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영이가 쓴 <코랴>는 일단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의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마력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다. 검기도, 마법사도, 세계수도 없다. 심지어 마족도 없고 엘프나 드워프, 드래곤조차 없다. 존재하는 인간은 오직 휴먼뿐이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세계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판타지 소설은 자주 비난받는다. <어째서 이 세계엔 인간이 휴먼뿐이냐. 휴먼우월주의에 빠진 병신들 같으니.> <자본주의의 악영향이 아닐 수 없다> 등등의 이유에서다.
방금 말했듯 판타지 세계는 마력이 없는 세계로, 당연히 마법사나 검기를 쓸 수 있는 무인도 없다. 즉 무지막지하게 잘난 사람??대마법사나 소드 마스터 정도 되는 사람??혼자서 검이나 지팡이 하나 들고서 수천 마리 정도 몰려온 마족들과 싸워 이기는,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단 뜻이다.
판타지 세계엔 검기나 마력 같은 걸 쓸 수 없으므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15명 이상을 상대로 혼자 이기는 건 무리다. 따라서 끼리끼리 모여 다니다가 잘난 한 명에게 박살나는 일이 없다.
판타지 세계엔 드래곤도 없으므로 휴먼이 가장 똑똑한 종족이고, 엘프가 없으므로 휴먼이 가장 아름다운 종족이며, 드워프가 없으므로 휴먼이 가장 첨단 기술을 갖고 있는 종족인데다, 마족과 오크가 없으므로 휴먼이 가장 정복욕이 강한 종족인 게 된다.
보다시피, 대리만족이 가득한 얘기인 것이다.
마족이 세계에서 물러난 이 시대, 역시 마족인 레드 드래곤 역시 몇 명 남지 않았다. 때문에 오크 역시 소수종족이 돼버린 지금, 휴먼의 수는 전체 종족 수의 팔 할을 넘어섰다.
그러니 판타지 소설을 쓰고 읽는 사람들 역시 휴먼들이다. 휴먼들이 자기네 종족을 중심으로 소설을 쓰는 게 당연하고, 또 엘프나 드래곤처럼 휴먼이 보기에 너무 우월한 종족들을 소설 속에 넣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시작한다는 세계를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혼자서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압도할 수 없다.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지만 현실에서도 흔히 그렇다. 독자가 읽는 도중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그러니까 그런 사실에 안심하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이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엘프나 드래곤처럼 그 종족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벼슬인 종족이 없다. 그리고 오크나 고블린처럼 차별받는 종족 역시 없으니 태어난 순간 모든 운명이 결정돼버리는 암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기능이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 같은 초인의 경지가 없으므로, 참마황이나 마도황, 아나키스트의 수장 같은 초인들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경우는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니, 평범한 자신 역시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해주는 기능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는 건 참 쉬운 일이다. 돈이 많던가, 인맥만 많으면 된다.
운 좋아서 복권이 당첨되거나 땅값이 치솟아 졸부가 된 시점에서 바로 상위계층이 되는 셈이다.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그 어떤 부자일지라도 돈 없고 가난한 아나키스트 수장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라. 게다가 뱀파이어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통화량을 집어삼키고 있다. 돈 많아봤자 그들에 비하면 별 게 아닌 것이다.
현실에선 보통 사람들은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선 가능하다.
그런데 건영이가 쓴 이 코랴라는 이름의 소설은 그걸 또 재밌게 비꼬아 놨다.
왕국인 코랴가 배경이다. 요새 판타지 소설 트렌드는 현실에서 미약한 수준이나마 검기나 마법을 쓸 수 있는 학생이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스토리인데, 이 소설은 정통적인 판타지 소설인지 주인공이 마력을 못 쓰는, 그러니까 이 소설이나 현실에서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그의 성씨는 이 나라에서 가장 흔한 <금>이며 이름 역시 흔해빠진 <철수>로, 합치면 금철수가 된다.
철수는 21살이며 독신이다. 서민층에 속하며 천재도 아니고 한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전문가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의 젊은 평범한 남자들처럼 군대에서 훈련을 받게 됐다(신분 높으면 안 가도 된다는 설정인 모양이다).
참마황과 마도황 이 두 초인이 있기에 무력 집단이 별로 필요 없었던, 제국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이야기다.
현실에서야 군대에 잘난 무인 한 명 들어오면 그놈에게 상관들이 줄줄이 다 얻어터지게 되는 일이 허다하지만, 여기선 또 아니다. 총이 가장 손쉬운 살인병기인 이 판타지 세계의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지 단신의 무력이 아니다.
철수는 군대에서 온갖 수난과 곡경을 이겨내고…… 하지만 사실 딱히 현실성은 없다. 군대의 상관들은 무조건 나쁜 놈들 같고 주인공인 철수는 무조건 착하게 묘사된다. 16살짜리가 쓰는 건데 뭐가 인간관계가 생생하겠는가. 하지만 매우 흥미진진하긴 했다.
그 후 군대를 나온 철수는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에 나서는데, 이 사회 설정이 퍽 기막혔다.
돈이 으뜸이기에 이 세계에선 재능과는 별 상관없이 아예 날 때부터 상류층 집안, 서민층 집안이 나뉜다. 현실처럼 운 좋게 서민층에서 무인이나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생겨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처럼 뱀파이어 같은, 수천 년째 부를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없음에도 상류층은 대대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능력이야 다 평범하지만 신분 계급만은 명확한 셈이다.
그게 이 판타지 소설이 여타 것들과 다른 점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갑자기 크게 성공하여 사회에서 인정받는 상위 계급에 올랐다는 점에선 나이 그대로의 전개인 것 같지만, 판타지 세계에선 모두가 평등하게 시작한다는 틀을 깼다는 시점에선 대단한 참신함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린 후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뭐, 뭐야?"
건영이였다. 삼 년 간이나 보지 못했던 얼굴이라지만 그때 그 형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하이, 나이스 투 미츄 투. 왜얼 알 유 프럼?"
건영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노, 유 이즈 낫 토크!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시 베리 웰."
삼 년 만에 만난 재회가 이 모양이란 건 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매우 반가운 노릇이었다. 하지만 건영이는 여전히 얼떨떨하고 황당한, 그리고 기겁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가, 가온?"
"그래, 마. 그런데 이 소설 재밌더라. 다음 편 언제 올릴 거냐?"
"에, 에에왜왜, 왜 당신이 여기 와있는 거야? 그리고 어째서 내 컴퓨터로 내 아이디에 접속하고 있는 건데?"
"아, 걱정마라. 네 일기장은 펼쳐보지도 못했어. 서랍장이랑 본체 사이에 있는 것을 빼려면 허리 숙여야 돼서 귀찮잖아? 그리고 D-data?동영상 강의?aDfdf폴더에 있는 야동은 아직 발견도 못했으니까. 적어도 내게 있어서 네 프라이버시는 지켜진 셈이야."
나로선 녀석을 안심시켜주려고 친절히 말해줬지만 건영이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내가 왔다는 게 잘 실감이 안 되는 모양이지? 귀여운 녀석. 저절로 내 손은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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