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강민준의 이름 앞에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최연소 국수(國手) 등극 이후 십 년 가까이, 그는 바둑판 위에서 군림하는 황제였다. 날카롭고 정교하며 때로는 상대를 질식시킬 듯한 압박감을 선사하는 그의 기풍은 '민준류(流)'라 불리며 하나의 시대를 정의했다. 그의 대국이 있는 날이면 기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방송 시청률은 치솟았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강민준이라는 이름은 알았다. 그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가 뉴스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의 삶은 바둑판 밖에서도 완벽해 보였다. 단아하고 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 윤서아와의 결혼은 세간의 부러움을 샀다. 미술관 큐레이터인 서아는 바둑계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지만, 민준의 세계를 존중하고 이해해주었다. 때로는 번잡한 승부의 세계에서 지친 그에게 고요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신이 강민준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말했다. 압도적인 재능,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까지. 민준 스스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광이, 이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신의 시대는 저물지 않을 것이라고.
승리의 단맛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에게 패배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간혹 컨디션 난조로 한두 판 내주는 일은 있었지만, 타이틀 방어전이나 중요한 승부처에서 그의 집중력은 인간의 그것을 넘어선 듯했다. 그는 스스로가 쌓아 올린 성벽이 너무나 견고하다고 믿었다. 그 어떤 도전자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라고. 동료 기사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신예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밟기 어려워 보였다. 정상의 공기는 외로웠지만, 그 외로움마저도 승자의 특권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느 비 내리는 오후였다. 예정되었던 연구회가 취소되면서 시간이 붕 떴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민준은 젊은 시절 잠시 몸담았던 허름한 동네 기원을 찾았다. 은퇴한 노사범이 운영하는 곳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담배 연기와 바둑알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는 이런 날것의 분위기가 주는 묘한 위안을 가끔 즐겼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홀로 창밖을 내다보던 민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낡은 바둑판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주변의 소란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바둑알들에만 몰두한 모습이었다. 작은 어깨는 단단히 굳어 있었고, 앙다문 입술에서는 나이답지 않은 고집과 집중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민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소년의 눈빛이었다. 깊고, 고요하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눈. 그 눈은 바둑판 위의 형세를 꿰뚫어 보려는 듯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민준은 조용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민준의 얼굴을 알아본 기색은 없었다. 그저 낯선 어른의 등장에 무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혼자 두는 거니?"
민준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소년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나랑 한 수 두어볼까?"
소년의 눈이 처음으로 민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맞은편에 앉아 바둑돌 통을 열었다. 소년에게 덤을 넉넉히 주고 시작하는 지도 대국. 민준에게는 그저 어린아이와의 가벼운 놀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몇 수가 오가지 않아 민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바둑은 정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수읽기가 숨어 있었고, 형세를 바라보는 감각은 본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승부에 대한 집념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으며,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매섭게 파고들었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대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난스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눈앞의 작은 소년을 하나의 '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대국은 민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승리의 만족감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저 눈빛, 저 집중력, 저 승부욕. 민준은 소년에게서 섬광 같은 가능성을 보았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더 차갑고,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소년에게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단순히 재능 있는 후배를 발견한 기쁨과는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보고 싶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세상을 놀라게 할 존재로 만들고 싶다. 그것은 순수한 육성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으로 또 다른 '강민준'을, 어쩌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짜릿했다. 물론, 그 '능가'라는 것이 현실이 될 리는 없다고, 민준은 속으로 확신했다. 자신은 아직 건재했고, 자신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이 아이는 그저 흥미로운 '프로젝트'일 뿐이었다.
"이름이 뭐니?"
"서하진입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바둑, 제대로 배워볼 생각 없니?" 민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내가 가르쳐 주마."
하진의 눈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놀라움과 경외심이 뒤섞인 듯한 빛.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하는 듯했다. 아이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민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아이의 눈빛에서 민준은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지만, 아이의 깊은 눈은 어떤 속내도 비추지 않았다. 이내 하진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네.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님."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민준은 하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부모님과 사별하고 친척 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는 하진의 사정을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서아는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민준의 열정적인 설명과 어린 하진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이내 따뜻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어서 와, 하진아. 여기가 이제 네 집이야."
서아는 특유의 다정함으로 하진을 대했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챙겨주고, 계절에 맞는 옷을 사 입혔으며, 밤늦게까지 바둑 공부를 하는 하진에게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서아의 친절에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거나 작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빠르게 새 환경에 적응하는 듯 보였다. 아니, 적응이라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스며드는 것에 가까웠다.
