제되지 않는 히틀러에게 반발심을 느꼈다.어쩌면 한국에서 소개되는 히틀러의 이미지는 ‘선거’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도 정치적 야합과 권모술수 앞에 제도와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걸 히틀러는 증명해보였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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