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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역사와 평가
메이지 시대(1868~1912년)186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미국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일본 에도 막부의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특히 그런 에도 막부에 가장 큰 반발과불만을 품은 세력은 사츠마번과 조슈번으로 이들은 반 서양 활동을 하다가 미국과 영국에 맞서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벌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지고 서양에 배상금까지 물어내고 개항한다. (이중에서 배상금 상당부분은 에도막부가 대신 지불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 각 번에게 서양을 배척하라고 명령을 내린건 에도막부였으니 상당부분 덤탱이를 쓸수밖에 없었다.)특히 서양에 가장 큰 반발을 하며 무력시위를 하며 에도막부 타도를 주장하면 여러차레 막부전복 시도를 했던번은 조슈번으로 에도막부는 그러한 조슈번은 조정의 적이라고 선포하면 조슈정벌을 실행하지만 당시 막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있었고 조슈번은 서양에서 수입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1차 조슈정벌은 막부군이 표면적으로 승리한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슈번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2차 조슈정벌은 결국 막부군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슈정벌은 실패로 돌아간다.1866년 2차 조슈정벌의 실패로 안그래도 권위가 하락해가던 막부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으며 1867년 훗날 메이지 덴노라 불리우는 무쓰히토 덴노가 122대 덴노로 재위에 오를당시 에도막부는 조슈,사츠마, 토사번의 협박으로 대정봉환을 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그럼에도 에도막부의 쇼군인 요시노부가 거의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였고 여전히 정권을 장악할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품은 사츠마, 조슈번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와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 사이에 전쟁인 보신전쟁이 터진게 된다.보신전쟁의 첫번째 전투는 토바 후시미 전투였다.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군대를 2개로 나뉘어서 각자 도바와 후시미로 나뉘어 교토로 진압을 시작했으나 도바로 향하로 막부군은 사츠마군과 초반 포격전에 사츠마군이 쏜 포탄에 맞고 막부측 대포가 터지는 혼란이 벌어졌고 이어지는 사츠마군의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와중에 막부군의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가 탄 말이 총에 맞고 사령관이 도주하자 결국 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하고후시미로 진군한 막부군 또한 사츠마와 조슈군에게 퇴각당하면서 결국 토바 후시미 전투는 막부군의 참패로 끝난다.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사츠마 조슈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연이은 전투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에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막부군은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에도성에서 농성을 할수 있었지만 내전이 계속 장기화되면 일본의 경제가 파탄이 날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내전을 빌미로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관군에 맞선 막부측 인사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사츠마와 조슈번이 이끄는 관군에 항복한다.하지만 여전히 관군에 항복하지 않은 막부측의 잔당들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우에노 전투에서 쇼기타이를 내세운 막부잔당군을 진압하고 이후 계속 북진을 가행한다. 나가오카성에서 가와이 츠구노스케가 이끄는 나가오카번 군이 메이지 정부군을 상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가오카 성도 함락되고 이어진 아이즈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아이즈군 역시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아이즈 번 역시 항복한다.(정부군에게 항복하는 아이즈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막부군 찬당들이 훗카이도로 도주에 에조 공화국을 세우며 정부군에 대항했지만 1869년 하코다테 전투에서 훗카이도에 상륙한 정부군에게 패배하면서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에도 막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가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것이다.일본의 권력을 잡은 메이지 정부는 이와쿠라를 비롯한 사절단들을 서양에 보내 서양의 각종 근대화된 법들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공공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하며 폐도령을 내리고 징병제와 의무교육 일본의 번국체제를 철폐하는 폐번치현을 실행한다.메이지 정부가 실행한 개혁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부른건 바로 무사 계급의 폐지일 것이다. 정부는 사무라이들을 대상으로 가록을유지시킨 상태에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으며 그 가록마저도 공채로 바꾸었으며 사무라이들에게도 단발령을 내리고 폐도령까지내리자 그동안 누린 특권을 모두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결국 사츠마 사족들을 비롯한 큐슈지역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구마모토 성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지만 그런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위해 메이지 정부는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이라 불리우는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 방어력 앞에 끝내 사츠마 반군은 2달동안 지속된 수성전을 포기하고 퇴각하고 만다.이후 사기가 크게 떨어진 큐슈 반군들은 정부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반군의 대장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정부군은힘들게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세이난 전쟁이후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킬수 없다는 현실이 명확해지자 더 이상의 사족 반란은일어나지 않게 되었다.이후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헌법은 독일의 전례를 따라서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천황이 주권자임을명시하였고 천황 밑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군대의 통수권자를 천황으로 규정하였다.한편 계속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조선을 개방시키고 어느정도 조선에 대한 이권을가지고 되었고 이후 1879년 오랫동안 사츠마번의 속국이였던 류큐왕국을 완전히 합병시킨다.하지만 1884년 조선내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내에서 한동안 영향력을 크게 잃게 된 일본정부는 자국 근대화에만 집중을 가한다.