민준은 하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자신의 기보, 연구 자료, 승부처에서의 노하우, 심지어는 자신만의 바둑 철학까지. 그는 하진이라는 백지 위에 '강민준'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진의 학습 속도는 경이로웠다. 민준이 며칠 밤낮을 고민해야 했던 문제를 하진은 몇 시간 만에 풀어냈고, 민준이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터득한 감각을 하진은 놀라운 직관력으로 따라잡았다.
민준은 제자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진의 재능을 자랑했고, 언론 인터뷰에서도 '무서운 신예가 자라고 있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 속에는 미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하진은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기쁨이나 감탄,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같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오직 바둑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언제나 다음 수, 더 나은 수를 찾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이 어린 나이의 집중력 때문이라고, 혹은 아직 감정 표현이 서툴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자신을 넘어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진은 결국 자신의 '작품'이며, 자신의 통제 아래 있을 것이라고.
시간이 흐르면서 집안에는 기묘한 삼각 구도가 형성되었다. 민준은 스승으로서 하진을 가르치고, 서아는 어머니 혹은 누나처럼 하진을 돌보았다. 하진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는 민준 앞에서는 충실한 제자였고, 서아 앞에서는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속내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
서아는 하진을 살뜰히 챙기면서 점차 그에게 마음을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아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하진이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자라면서, 서아의 감정에도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말이 없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하진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조용한 힘이 있었다. 그는 서아가 정성껏 차려준 음식에 대해 서툴지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고, 가끔 그녀가 힘들어 보일 때면 말없이 따뜻한 차를 건네기도 했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서아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었다.
특히 민준이 대국이나 연구회 일정으로 바쁠 때, 넓은 집에 서아와 하진 둘만 남겨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점차 서아는 하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화려해 보이는 삶 뒤에 숨겨진 외로움, 민준의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 같은 것들. 하진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어떤 조언이나 위로를 건네는 법은 없었지만, 그의 깊은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요했다. 서아는 때때로 민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을 하진에게서 받곤 했다.
민준은 이러한 미묘한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자신의 바둑에,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작품'에 도취해 있었다. 서아는 하진을 동생처럼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하진은 그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제자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진이 언젠가 자신의 뒤를 이을 뛰어난 기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그 칼날이 언젠가 자신을 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의 발밑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균열의 소리를, 그는 듣지 못하고 있었다. 집 안에는 민준의 절대적인 자신감과 하진의 알 수 없는 침묵, 그리고 서아의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진이 민준의 집에서 생활한 지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열 살의 조용한 소년은 어느새 훌쩍 자라 열다섯의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하진의 바둑 실력은 민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취월장했다. 아마추어계를 평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마침내 프로 입단의 관문을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의 등장은 잔잔했던 바둑계에 던져진 커다란 돌멩이와 같았다.
프로 무대에 데뷔하자마자 하진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입단 동기들을 가볍게 제압한 것은 물론, 쟁쟁한 선배 기사들을 상대로 연승 가도를 달렸다. 그의 바둑은 민준에게서 배운 정교함과 날카로움 위에,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읽기와 냉철한 승부 감각이 더해져 예측 불가능한 힘을 발휘했다. 언론은 연일 '강민준의 제자', '무서운 신예'의 등장을 대서특필했다. 어떤 이는 그를 '제2의 강민준'이라 칭했고, 또 어떤 이는 '스승을 뛰어넘을 괴물'이라는 다소 섬뜩한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민준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제자의 성장을 자랑스러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진이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뛰어넘을 재목이다", "청출어람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이다" 와 같은 말들을 반복했다. 실제로 그의 마음 한편에는 자신이 발굴하고 키워낸 제자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에 대한 뿌듯함과 대견함이 존재했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진의 성장은 그가 예상했던 '잘 자란 제자'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빨랐고, 너무 거침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진의 눈빛이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함과 존경심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는 오직 승리를 향한 강렬한 갈망과 차가운 이성만이 번뜩였다. 민준과 복기를 할 때조차, 하진은 스승의 가르침을 흡수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민준의 수에 대해 냉정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 지적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지만, 민준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의 비밀스러운 약점을 들킨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은 어리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 민준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진의 기세가 아무리 매섭다 한들, 십 년간 정상을 지켜온 자신의 벽을 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쌓아 올린 경험과 노련함,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승부사적 기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진은 여전히 자신의 '작품'이었고,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하진이 프로 입단 2년 차가 되던 해,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각종 기전에서 연승을 거듭하며 랭킹을 수직 상승시킨 하진이, 민준이 보유하고 있던 '명인' 타이틀의 도전자로 결정된 것이다. 바둑계는 들썩였다. 현존하는 최강의 창과 방패, 스승과 제자의 피할 수 없는 대결. 모든 언론과 팬들의 시선이 명인전 5번기 결승에 쏠렸다.
