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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빨고 쓰는 레데리 시리즈101 - <튜니티>를 통해 본 서부의 사회상
영상 도입부, 많은 소가죽이 햇볕에 건조되어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목축업을 주 산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서부개척시대 당시 미국 서부의 시골 정착촌과, 그 정착촌에서 '경찰'(Police)을 대신해 촌민들의 투표나 유력자의 추천으로 선출되어 마을의 치안을 관리하는 민간 자율방범대장인 '보안관'(Sheriff) 사무소의 간판.백주대낮부터 마을로 쳐들어와 보안관 사무소 앞에서 대놓고 여봐란 듯이 행패를 부리는 무법자 무리. 이는 미국이 아직 신생국가였던 관계로 주정부 및 연방정부의 행정력이 허허벌판의 황무지였던 서부 일대에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여, 각종 범죄에 대항하는 치안유지능력이 전무하던 당시 서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묘사한 것.마을에 마련된 유치장에 감금당한 자기네 식구를 당장 석방하라며, 억지를 부리는 무법자들에게 법의 엄중함을 몸소 설파하며 저들의 석방 강요를 거부 및 경고하는 보안관. 선술하였듯 당시 서부는 광활한 면적 대비 인구 밀도가 낮았고, 또 척박한 야생의 황무지라 생활에 필수적인 기반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즉각 초동(初動)대응 수단으로서 아주 최소한의 치안력만이 간신히 유지가 되었을 뿐, 범죄자를 제도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은 매우 미흡하였음. 사실 이는 그럴 만도 한 게, 안 그래도 기반시설이 열악했던 게 그 당시의 서부인데, 법정, 재판소 등의 법리기관이나 교도소 같은 교정시설 따위가 제대로 갖춰져 기능하고 있을 리 만무함.그래서 당시 범죄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법리 검토도 없이 그냥 현장에서 보안관의 재량으로 약식재판, 즉결처형(총살)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이 역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하나하나 재판하기에는 당시 서부엔 법리기관이나 교정시설 수가 턱없이 부족했고, 거기다 마을과의 거리도 멀었음. 그래서 절충안으로 '순회 판사'(巡廻判事), 즉 일종의 '출장 판사'가 지방 또는 연방법원장의 명령을 받들어 일일이 관할지 마을을 방문하여 (보안관이 사전에 유치장에 감금해 둔) 범죄자들을 심판했음. 위 장면에서 무법자들이 말한 판사가 바로 그 '순회 판사'를 말하는 것임.여담으로 서부개척시대 당시에는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교수형 등의 최고 형벌이 남발되듯 집행되었는데, 이 또한 앞서 서술한 대로 국가 행정력의 한계가 명확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비교적 빈번하게 나타났던 현상임.무엇보다 수감된 범죄자의 동료들이 구출하러 무력 급습을 올 수도 있어서, 고수위의 신속한 처벌은 사실 불가피한 까닭이 컸음. 이렇듯 범죄자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반대로 과실범이나 단순 좀도둑 같은 경범죄를 저지른 수준이면, 가벼운 벌금형이나 태형, 그것도 아니면 그냥 머리 한대 쥐어막고 앞으론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훈방조치 선에서 끝내거나, 또는 피해자와 대면시켜 상호 합의시키는 방식으로 사건을 유야무야 종결하기도 했음.정당방위 차원에서 무법자들을 즉결처형하는 보안관. 보안관은 마을의 치안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는 자리인 만큼, 그 마을에서 제일가는 무인들인 경우가 많았음. 애당초 저 시절 보안관은 인간병기 아니면 못하는 직업이니,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여기서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사실 저 보안관은 '야매 보안관', 즉 보안관 사칭이었음, 본래 저 자는 가축 강도로, 수감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옥하여 수배중인 중범죄자였으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마을로 숨어들었으나 촌민들로부터 그 무력을 인정받아 신임을 얻어 얼떨결에 보안관 노릇을 하게 된 것. 이는 허술했던 당대의 보안관 임명 체계를 묘사한 것이기도 함.사법 체계가 미비하여 범죄자의 식별이 매우 어려웠던 그 당시엔, 저렇게 촌민들의 신임을 얻은 범죄자가 신분 세탁을 하는 경우가 많았음. 이는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한 차례 묘사된 바 있음.첨언하자면 당시 가축 강도질은 곧장 사형장으로 직행되는 중범죄였음. 목축업이 주 산업이던 그 당시에 가축은 곧 가난한 촌민들의 유일한 재산이자 이동수단이었기 때문임. 따라서 저 야매 보안관은 정체가 탄로나는 그 순간 사형 확정이고, 또 추가로 보안관 살해 및 탈옥이란 중죄를 저질렀으니, 당대 무법자들의 저승사자 '연방보안관'(U.S. Marshal)의 표적 그 자체임.이상 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에서 묘사된 당시 서부의 사회상을 짧게 살펴 봤음. 이번 시간에 내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임. 본 연재글 시리즈가 인제 100편을 넘어가기 시작했네. 앞으로도 계속 쭉 가보자고! 다음 시간에도 또 재밌는 주제로 찾아오도록 할게. 또 보자, 게이들아!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dr2&no=375241