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과정에서는 일본이 에도시대때 이룩한 부도 있지만.(이미 메이지 유신이전부터 일본의 경제력은 조선의경제력에 5배 이상에 달했다.) 자국민들의 희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근대화를 할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러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의 여성들을 외국에 돈을 받고 파는포주 노릇을 하였고 이러한 가라유키상으로 일본이 번돈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자금으로 쓰이게 되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일본 국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지내야만 했고 여전히 일본 시골지역에서는 먹을 식량이없어 어린 자식을 죽이는 마비키가 계속 성행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은 그러한 희망을 붙잡고 하루하루 힘든 고난의생활을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고 있었다.그러한 일본에게 마침내 행운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고 그러한 자국내 농민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조선에서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역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게 가능해졌던 것이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내 자신들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곧바로 한양으로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기습해 경복궁을 장악한뒤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갑오개혁을 실행한다. 그리고 조선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뒤 이제 동학도 진압했으니 조선땅에서 철군하자는 청나라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나라에 기습공격을 자행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청일전쟁 삽화1894년 일어난 전쟁은 청일전쟁은 처음에는 조선땅에서 일어나다가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북진하는 일본군에 의해 만주지역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풍도해전, 성환전투, 뤼순전투에서 연달아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황해해전에서 자신들보다 전력이 우위에 있는청나라 해군을 전멸시킴으로서 청일전쟁을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청나라군은 서태후와 사치와 각종 부정부패로 군비의 상당수를 횡령해서 대포에서 연달아 불발탄이 터지는등 내부에서 썩었기 때문이였다.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얻게되고 청나라 재정의 2년치, 일본재정의 4년치에 해당하는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게 된다.마침내 그동안 일본이 기울었던 노력과 근대화 과정들이 결실을 보여준 순간이라고 할수있다.하지만 상황이 계속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만 하는건 아니였다. 욱일승천하듯 나아가는 일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니 그건 바로 러시아였다.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때마침 요동반도는 러시아가 원하는 부동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요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여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압박을 가했고 당시 전세계 군사력 2위였던 러시아를 당시 이제 겨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끝낸 일본입장에서 감당해서 전쟁을 한다는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고 그러한 사실들을 일본역시 알고있었기 때문에 결국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고 말고 그런 러시아의 군사력에 놀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자신들의 부동항을 쓰게 해주는 등 각종 이권들을 내어주면서 러시아를 끌여들이자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잘못하면 러시아라는 거대한 변수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공을들인 조선을 확보하는 일마저 물거품이 될수 있었다.하지만 그때당시 그런 일본에게 큰 행운이 찾아온다. 바로 당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던 패권국 영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자 일본에 가능성을 엿보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을 후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결국 일본은 영국이란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청일전쟁이후 10년동안 힘을길러 마침내 막대한 영국의 지원을 받고 러시아를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진다.(러일전쟁의 삽화)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가 점령했던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분명히 군사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본군 역시 러시아군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었다.특히 뤼순전투는 러시아의 뤼순기지를 공격하던 도중 일본군의 총지휘관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차남까지 전사할 정도로 일본군 역시 매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지원해 주었던 영국과 미국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것 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최대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러시아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정도까지만 기대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도 더이상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는걸 거절했고 경제규모에서 러시아에 밀렸던 일본이 먼저 돈이 다 떨어질 상황에 쳐해서 전쟁수행에 크게 차질이 생긴 그때 러시아내에서 유대인 학살과 탄압에크게 불만을 품었던 제이콥 쉬프를 비롯한 많은 부유한 유대인들이 일본에 국채를 사주고 돈을 빌려주면서 일본은 다행히도 전쟁 을 계속할수 있었고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전멸시키면서 전쟁의 승기를 완전히 잡게된다.이후 미국의 중재하에 일본과 러시아는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강화협상인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된다.(포츠머스 조약에서 협상을 맺기 위해 모인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관들.)당시 일본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절대적 필요조건과 비교적 필요조건을 나누었는데 절대적 필요조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이였고 비교적 필요조건은 전쟁 배상금이였다.