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서유기나 전우치 같이 도술 나오는 동양 판타지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는 도사가 점차 캐주얼하게 바뀌어가는 추세인데다
일본은 소재를 곱게 써먹진 않아서 태공망은 야바위꾼이 되고, 대가리 뗐다 붙이는게 전부인 신공표가 최강보패를 가졌다고 왜곡되고, 태상노군이 가슴 밝히는 영감이 되는 등.. 하나같이 원형을 알 수 없었음.
중국은 그래도 본고장이라서 그런지 드라마나 영화가 이렇게 원형을 유지하니까 볼만한 전통적인 도사가 나오는 작품이 많지 않을까 싶어 알아봤다만, 어째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유행되고 있었다.
글로벌 시대라고 중국 작품이 들여오면서 알려진 '선협물'은 무협에 무인 대신 신선이 활약해서 이런 이름이라는데, 어째 리뷰나 설명글을 보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협은 개뿔이고 저게 무슨 신선이냐, 중국의 신선은 한국과 가치관이 다르다, 중국 특유의 인성질이 반영된 것...이라는 등, 이게 리뷰인지 음해인지 햇갈릴 지경이다.
봉신연의에서 태공망이 2번째로 한 활약이 섹시한 미시로 변신한 왕귀인이 자기가 차린 역술원에 새치기해서 들어왔을 뿐인데 요괴란 이유(달기의 의매이긴 하지만)로 다짜고짜 대가리를 깨부술 정도로 과격하긴 해도 도사들 중에서는 나름 도리를 지키는 상식인 포지션이었건만, 어쩌다 저런 신선들이 나왔을까? 사실 중국에서도 "선협물이 인기 있긴 한데, 신선들의 이미지가 어떻게 저리 변질되었을꼬?"라는 입장이며, 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도 나오긴 한다.
선협물이 '어떻게' 저 모양인지는 알았어도, '어째서' 저 모양인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보니 어줍잖은 번역과 독해로 선협물의 역사를 알아봤다.
(그러니 더 잘 아는 분들은 댓글로 보충 좀.)
1세대 - 고전 선협
옛날에는 그냥 요마나 신선 나오면 다 '신마소설'로 뭉뚱 그려 취급했기에 현대에 와서 저 소설들 중에 신선의 비중이 크거나, 신선이 주역인 작품만 선협물로 취급했음. 여기서 중요한 건 판타지 요소가 있거나 도술 좀 쓰는 사람이 나온다고 선협은 아니라는 것.
가령 삼국지에서 황건적의 수장이 원래 태평요술서라는 비급으로 도술을 배운 도사였으나, 도적 두목으로 변절했다는 설정이고 요술도 쓰지만 결국은 초반부 악역이고, 얘를 쓰러뜨린 주역은 사람이니 선협이 아님.
그렇게 서유기, 봉신연의, 백사전 등이 선협물의 시초로 꼽히는데 이들은 각자 선협물의 틀을 제시했다고 여겨짐.
-서유기 : 주인공이 죽음을 거스르기 위해 도술이며 영약이며 챙길 건 다 챙기고, 자기 명예를 위해 저승이든 천계까지 뒤집어엎을 정도로 개망나니. (법보든 선단이든 닥치는대로 쓸어모으는 주인공)
-봉신연의 : 주인공은 나름 인격을 갖췄지만, 세상이 개판. 지상의 신선이랍시고 있는게 요괴 아니면 수행하다 말고 하산해서 도술로 욕구 채우는 반푼이 뿐. (신선들 인격이 개차반인 세계관)
-백사전 : 신선이라는 틀에 갇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 정확히 말하면 백사전은 주인공은 사람, 여주인공은 신선을 눈앞에 둔 백사 요괴고, 신선은 여주가 요괴이니 죽어 마땅하다면서 기를 쓰고 방해하는 쪽인데, 이 영향을 받은 후대에는 신선의 사랑과 이에 따른 시련을 다룸. (선협 로맨스)
주인공이 도술로 뭐든 해결해, 신들도 가끔씩 나와, 신화 좋아하고 마법이나 초능력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수요가 있었을텐데 정작 이때까지만 해도 신선의 이야기보다는 요재지이 같은 기담이 더 대중적이어서 선협물이란 틀이 나오지 않았음. 왜냐? 작품이 여럿 나오면서 신선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다루기 빡세다는 걸 알았거든.
우리가 흔히 아는 신선의 이미지는 당연히 중국도 가지고 있었음. '도사 이상의 힘을 가지고 속세를 벗어나면서, 언제나 절대 선에 위치한 신에 준하는 존재. 하지만 여기엔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큰일이 아닌 이상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게 따라붙음. 애초에 신선이라는 존재가 '협'과는 상극이었던거야.
(수호전의 108 호걸은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사상을 내세우며, 이들 중에는 도사도 있다.)