작성자 : badassbilly고정닉
유대인 소드마스터가 땅크 몰고 아우슈비츠를 쳐부수는
2021년 6월 4일 러시아 펜싱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남자펜싱 선수/ 여자펜싱 코치였던 다비드 알렉산드로비치 두쉬만(Душман, Давид Александрович)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국제펜싱협회, IOC, 여러 유대인 단체, 폴란드 정부, 이스라엘 정부 등이 조의를 표했다. 스포츠계는 몰라도 폴란드나 이스라엘은 왜 조의를 표했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1941년 모스크바 펜싱 챔피언이 된 검사였고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진격한 소련군 중 하나로 T-34를 몰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펜스를 가장 먼저 박살낸 인물이자 그 직후 죽어가는 유대인들에게 통조림을 나누어주는 등 구호활동을 했고 이후 소련 내외에서 자신이 목격한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증인으로 참여했으며, 그 뒤 여자펜싱 코치로 자신이 이끄는 팀에 여러번 메달을 안기며 편하게 사는 듯……하다가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당시 바로 건너편 기숙사에 머물다가 죽을뻔한 목격자로 본인은 유대인이란 의식이 없었음에도 20세기 유대인이 목격한 가장 끔찍한 두 공포(홀로코스트, 뮌헨 테러)를 본의아니게 한 인생에서 겪은 기막힌 운명의 소유자였기 때문. 1923년 폴란드 그단스크, 그 당시 단치히 자유시에서 유대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소련으로 이주하며 그 이후 평생을 러시아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자 소련군 군의관으로 적백내전 여파로 장군 티오가 텅텅 빈 와중에 의무책임자로 형식상이지만 별(장군)도 단 인물이었다. 이를 보면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사상의 이유로 소련으로 갔거나 최소한 적백내전때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돌아가지 못한 인물로 추정. 본인은 유대인이란 자각이 없었는지, 혈통을 제외하면 유대교도 믿지 않았고 유대인 커뮤니티에 참여하지도 않았었다. 군의관에서 예편하고 스포츠의사가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비드는 펜싱을 시작했고 1941년 1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시의 펜싱 챔피언이 되었으나, 그해 6월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며 나라 전체가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게 된다. 다비드는 펜싱소드보다 더 효율적으로 파시스트들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소련군에 자원입대했고, 처음에 소련군은 미성년자에 유망한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그의 입대를 거절했지만 그는 서류까지 속여가며 억지로 소련군에 들어가 전차병이 되었다. 그는 소련 기갑계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하나가 된다. 동시에 그는 부상과 악연이 깊은 인물이었는데 주코프가 처음으로 지휘한 작전으로 유명한 옐냐 공세에서 대전차지뢰에 부상을 입었으나 외과 수술 후 다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포탄 관통으로 두 번째 부상을 입었다. 어지간한 나라라면 두 번이나 죽을뻔한 전차병이면 후방으로 보내줄 만도 한데 소련은 그런거 없었고 이후 제1벨라루스 전선군 소속으로 다시 전투에 투입, 바그라티온 공세에 참여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검 대신 포탄으로 낙지 파시스트들의 대가리를 깨고 그들의 시설물을 부수는 아름다운 소련군의 전통을 발견했는데, 바그라티온으로 전세가 기운 후 그는 여느때처럼 폴란드에서 진격하던 중 정체불명의 나치 시설을 확인한다. 이에 그는 T-34를 몰아 그 시설의 펜스를 가장 앞장서서 밟아 부숴 보병부대가 지나갈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이후 그 시설이 일종의 '수용소'였으나 감시하던 나치들이 도망친 후 수감자들만 남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된다. 소련 포로들은 거의 죽었고 폴란드와 그 외 유럽 전역의 '특수한' 포로들만 남은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그와 기갑부대 동료들은 굶어 죽어가는 수감자들에게 전차에 있던 모든 전투식량과 통조림 물을 나누어준 뒤, 뒤따라오던 보병들에게 인계하고 더 많은 대가리를 깰 나치를 찾으러 다시 전차 엔진에 시동을 걸고 움직였다. 나중에야 그는 그 시설의 이름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 전쟁 막바지 독일 전역에서 다시 한번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은 그는 더 이상 전선으로 복귀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소련군의 한 여성 군의관이 수술 끝에 그를 살리는데 성공한다. 