당시 일본은 일본이 보낸 첩자였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러시아내에서 각종 선동들을 일으킴으로서 러시아 내 곳곳에 전쟁반대시위가 벌어졌고 그러한 여론을 인식해 러시아내에서도 더 이상의 전쟁은 힘들다고 생각하고 포츠머스 조약에 일본과 강화협상을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러시아는 일본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군비가 거의 다 떨어져서 더 이상의 전쟁은 사실상 힘들다는걸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할수 없다고 말했고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과 러시아가 차지하고있던 일부 요동반도를 반환받고 북사할린 남부를 할양받는 것으로 협상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이다.하지만 일본은 정작 중요한 전쟁 배상금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기억으로 일본정부를 믿고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전부다 털어서 일본국채를 사주었던 수많은 일본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히비야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폭력을 동원한 시위를 일본정부는 경찰을 동원해서 막았고 이러한 사태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이상이 부상을 입고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오로직 자국의 승리만 보도하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일본국민들 입장에서는 잘 이기고 있는 전쟁을 무능한 정치인들이 협상을 잘못해서 제대로된 배상금 한푼 받지 못하고 졸전으로 협상을 잘못 맺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이러한 자국내 폭력시위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이후 조선을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시켜 조선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들며 조선을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조선의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조선의 사법권을 박탈하면서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 군사권, 사법권까지 전부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이후 1910년 6월 한일약정각서로 조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경찰권까지 박탈하고 이후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도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1910년에 발간된 한일병합조약 기념 엽서)이후 일본은 1911년 서구열강들 하고 그동안 맺었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시키면서 사실상 더디어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과 어느정도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는 열강에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이후 메이지 덴노는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1912년 마침내 붕어하면서 메이지 시대는 끝이난다.메이지 시대는 그야말로 영광의 시대면서 한편으로는 고난과 희생 인고의 시대였다.메이지 덴노가 즉위할때당시 일본은 혼란한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마침내 열강에 반열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거기에는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고 상당한 행운까지 따라주었다.일본은 자신들의 내전인 보신전쟁을 서구열강들이 간섭해서 자국이 서구열강들의 전쟁터가 되는걸 우려해서 정부군 역시 막부측 인물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정부내 요직에 임명하는등 회유책을 써가며 항복을 유도했고 그러한 현명한 조치로 일본은 대규모 내전을 불과 1년 남짓만에 끝낼수 있었다.(만약 남북전쟁이나 훗날 벌어질 한국전쟁같이 몇년 이상 지속되었다면 일본역시도 전쟁이후 자국 경제가 파탄이 나서 그대로 외세에 경제가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일본은 에도시대 수백년동안 벌어놓았던 자금력으로 메이지 유신이전에도 일본의 경제규모는 조선의 5배에 달했으며 그러한 탄탄한 경제력을 오직 큰 부정부패 없이 자국 근대화를 하는데만 쏟아부었으며 그것마저 부족하면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면서 근대화에 필요한 부족한 돈을 마련하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다.또한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하루 빠르게 근대화가 되어가는 일본의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세금을 내고 전쟁이 나면 일본에 전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일본의 국채를 사주면서 하루하루 희망을 가지고 견더나갔다.그러한 희생과 고난이 부흥하듯 당시 일본정부는 각종 개혁들로 사무라이들의 특권을 없애고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흡수해서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끔 적용시켰고 외부적으로도 막대한 행운까지 찾아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등으로 죽은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자국군인들이 흘린 시체와 피로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뿐만 아니라 오랜 숙원이였던 조선을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고 열강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었다.하지만 일본은 전쟁도중 철처한 언론통제로 자국내 전쟁상황을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게만 보도하였고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 유능한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긴 전쟁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제대로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말아먹었다 그러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군국주의적 여론이 싹이트고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쇼와시대에 초기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는 군부 쿠테타가 흔해졌으며 자국의 총리인 이누카이 츠요시까지 암살당함에 따라서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그러한 군부는 무모하기까지 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패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이 시작 되기도 한다.메이지 시대는 분명히 일본에게 영광의 시대로 끝났지만 그러한 영광은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으로 뒷받침되어서 이룬 그러한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노력 피땀과 고난 희생을 견더야만 했던 영광의 시대임과 동시에 고난과 희생 그러한 고난을 오랫동안 참고 견더야 하는 오랫동안 긴 인고의 시대였다.인생도 메이지 시대와 같다. 잔혹한 시대를 견더내며 지금은 힘들지만 수많은 괴로움과 고난을 인고하면 계속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막대한 행운이란 것이 찾아오고 결국에는 영광이란 열매를 맛볼수 있는 것이다.