도의를 무시하고 의리를 지키는 건, 속세에 때가 타고 정이 많은 일반인도 겨우 하는데(그래서 협객이 좋게 묘사되고), 신선은 속세와 담을 쌓고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처지라 나설 이유가 없었던거지.
이렇듯 신선은 도술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자유로운 이미지와 다르게, 오히려 너무 대단하니까 함부로 못 나서고, 부조리한 일도 순리에 따라 거리낌 없이 행하는 등 협과 자유에 융화되기 어려운 소재였음. 백사전이 애절한 이유도 신선이라는 이유(정확히는 스님의 행위가 신선에 준하는 행위라 정당하다는 이유)로 주인공들이 원하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비극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니까.
결국 신선이 직접 나서려면 항상 스케일이 큰 일이 벌어져야 했지. 요괴가 활개를 치거나, 타락한 신선이 속세에 간섭하는 그런거. 하지만 이렇게되니 신선을 협객처럼 묘사하자는 취지와 다르게 이야기가 그냥 일방적인 선과 악의 싸움 or 설교질로 흘러가서 식상해졌음. 거기다 천재 캐릭터를 묘사하기 힘든 이유가 작가를 뛰어넘는 존재를 다뤄야해서 그런데, 신선은 한술 더 뜬 존재이다보니 작가의 역량을 많이 타서 신선치고는 어딘가 부족하고 편협하게 묘사되는 한계에 부딪혔고.
무엇보다 세계관이 도교랑 신화를 바탕으로 하니 작가는 고증 지키고 자료 조사하느라 힘든데, 읽는 쪽은 연장자나 마니아가 아닌 이상 그뭔씹이라고 넘기니 만드는 수고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 것도 한 몫했음.
2세대 - 판타지 선협
(머털도사급 자유도)
때문에 작가들은 신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스토리의 자유도를 주고자 기존의 선협에서 체계나 신화적인 요소들은 다 쳐내고 '도술', '요괴' 같은 대중적인 소재를 최대한 활용하는 시도를 했는데, 선협물이 정립된 현재에는 이런 부류를 '현환(玄幻/판타지) 선협'이라고 불렀음.
'촉산검협전'처럼 무협에 법보를 살짝 얹어서 요괴와 싸우거나,
'선검기협전'처럼 인간계외 신선계를 비롯한 여섯계의 세상을 비추어 세계관을 확장시키거나,
'주선'처럼 평범한 사람이 기연을 통해 법보를 얻고 도술을 배워나가는... 신선을 가미한 동양 판타지가 된거임.
그런데 이것도 딜레마가 없는 건 아니였는데, 우리나라가 화랑이나 도사 같이 개성적인 자국 소재가 있는데 자주 안 나오는 이유가 뭘까?
'검과 마법이 있는데 그걸(화랑, 도사) 왜 함?' 이런 이유임. 이미 대중적인 소재로 대체되는데 굳이 고증 따지고 쓰기 까다로운 소재를 쓸 필요가 있냐는거야.
그렇다고 마음대로 고증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어? 무늬만 다르고 개성이 죽으니, 그 개성을 기대하고 보던 독자들이 실망해서 죽도 밥도 안되지.
설령 고증을 지키더라도 원형을 벗어난 어레인지 역시 반발을 사기 십상이고.
현환 선협도 위와 같은 과정의 문제가 생겼음. 신선 요소가 약간만 나와도 장땡일 정도로 내용이 포괄적이니까 '도술만 가지고 진행할거면 왜 신선함?' 이런 식으로. 애초에 신선이란게 '도사보다 더 셈', '그런 일로 내가 가라고? 나 신선인데??'(그래서 태공망한테 짬처리), 딱 이런 꼴이라 쓰기 까다로운데, 그렇다고 그거 무시하고 묘사하기엔 개성이 죽는 계륵이나 다름없었음.
(* 스켈레톤. 오른쪽은 중국 검열판)
무엇보다 현대에 들어서 중국 공산당의 문화 검열로 판타지를 묘사하기 빡세진 것도 한 몫 했음. 괴물 나오지 마라, 시간여행 안돼. 그렇다고 판타지 아닌 무협을 하자니 역사 소재 배제해야 해서 안된다네? 작가 입장에서는 골때리지. 판타지는 검열하되 괴물 없이 사람들만 가지고 쓰라는 소리인데, 그럴거면 삼국지 같은거 쓰지 뭐하라 판타지 써? 현대로 치면 삼국지의 장수들도 무력 자체가 판타지인데. 근데 지금 와서 그것들 넘을 작품 쓸 자신도 없고, 애초에 도술 쓰는 무협을 쓰고 싶을텐데.
3세대 - 수행 선협
그래서 나온 차선책이 눈을 낮추는거였음. 높은 존재라 다루기 힘들다면, 낮은 존재로 만들면 된다 이거야. 그렇게 약간 부족한 신선, 신선을 지망하는 '수도자'를 주인공으로 삼은게 바로 현대의 선협물 '수진(修真/수행) 선협'이었고, 그 시작이 2007년에 나온 평범한 사람의 신선 수행 이야기, '범인수선전(학사신공)'임.