그는 이 여성 군의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군의관이자 의사였던 아버지를 오랫동안 보아왔음에도 여성이 간호사가 아닌 의사로서 중상자를 치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훗날 여자 펜싱팀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나고 갑자기 다비드 두쉬만은 중요한 사람이 된다. 그가 이름도 모르고 일단 밟아부순 그 수용소가 나치 파시스트들의 가장 큰 악의이자 인류사의 오점인, 수백만의 유대인, 룸인/집시, 성소수자, 소련인 및 폴란드인등을 학살한 아우슈비츠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수용소를 발견했을 때는 별다른 수색도 없었고 이미 나치들은 대다수 수감자들을 데리고 도망간 상황이었으며 소수의 수감자들만 남은 상황이어서 정확한 상황파악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에휴 ㅈ같은 파시스트들 사람들에게 먹을것도 안주고 도망갔네 굶어죽어가는 몰골들 좀 보소"라고 학을 떼었는데 나중에 더 자세한 참상을 알게되자 자신이 있던 자리가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소련 내외에서 여러 아우슈비츠 관련 증언을 하며 홀로코스트의 핵심 증언자중 한 명으로 남게된다. 이후 그는 펜싱선수로 복귀, 5년만에 어렵게 재활에 성공하고 전쟁으로 얻은 무수한 부상을 뒤로한채 1951년 러시아 에페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끝끝내 세계적인 지위를 누리지는 못하고 선수로서는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놀라운 결정을 내리는데 1952년 소련 여자펜싱 국가대표팀 코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여자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였고 일부 보수적인 이들은 남자가 여자팀의 코치나 감독이 되는 걸 불명예로 여길 정도였는데 그는 전쟁중 자신을 생사의 기로에서 구해낸 인물이 여성 군의관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여자펜싱 선수들도 스포츠에서 평등한 권익을 누려야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소련 여자펜싱의 초창기 주춧돌이 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이 많았던 과거를 뒤로하고 소련 여자펜싱이 메달을 석권하는 것을 이끌기도 하며 뛰어난 펜싱코치로 잘 사나했……는데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당시 그는 소련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사가 일어났던 이스라엘팀 숙소 바로 건너편의 소련팀 숙소에 있었고, 이후 그 당시의 참상과 공포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그는 사건이 끝난 후에야 이것이 유대인들을 노린 테러라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이 유대혈통이라는 것이 뒤늦게 떠올라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잘못하면 그 역시 희생자 중 하나가 되었을 수 있었기 때문. 좀 특이한 인연이 있는데 1970년 다비드는 각계 펜싱계 인사들과 만나던 도중 한 젊은 서독 남자펜싱 선수를 만나게 된다. 그 선수는 다비드가 소련인이고 독소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으며 유대인이기까지 한데 자신은 동독도 아닌 서독 선수라는 것에 잔뜩 긴장했으나 다비드는 아무런 국가, 인종에 대한 편견 없이 그에게 따뜻한 인사와 여러 조언을 건내었고 이에 그 서독 선수는 감격해 평생 다비드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펜싱 선수가 바로 훗날 독일 펜싱의 전설이자 IOC 위원장까지 하는 토마스 바흐. 이 전설적인 붉은 군대의 영웅이자 아우슈비츠의 해방자, 러시아 여자펜싱의 아버지중 한 사람은 이후 스포츠인인 동시에 그 시대 유대인으로 자각하지도 않았던 본인이 보아야했던 두 번의 반유대주의 참사의 목격자로서 그 끔찍함에 대해 전해야 했던 시대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도중과 직후 대조국전쟁의 공로로 두 개의 적성훈장, 1995년 러시아 스포츠계에 대한 공로로 2급 조국공로훈장, 그리고 2020년 자서전 출간 후 2차세계대전에 대한 연구 공헌 및 그가 생전에 한 여러 영웅적 행위를 기리기 위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을 받았고 2021년 눈을 감았다. 그의 격동적인 인생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1년 뒤 자기가 소속되어 싸웠던 소련이란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난 두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 이상한 인간들이 니가 낙지니 내가 낙지니 요상한 짓거리 하는 꼬라지를 안보고 눈을 감은 점 정도.
작성자 : 나쿠로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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