작성자 : 뤼순고정닉
마우스 기초 - 마우스 드라이버, 온보드 메모리
초보 마붕이들을 위한 글임여기 어지간히 굴러댕긴 마붕이라면 별 필요 없지만주기적으로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서 역시나 던져줄 목적으로 만든글내 지식, 경험, 검색으로 완성된 자료 이므로틀린 부분이 있을수 있지만 어지간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거다마우스 역사라던가 특정 제품 정보는 구글에서 해당 마우스 검색하면나오니 그걸 참고 하삼---------------------------------------------------------------------------1. 과거의 마우스 드라이버 지금은 마우스를 그냥 컴퓨터에 꼽으면 되고 특별히 세팅할게 없으면 그냥 쓰면 됨윈도우부터 도입된 플러그 앤 플레이 때문인데내부에서 공용 드라이버를 로드 하여 규격만 맞으면 자동으로 인식하기 때문(지금은 없지만 초기에는 이거 되는 제품은 패키지에 따로 표기 있었음)오래전에는 그런게 없어서 마우스를 구입하면 본인이 직접 드라이버 세팅을 수동으로 해줘야함컴맹 입장에서 보면 마우스 드라이버 만드는 수준마우스를 꼽고 난뒤에 전원을 켜고 del키 연타해서 메인보드 바이오스에서com 포트나 시리얼 포트에 하드웨에에서 쓸 주소를 지정 해줘야함그냥 지정 하는게 아니라 니가 충돌 안나는 주소를 찾아야함(요즘 컴퓨터는 이걸 자동으로 해준다)만약 잘못 지정하거나 다른 장치랑 충돌나면 장치 인식은 둘째치고 컴퓨터 뻣어서 멈추는 일도 생겼음그럼 다음 아래 사진과 같이 마우스 구입시 동봉된 디스켓을 설치해서 os의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 해주고 그걸 따로 실행 해야 마우스가 작동 되었음내가 기억이 가물 가물한데 드라이버가 없는 싸구려는 저기다 메인보드에 지정 했던 하드웨어 주소까지 넣어야 했던걸로 기억함이후 전용 포트와 ms dos가 버전업 되면서 자체 마우스 드라이버를 제공하여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었고마우스 구동 명령어만 실행해주면 되게 편하게 변하기는 했다(윈도우 3.1도 마우스 드라이버 실행해야 마우스 커서 떴음)지금도 과거 CUI OS에서 최신 마우스를 인식 시킬려면 도스 드라이버 수동으로 실행 시켜줘야함"어? 나도 그때 마우스 써봤는데 부팅하니 자동으로 되던데?" 라고 한다면그건 AUTOEXEC.BAT라는 지금으로 지면 윈도우 시작 프로그램에 미리 실행 되게세팅 되어 있어서 그런거임그때만 해도 그것만 하줄 알아도 컴퓨터 박사 취급이때 까지는 이런 마우스를 구동시키는 프로그램을 마우스 드라이버라 불렀음2. 마우스웨어의 등장당시에는 설치해도 크게 별거 없어서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새거 사서 보이면그냥 버리는거 외에는 사람들이 취급을 안했음윈도우95가 나오면서 도스 시절에는 꿈도 못 꿀 그래픽 환경에서 마우스의 중요도가 높이지고 차별점을 두기 위해서2버튼의 마우스 말고 여러가지 형식의 마우스가 나오게 됨플러그인 플레이를 지원하기 때문에 그냥 써도 되지만 고급 기능은 윈도우 기본 드라이버에서는작동이 안되므로 지금으로 치면 로지텍 지허브 같은걸 동봉된 디스켓이나 시디로 설치해야 쓸수 있었음당시 마우스 드라이버는 설치하면 지금 지허브 처럼 화면을 따로 띄우는건 드물었고윈도우 마우스 제어판에 탭이 추가 되는 