대국 전날 밤, 민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은 불안하게 뛰었다. 맞은편에 앉을 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소년이라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성장한 청년. 그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민준은 문득 서늘한 예감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나는 강민준이다.'
결전의 날, 대국장에 들어선 민준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하진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하진 역시 말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존경심이나 긴장감 대신, 오직 승부만을 앞둔 기계와 같은 냉정함만이 감돌았다. 그 모습에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첫 판. 민준은 노련한 운영으로 하진의 초반 기세를 잠재우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역시 아직은 자신이 위라는 안도감이 잠시 그의 마음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함에 불과했다.
두 번째 판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하진은 마치 민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 민준이 평생을 갈고 닦아온 필살의 전략들을 귀신같이 간파하고 역습을 가해왔다. 민준이 던지는 변화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민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미세한 약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민준은 경악했다. 자신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이, 자신의 기보와 연구 자료들이, 이제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스승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제자. 이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었다.
민준은 당황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맞은편의 하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동요나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인 수를 찾아 나아가는 냉혹한 계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민준은 2국, 3국, 그리고 4국마저 내리 패배하며 1승 3패로 명인 타이틀을 하진에게 넘겨주었다. 마지막 대국이 끝나고 돌을 거두는 민준의 손은 무겁게 느껴졌다. 대국장을 가득 메운 카메라 플래시와 환호성은 모두 새로운 명인, 서하진을 향하고 있었다. 축하 인파에 둘러싸여 담담하게 인터뷰를 하는 하진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민준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대국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민준의 손은 굳어 있었다. 옆자리의 서아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민준에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이 충격적인 결과에 할 말을 잃은 것이라 애써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민준은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명인전 패배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충격적인 패배 이후, 민준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그의 철옹성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둑판 앞에 앉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졌다. 예전과 같은 날카로운 수읽기는 무뎌졌고,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임이 잦아졌다.
반면, 하진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명인 타이틀을 발판 삼아 그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다음 해에는 '기성(棋聖)' 타이틀을, 그리고 마침내 민준이 십 년 넘게 지켜온 바둑계 최고 권위인 '국수(國手)' 타이틀마저 빼앗아 갔다. 민준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의 상징들이 불과 2-3년 사이에 모두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나갔다.
민준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언론은 그를 '왕년의 강자', '비운의 스승'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대국 제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어쩌다 참가한 대회에서는 초반 탈락의 쓴맛을 봐야 했다. 팬들의 환호는 싸늘한 외면으로 바뀌었다. 한때 그의 모든 것을 동경했던 후배 기사들의 눈빛에서는 이제 안타까움과 동정이 느껴졌다. 민준은 그 시선들을 견딜 수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차갑게 식어갔다. 하진은 이미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나간 상태였지만, '스승님께 인사드린다'는 명목으로 가끔씩 집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민준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제자가 이제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서아의 태도 역시 민준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녀는 여전히 하진에게 다정했다. 아니, 민준이 보기에는 예전보다 더 살갑게 대하는 것 같았다. 민준이 패배의 그늘 속에서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 반면, 하진은 승승장구하며 얻은 자신감과 여유로 더욱 빛나 보였다. 민준은 서아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하진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당신 요즘 하진이랑 너무 자주 연락하는 거 아니야?" 민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의심이 묻어났다.
"무슨 소리예요. 그냥 가끔 안부 묻는 정도예요." 서아는 피곤한 듯 답했다.
"안부? 당신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아. 솔직히 말해봐."
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준의 패배감과 열등감이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반복되는 의심에 지쳐갔다. 민준은 종종 지방 대국이나 기원 방문을 핑계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현실을 도피하려는 듯 보였다. 그렇게 민준이 없는 빈자리가 길어질수록, 서아의 외로움도 깊어갔다. 그럴 때면 가끔, 정말 가끔, 하진에게서 연락이 오곤 했다. 스승님의 안부를 묻거나, 혹은 자신이 새로 발견한 좋은 차가 있다며 잠시 들르겠다는 식이었다. 서아는 망설이면서도 그 연락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못했다. 텅 빈 집의 적막함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듯한 하진의 조용한 존재감이 희미한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실체는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민준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바둑계 공식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졌고, 밤에는 홀로 기보를 늘어놓고 패배의 순간들을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황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폐허가 된 자신의 왕국 위에 홀로 남겨진 그는 길 잃은 망령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서아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을 넘어선 깊은 피로와 체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계 역시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공식적인 활동을 모두 중단한 강민준은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듯했다. 그는 집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았다. 화려했던 과거와 치욕스러운 현재로부터 도망치듯, 낯선 도시의 뒷골목을 헤매거나,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의 허름한 민박집에 묵었다. 바둑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바둑에 대한 생각 자체를 지우려는 듯, 그는 술로 밤을 지새우거나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처음에는 분노와 원망, 그리고 지독한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제자 서하진에 대한 증오,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그 감정들은 독처럼 그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는 술에 취해 밤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고독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내면에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변명이나 합리화가 아니었다. 처절한 자기 성찰에 가까웠다.
