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이지연, 『로푸드 스무디』, 레시피팩토리, 2015
옛날에 보았던 TV 드라마에서는 ‘가족 건강을 생각하는 엄마’를 표현하는 클리셰로 녹즙이 자주 쓰이곤 했습니다.
비싸기로 치면 한의원에서 지은 보약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돈을 쓰는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나 채소를 갈아서 가족들에게 먹이는 정성이 더 돋보였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재미있게 느꼈던 점은 녹즙을 받아들며 고마워하는 가족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쓴맛에 인상을 쓰며 단숨에 들이키고 무뚝뚝하게 “다녀올게”라며 집을 나서는 남편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손사래를 치며 책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달려 나가니까요.
푸르죽죽한 색깔의 걸쭉한 액체가 그다지 입맛을 돋우는 모습이 아니다 보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간혹 녹즙을 먹다 보면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사악한 녹색 마녀가 도로시가 퍼부은 걸레 빤 물을 맞고 녹아버리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녹즙을 너무 과도하게 먹으면 신장에 무리가 간다는 말도 있으니 영 틀린 생각도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고리타분한 녹즙도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운동과 다이어트가 인기를 끌자 녹즙 역시 ‘디톡스 주스’라는 이름을 달고 영향력을 넓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철 음식, 신토불이, 건강 식단, 채식주의, 생식 등의 단어가 마치 자석에 쇳가루 붙듯 채소 스무디의 깃발 아래 뭉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며 씁쓸한 채소만 갈아 넣던 과거와는 달리, 초보자도 쉽게 마실 수 있도록 과일의 비율을 높인 레시피도 다양하게 등장하며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수요가 높으니 수많은 주스와 스무디 책 역시 출판되어 건강과 요리 분야의 서가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면역력, 노폐물 배출, 피부 미용, 다이어트” 등의 단어를 앞에 내세우며 표면적으로는 건강 기능성 식품으로서의 스무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채소에 어울리는 달콤한 과일을 한두 가지씩 꼭 끼워 넣으며 채소와 과일의 비율을 입맛에 맞게 조절할 것을 권장합니다.
과일을 너무 많이 넣어 채소 스무디가 아니라 채소 조금 넣은 과일 스무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채소를 아예 먹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요.
게다가 즙만 짜낸 주스에 비하면 섬유질이 그대로 들어있는 스무디가 포만감도 있고 영양소도 풍부하니 해독 작용과 다이어트라는 기능성 측면에서는 가게에서 사 먹는 주스보다 직접 갈아먹는 스무디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직접 만들어 먹으려고 시장에 가서 가격표를 보는 순간 손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격이 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추석 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과 한 알에 만원"의 여파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차피 다 갈아버릴 예정이라 굳이 특상품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점입니다.
약간 흠이 있거나 못생긴 과일을 저렴하게 대량으로 사서 갈아줍니다.
못생겨도 맛과 영양은 똑같건만, 외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연애건 취업이건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워지는 것은 과일이나 사람이나 똑같은 모양입니다.
사과는 베이킹소다를 뿌려 껍질 채 깨끗하게 씻고, 비트와 당근은 껍질을 깎은 후 작게 썰어놓습니다.
스무디 재료이니 모양을 예쁘게 자른다거나 크기가 균일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큼직하게 자르면 블랜더(믹서기)의 칼날이 헛도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분이 많은 사과를 먼저 넣고 물을 총량의 10%정도 부어주기도 합니다.
양을 불리기 위해 물을 타는 게 아니라, 제작 공정상의 이유랄까요.
‘그냥 아무 채소나 과일을 집어넣고 믹서기로 갈아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책 한 권 펼쳐놓고 맛과 영양을 꼼꼼히 따져 최적의 배합으로 만든 레시피를 참고하는 편이 더 효율적입니다.