형식이라플로피 디스크 내부 파일이 오염되어 있다면 윈도우에 손상을 줄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부팅 하자마자 공포의 블루스크린 띄운다는 소리지당시 선두 주자였던 로지텍은 사람들에게 마케팅용으로마우스 드라이버를 브랜드화 시킴그게 로지텍에서 출시한 마우스웨어 (로지텍의 마우스 드라이버)대일밴드 처럼 1회용 반창고의 대표명칭이 되어버린거고이게 활용도를 일반인들도 인식하게 된게 게임 때문임이때문에 타사는 자사의 마우스 드라이버를 마우스웨어로 공개적으로 마케팅 안하는거 같음소프트웨어 혹은 드라이버 지원, 프로그램 가능 등으로 둘러 말하는게 보임그래도 하는 업체들이 있기는 했음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스카이디지털이후 setpoint -> LGS -> G-HUB 순으로 버전업 되어 있고저 로지텍의 마우스웨어는 지원이 끝나서 최신 OS에 설치시 키보드 마우스가 윈도우상에서 사라지는 마술쇼를 볼수 있다.아무것도 못함그러므로 구형 마우스 써보겠다고 설치 하지 않길 바란다.(구형 마우스 때문에 내가 해봄... 시밤)3. 초기 마우스 드라이버의 구동 방식지금이야 온보드 메모리라고 있지만 초기 게이밍 마우스는 센서가 지원하지 않아서dpi와 폴링레이트 혹은 키 변경을 하면 컴퓨터에 저장 하는 방식이였음로지텍의 g100s가 온보드 메모리가 없는 마지막 라인업으로 기억하고만약 사용자가 g100s 클릭하면 1. 클릭 한다2. 윈도우가 입력을 받기전에 마우스웨어가 가로챈다3. 마우스웨어가 윈도우에게 명령어를 뿌린다는 형식임프로세스 우선 할당 및 실시간 리얼 타임으로 cpu를 쓰기 때문에사용자 입장에서는 마우스웨어가 마우스를 직접 구동하게 보였을거임문제는 이걸로 인해서 마우스웨어 오류나 아무리 실시간이라도 해도이론상 딜레이도 있고 다른곳에 가면 해당 마우스웨어를 설치 못하면똑같은 환경으로 쓸수 없는 단점이 있음온보드 메모리 및 기술의 발달로 이제 그런 문제가 없어지긴 했음요즘 마우스 드라이버 경우 마우스 내부의 펌웨어를 업데이트 해주는 관리 툴로도 사용됨특히 신형 마우스 경우 mcu나 센서 문제로 펌웨어 업데이가 필수인 경우가있으므로 예전에는 사용 해볼까? 정도 였으나 지금은 거의 필수임4. 마우스에 있는 저장용 메모리 (온보드 메모리)온보드 메모리라 하면 마우스 내부에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임지금으로 치면 마우스안에 usb 메모리 하나 들어 있다고 보면 됨실제로 usb 메모리가 들어 있는 마우스가 있다온보드 메모리가 공식 명칭이 아니고 로지텍이 먼저 마케팅용으로선점한거 같고 센서 & mcu 데이터 시트상에서는스토리지 혹은 프로그램 가능이라고 표기 하고 있다그래서 그런가 타사가 광고에 온보드 메모리 있다고 이야기 대놓고 못하는거 같음하더라도 하드웨어 매크로, 소프트웨어 지원, 프로그램 가능 등으로 둘러서 표기함(스틸은 하더라? 상호 사용 조약이라도 있는건지 몰루? Aerox Family Onboard Memory – Support)이 메모리의 특징은a. 각종 설정 및 본인이 원하는 기능을 마우스에 영구 저장 해서 기존에 설정한것이 사용자가 지우지 않는 이상 그대로 유지됨 물론 원하면 마음대로 삭제나 변경 가능함 쉽게 이야기하면 집에서 세팅 해서 피시방 가면 그대로 쓸수 있다는거b. 