'내가 하진이를 키운 것은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내 영광을 재현하고픈 뒤틀린 욕망의 발현이었을까? 나는 진정으로 제자의 성장을 기뻐했던가, 아니면 내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두려워했던가?'
끝없이 이어진 질문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민낯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하진의 재능을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고 싶었고, 자신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 통제하고 싶었다. 제자의 성장을 순수하게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의 아성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믿음 속에서 안주했다. 패배했을 때, 그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보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비겁한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어쩌면 하진을 괴물로 만든 것은, 하진의 재능과 야망만큼이나, 스승이었던 자신의 그릇된 욕망과 옹졸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바둑판 없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과거의 대국들을 복기하고, 자신이 놓쳤던 순간들,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지점들을 되짚었다.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정점에서의 영광도, 나락에서의 좌절도 결국은 삶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서서히 찾아왔다. 그는 여전히 하진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의 상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거나 패배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는 않게 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할퀴던 '심마(心魔)'와 같았던 분노와 집착이 희미해지면서, 그의 내면에는 오랜 방황 끝에 찾아온 지친 평온함, 혹은 깊은 체념과 같은 고요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서아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주해야 했다. 이 지긋지긋한 패배의 그림자 속에서, 어쩌면 작은 빛 한 줄기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민준이 집을 비운 사이, 넓은 집에는 서아 혼자 남겨졌다. 처음에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민준의 방황이 길어지면서, 그 감정은 점차 실망과 피로감으로 변해갔다. 그녀 역시 민준의 추락과 함께 상처받고 있었다. 남편의 패배감과 의심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말들은 그녀의 마음에도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텅 빈 집의 적막함은 그녀의 외로움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것은 하진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스승의 안부를 묻거나, 혹은 사소한 도움을 주기 위해 가끔 연락하고 찾아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민준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그의 방문은 조금씩 잦아졌다. 그는 서아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고, 그녀의 지친 마음을 섬세하게 위로했다. 민준이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하진은 정확하게 채워주었다. 그는 더 이상 어리고 서툰 소년이 아니었다. 정상에 선 자의 여유와 세련됨,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미묘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서아는 흔들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진이 주는 위태로운 위안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는 한때 남편의 제자였고, 자신이 동생처럼 아꼈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남자는, 외롭고 지친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유일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는 점점 길어졌고, 스스럼없는 농담과 함께 미묘한 눈빛이 오갔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선은 어느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에 괴로워했지만, 그 감정조차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점차 무뎌져 갔다. 그녀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 민준이라고. 그의 끝없는 추락과 집착이 자신을 이 길로 내몰았다고. 하진과의 관계는 망가진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자, 금지된 쾌락이 주는 짧은 위안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은밀하고도 깊숙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면의 폭풍을 어느 정도 잠재운 민준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방황 끝에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를 품고서였다. 늦은 밤,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선 그의 마음은 복잡하면서도 약간의 설렘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집안의 공기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무나 조용했지만, 그 침묵 속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안방 쪽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낯선 속삭임과…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안방 문틈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미한 불빛 아래,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 서아, 그리고… 서하진. 민준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한 충격과 함께, 심장을 찢는 듯한 격렬한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고, 저 두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가 정점을 찍는 순간, 오히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극심한 탈진감이 그를 덮쳤다. 방황 속에서 얻었다고 생각했던 깨달음도, 어렵게 다스렸다고 믿었던 평정심도 이 잔혹한 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하진에게 빼앗긴 것은 단순히 타이틀이나 명예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민준은 소리 없이 뒷걸음질 쳐 집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집 앞 가로등 아래 멍하니 서서 안방의 불빛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의 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진은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승리자의 퇴장이었다.
민준은 한참을 더 서 있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듯한 하진의 외투가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듯한 서아가 가운 차림으로 안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거실에 서 있는 민준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머, 민준 씨. 언제 왔어요? 연락도 없이…"
"…방금.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민준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피곤하겠네요. 저녁은 먹었어요?" 서아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아니, 아직."
"뭐라도 차려줄까요?"