여러 종류의 스무디를 체험해보고 자신에게 잘 맞는 과일과 채소 조합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가장 마음에 드는 것 몇 종류가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매번 과일과 채소를 씻고 손질하고 갈아내는 과정은 어려울 건 없어도 시간이 많이 들고 귀찮은 작업이거든요.
여유가 있을 때 대량으로 사서 한꺼번에 손질하고 스무디로 만든 후 설거지까지 끝내버리는 편이 깔끔합니다.
완성된 스무디는 일회용 파우치에 넣어 얼려두었다가 하나씩 꺼내 먹으면 아침 식사 대용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여러 스무디 중에서도 당근과 비트, 사과를 갈아 만든 스무디는 일명 ‘ABC 주스’로 불리는 베스트셀러입니다.
책에서는 “뿌리채소의 폴리페놀 성분이 활성산소를 없애주어 암, 당뇨병, 치매, 피부 노화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무 대단한 효과라서 오히려 길거리 약장수가 파는 만병통치약이나 식당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XX의 효능" 광고판을 보는 느낌입니다.
실제로 효과가 엄청나게 좋아서라기보다는 사과Apple, 비트Beet, 당근Carrot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 귀에 쏙 들어와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 성공의 비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과와 당근은 이미 캐로플이라는 단어가 익숙할 정도로 검증된 조합이고, 비트는 은은한 단맛을 더할 뿐 아니라 특유의 붉은색으로 스무디의 색깔을 한층 더 강렬하게 만들어줍니다.
다만 당근과 비트는 식용색소로 사용될 정도로 색이 진하다 보니 한 무더기씩 손질하고 나면 손이 주황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색깔의 스무디를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랄까요.
주사위 모양으로 손질한 비트, 당근, 사과를 1:2:4의 비율로 믹서기에 들어갈 만큼씩 계량합니다.
해독 효과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1:1:1 비율의 ABC 주스를 먹는다고도 하지만, 비트가 너무 많이 들어간 스무디는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건강에는 해로운 맛입니다.
믹서기를 돌리고, 재료의 무게를 재고, 완성된 스무디는 커다란 볼에 옮겨 담고 국자로 떠서 플라스틱 파우치에 채워 넣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부엌을 보면 ‘차라리 사서 먹을까?’ 싶다가도 무려 네다섯 배나 비싼 가격을 떠올리면 ‘직접 만드는 게 더 건강에 좋다’며 자기합리화하기가 쉬워집니다.
사과를 많이 넣어서 아이들도 좋아하는 ABC스무디 완성입니다.
완성품은 아이들을 불러 시음회를 진행합니다. 300ml 파우치는 어른이 한끼 식사 대신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라 아이들에겐 반씩 나눠줍니다.
문제는 파우치에 담긴 스무디를 빨아먹는 재미 때문인지 둘 다 컵에 담아 먹는 건 싫어한다는 점.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서 두 팩을 뜯고 절반씩 컵에 덜어 파우치는 아이들에게 넘기고 나 홀로 컵에 든 스무디를 떠 먹습니다.
"재미있는 건 언제나 애들 차지"라고 투덜거리면서 말이죠.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면 남는 것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가득 채운 채소와 과일 껍질, 그리고 수십 개에 달하는 산더미와 같은 스무디 팩입니다.
채소와 과일을 오랫동안 보존하며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보존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잼이나 피클을 만들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먹을 것을 쌓아놓았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낌은 비슷하지만, 다른 보존식이 좀 더 맛있는 인생을 살게 해주는 기호품이라면 냉동실에 가득한 ABC 스무디는 건강하게 살기 위한 필수 영양소라는 인상이 강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일회용 파우치의 모양이나, 그 속을 채운 빨간색 액체를 보고 있노라면 수혈용 혈액 팩 보는 느낌도 듭니다.
하긴, 피곤함에 찌들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 삐쩍 마른 흡혈귀와도 같은 몰골이 스무디를 쪽쪽 빨아 먹고 정신을 차리며 사람 꼴을 갖추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크게 다를 것이 없기도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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