용량이 엄청 작음 가령 지금으로 치면 고화질 만화 1장 용량의 4메가 정도 되면 온보드 메모리 중 초고용량이라고 보면됨 유명 메이커 마우스는 작게는 16k 많게는 128k정도 되는걸로 추정됨 추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공개적으로 알려주는 스펙이 아니기 때문 그래서 단순히 키 지정하는게 아니라 좌표까지 지정해야 하는 길이가 긴 매크로 경우메모리의 한계로 인해서 마우스웨어를 실행 해야 쓸수 있음이쪽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건 a4tech의 bloody 시리즈 마우스온보드 메모리 용량이 커서 라인업만 받쳐주면 어지간하면 집어 넣을수 있다고 함(과거 a4tech 마우스웨어는 마우스 구입비 외에 유료 결제 해야 모든 기능을 쓸수 있었음)5. 회사별 온보드 메모리 사용 스타일로지텍 경우 타사와 다른게 지허브 써보면 알겠지만 지허브 모드와 온보드 메모리 모드가 따로 있음왜 이렇게 만든건지 모르겠는데 마우스웨어를 처음 써보는 초보들에게는직관성이 떨어져서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잘 활용하면 a4tech 마우스 외에 로지텍 만큼 마우스웨어로 여러가지 할수 있는게 별로 없음요즘 중국 마우스 회사들이 지허브 많이 참고 하는듯한 느낌 받음그외 회사들은 대표적으로레이저 처럼 마우스 드라이버(시냅스)에서 수정하면 자동으로 마우스와 동기화 되어서 따로 저장 버튼이 없거나설정을 변경후에 오른쪽 하단의 적용을 누르면 그때 마우스에 저장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방식인데위에 설명한 마우스 드라이버들은 다운로드 받아서 설치해서 써야 하므로윈도우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되거나 윈도우 리소스를 먹거나 버그로 설치가 안되는문제가 간혹 발생함요즘 나오는 마우스들중 웹드라이버 (웹허브)라고 제조사에서 제공하는특정 인터넷 페이지 들어가서 거기서 설정하면 마우스 기능을 영구적으로 저장할수 있는걸 제공함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마우스 드라이버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그반대로 인터넷이 안되거나(제조사 서버), 인터넷 웹브라우저 기반이라 웹 브라우저 업데이트나 버그 등으로 안되는 경우도 있음6. 온보드 메모리, 드라이버가 없는 마우스들최신 마우스라도 저장할수 있는 메모리가 없는 마우스들이 아직 있음대표적으로 사무용 라인업들은 대부분 없음있는 모델도 있는 가격이 비싸거나 그리 유명한 모델은 아님대표적으로 로지텍의 mx마스터 경우 사무용 끝판왕이지만 온보드 메모리가 없어서설정 저장이 안되고 로지텍의 G 라인업(게이밍)이 아니라서 지허브를 못쓰고 로지텍 옵션+ 같은다른 마우스웨어를 사용 해야함그래서 잘모르고 산 초보들이 "지허브에서 인식 안해요!" 라고 질문이 주기적으로 올라옴그래도 이런건 마우스 드라이버라도 있어서그나마 설정 변경해서 사용 할수 있지만싸구려 마우스 경우는 온보드 메모리는 고사하고 마우스 드라이버가 없어서살때부터 정해진 기능외에는 다른걸로 변경해서 사용 할수가 없다만약 드라이버가 필요 하다면 꼭 제품 스펙에 소프트웨어 지원, 드라이버 지원이 있는지 확인하자
작성자 : 니뒤에촉수!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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