그녀의 태연한 모습,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일상적인 대화. 그 속에서 민준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때 세상 전부였던 여인.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비밀과, 그가 더 이상 가닿을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패배라는 것을. 바둑판 위에서의 패배는 다시 도전할 기회라도 있었지만, 이 패배는 그의 존재 자체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노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지독한 허무함과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을 뿐이었다. 폐허가 된 자신의 삶 위에, 그는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처럼 서 있었다.
세간의 예상을 깨고 강민준은 복귀했다. 그의 귀환은 극적이었다.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그는 예전의 날카롭고 화려했던 기풍 대신,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고 단단한 바둑을 두었다. 감정의 동요는 찾아볼 수 없었고, 수읽기는 더욱 깊어졌으며, 형세 판단은 노련함을 넘어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마치 오랜 고행 끝에 득도한 수행자처럼, 그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놀라운 집중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언론은 '황제의 귀환', '제2의 전성기'라며 떠들썩했다. 그의 복귀 후 첫 우승은 바둑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가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하고 더욱 강해져 돌아왔다고 평했다. 연이은 승전보는 그의 랭킹을 다시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고, 팬들은 그의 부활에 열광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각종 행사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겉으로 보기에 민준은 화려하게 재기(再起)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민준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바둑에서 느껴지는 깊이와 단단함은 깨달음이나 성장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남은 처절한 공허함, 타버린 재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열정의 잔해였다. 그는 더 이상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고, 패배의 아픔에도 무뎌졌다. 바둑은 이제 그에게 삶의 의미나 열정이 아니라, 그저 익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 텅 빈 시간을 메우는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승리는 그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주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킬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을 맞이하는 것은 예전과 같은 따뜻함이 아니었다. 서아는 그의 복귀와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축하해요."라는 의례적인 말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민준이 돌아온 후에도 하진은 한동안 가끔 집에 들렀다. '스승님의 복귀를 축하드린다', '새로운 기보에 대해 여쭙고 싶다'는 등의 이유를 댔지만, 민준은 그의 방문 목적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다. 서아는 하진이 올 때면 평소와 달리 조금은 생기를 띠었고, 그를 대하는 목소리 톤은 민준을 대할 때와 미묘하게 달랐다. 민준은 그 차이를 아프게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는 이미 진실을 목격했고, 그 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이 자신의 거처에서 완전히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집 근처에 얻었던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강남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한다는 소식이었다. 하진이 그 소식을 전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던 날, 민준은 서아의 얼굴에 스치는 복잡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안도감보다는 아쉬움, 혹은 섭섭함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하진에게 "이사 잘 하고, 가끔 연락하고 지내자."라고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어쩌면 연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한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민준은 그저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하진이 떠나고 난 뒤, 집안의 온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서아는 더 이상 민준을 위해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식탁에는 배달 음식 용기가 놓여 있거나, 그녀가 "밖에서 먹고 들어왔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집안 곳곳에는 미세한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한때 그녀의 손길로 아늑하게 꾸며졌던 공간들은 생기를 잃어갔다. 그녀는 "갤러리 일이 바쁘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고, 저녁 늦게, 혹은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그녀가 외출할 때면 예전보다 더 신경 써서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는 모습이 민준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민준은 중요한 대국을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집안은 텅 비어 있었고,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차갑게 식은 커피잔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텅 빈 집의 적막함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졌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바둑판 위에서의 승리는 이 차가운 현실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간인 가정에서는 철저한 패배자로 남아 있었다.
서아의 태도는 이제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더 이상 민준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민준이 말을 걸면 짧고 건조하게 대답했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루함과 짜증, 혹은 깊은 무관심만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민준의 건강을 챙기거나 스케줄을 묻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의 일상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민준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와 장시간 통화를 했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민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저녁 식탁에서의 침묵은 숨 막힐 정도였다. 어쩌다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날이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오직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민준은 음식을 거의 넘기지 못했다.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싸늘한 얼굴, 그 얼굴에 담긴 외면과 경멸의 기색을 견디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이 이 집에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느꼈다.
한번은 민준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걸까?"
서아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싸늘하고, 건조했다.
"그럼 어떻게 살고 싶은데요?" 그녀는 반문하듯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남보다 못한 사람에게 사무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했고, 더 이상 어떤 노력도, 대화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자신은 이미 과거의 존재, 혹은 귀찮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과 목소리는 민준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에게 집은 차가운 감옥, 숨 막히는 패배의 현장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바둑 영웅이었지만, 그는 매일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 혹은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아내와의 숨 막히는 침묵 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패배의 그림자는 그의 삶 모든 영역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는 그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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