협객이 하는 짓이 개차반이여도 인기가 있는 이유가 협의에서 나오는 인간미이듯이, 수행자 역시 도를 닦느라 좀 미숙할 수 있고, 아직 속세에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해서 종종 속세에 오지랖 좀 부리는 인간미를 보여줄 수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신선의 활극이라는 니즈와 이를 묘사할 자유도를 챙길 수 있었음. 거기다 수행자의 시점을 통해 신선의 수행 과정을 체계화시킨 설정이랑 세계관 묘사도 가능해졌고.
그렇게 선협물은 남성향과 여성향으로 나뉘어질 정도로 서사가 정립되었음.
-남성향 : 수행에 매진하여 각종 기연과 성장을 통해 높은 경지로 오르는 활극이 주가 되니 신선은 틀을 깨기 위해 하는거고, '제약'은 ㅈ까라고 있는 것임
-여성향 : 신선이라는 틀에 갇히면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두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를 다루기 때문에 오히려 '제약'이 크게 작용됨. 이미 남녀가 몇차례의 전생에서 이별했거나, 한쪽이 오랜 수행으로 감정이 마모되어서 짝사랑하는 쪽만 고생하거나... 그래서인지 배틀 쪽 선협물 주인공은 수행 목적이 불로불사라 더럽게 안 죽는다면, 로맨스 쪽 선협물 주인공들은 참 많이 죽고 환생한다.
물론 정립되면 당연히 문제점도 확고히 보이기 마련. 여성향 서사는 하도 드라마에 자주 비치니 중국에서 '협은 없고, 신선놀음은 커녕 사랑놀음만 하고 앉았다'며 무늬만 선협이라고 혀를 차는 추세. 그리고 한국에서 유머로 자주 퍼진 선협물의 문제(과격함)는 남성향, 배틀물 쪽에 해당됨.
사실 학사신공의 주인공은 그 이전의 선협물(현환 선협) 주인공들에 비하면 좀 유별난 편임. 현환 선협의 대표작인 '주선(2002년 作)'의 주인공은 마교의 법보인 서혈주(피 먹는 구슬)를 손에 넣은 후로 방황도 하지만 선을 유지하려 노력했는데, 주선이 완결된 2007년에 나온 학사신공의 주인공은 과정이 어떻든 좋은 건 줍고 보고, 강해지는게 장땡임. 그나마 주인공보다 다른 신선들이 한술 더 뜨다는게 다행이고.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점이 독자들한테는 참신하게 다가온거야. 원래 수행을 하기 전에도 유명한 문파의 제자로 들어가서 팔자피는게 전부였던 소시민이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며 나름의 재치와 기량(권모술수)로 신선이 되어간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선은 지키며 남을 도와준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신선이야?
이렇게보면 나무위키의 비유가 딱이지. 동양판 그리스 신화. 인간적인 초월자의 행보는 독자들을 이입시키기 좋은 친근한 소재니까. 거기다 수행 중이니 끝도 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고.
(선협을 소재로 한 게임의 만화판. 소개문구가 현재의 선협이 어떤지 요약한다.)
그런데 이렇게 학사신공의 주인공이 뜨니까 '너는 쌔벼서 강해지냐? 그럼 이쪽은 죽여서 강해진다', '선빵은 저쪽이 먼저 쳤으니 이쪽은 후환까지 없애버린다' 이런 식으로 뭔가 이상한 쪽의 인플레가 시작된거임. 거기다 천겁(중국에서는 '삼재') 설정 때문에 수행 끊으면 죽는데, 강해질수록 성장 속도가 더디니 천겁 오기 전까지 수행만 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타임어택이 적용되었고.
이러다보니 나중에 가면 선협이 조금이라도 빨리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서로를 물고 뜯는 무한경쟁의 아수라장으로 변질되었고, 그 결과 신선들이 하나같이 삶에 집착하다 500년 동안 바위에 깔려지낸 원숭이 한마리만도 못한 군상을 보이게 된거라고 본다.
중국에서는 이를 두고 선협은 배움보다 기술을 중시하고, 자기수련에 매진하니 올바른 길을 제시할 스승이 안 나온다고 지적함. 중국도 문제점은 인지하는데 계속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일본의 이세계물과 비슷한 양상일지도.
선협물의 과격함에 혀를 내두르는 독자들은 순수하게 도술 부리는 활극을 보고 싶었는데, 어째 보다보니 오토바이 레이싱 구경하러 갔다가 킬도저를 본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음.
요약) 선협물은 신선이 짱 세지만 내세우기 힘들다는 딜레마 때문에 잔가지를 쳐내면서 '인간적인 신선', '신선이 되려는 인간들의 군상'을 다룬 장르로 정착되었지만, 현재는 소재의 성향이 극단적으로 변한 상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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