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돌고 돌아 어느새 봄이 되었다.
아직 초봄이기에 따스한 봄기운은 덜하지만, 영상으로 올라간 온도는 사람들에게 불과 한 달 전보다 가벼운 옷차림을 선사해주었다.
봄이 되면 얼어붙은 땅이 녹고 새싹이 자라난다지만 지금 시기에 자라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담당 아이돌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어텀페스 이후 내가 맡게 된 아이돌인 후타바 안즈는 굉장히 무기력하고 속물적인 면이 굉장히 부각되는, 좋게 말해 인간미있고 나쁘게 말해 의욕없는 그런 아이돌이다.
평소에는 정해진 레슨을 빼먹고 도망 다닌 안즈를 찾아다니다 보면 별별 이상한 곳에서 안즈를 발견할수 있다.
심지어는 어떻게 그곳에 들어갔는지 프로젝트룸의 소파 아래서 자고있던 안즈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반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다.
'하암~, 레슨같은 일은 한 번 할때 다 끝낼 수 있게 해둬야지 어째서 레슨을 그렇게 자주 잡아놓은거야 프로듀서.'
당연히 데뷔 전에 레슨을 통해 아이돌로서의 기초적인 실력을 갈고닦는 일은 필수기 때문에 레슨 일정이 잦은 것은 당연함에도 안즈는 그런 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때 자리에 있던 사무원인 센카와 치히로씨도 그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안즈가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단시간의 레슨으로 기초를 거의 완성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안즈는 '재능'이 있었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으로 노력을 한다면 정점에 서는 것도 순식간 일테지만 안즈는 지금도 입에 사탕을 넣고 소파에서 늘어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이 안즈, 사탕 봉지는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했었잖아."
"안즈는 지금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프로듀서가 대신해주면 안될까?"
"내가 네 엄마라도 되는 줄 알아? 언제가 되든 항상 이 패턴이라니까...."
툴툴 대면서도 항상 하던 것처럼 집게를 들고 사탕 봉지를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도 챙겨주기 참 좋아하는 성격이라니까... 안즈, 조금 있다가 내일 있는 이벤트에서 입을 의상을 한번 확인해야하니 적당히 세이브하고 준비해놔"
"에엣?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거야? 작년하고 신체 사이즈도 안 변했으니 사이즈 체크같은 것 굳이 필요하지도 않을 텐데."
"사무소에 등록될 공식 정보란에 귀찮다고 대충 표시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사무소에 들어올 당시 안즈가 아이돌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니트계 아이돌이란 간판을 달고 제출한 프로필은 공식으로 올리기 민망한 대충대충 작성된 것이었다.
당연히 상부에서 이 프로필을 받아본다면 다시 작성해서 가져오라 할게 분명했기에 안즈를 쏘아붙이며 새로 기재하라며 서류를 넘겨줬다.
하지만 내 예상은 무참히 부서졌고 그 말도 안 되는 프로필이 공식 사이트에 그대로 기재되었다.
"그건 대외용이고 저번에 디자이너가 다 측정해놓은 것이 있을거 아니야? 안즈는 거기서 하나도 변한 건 없으니 문제없음!"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말고 오늘 이 의상 확인 작업만 끝나면 다음 일정은 없으니까 협력 좀 해줘."
안즈는 휴대용 게임기의 화면을 끄고 자세를 고쳐 진중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했다.
"맨입으로 부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표정이 진지하길래 무슨 대단한 얘기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안즈는 별 시답지 않은 말을 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도록 하지 이 일이 끝나고 기숙사까지 내가 차를 태워서 데려다주면서 원하는 사탕을 하나 주마. 어떠냐 이 조건이라면 수락하겠지?"
"오호.... 이 안즈를 사탕 하나로 넘어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사탕 세개! 이 이하는 안돼!"
"그 조건은 안돼, 대신 내일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다는 조건으로 내일 저녁을 내가 사기로 하지. 이 조건이라면 승낙하겠지?"
"오케이! 대신 저녁 결정권은 안즈가 가져가겠어."
안즈의 제안에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얼마가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큭. 월급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두 명 합쳐서 3천엔 이하로 허락해주마."
"알겠어 대신 사탕은 선납이야 프로듀서."
안즈가 조건에 승낙하는 것을 들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탕을 넣어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여러 가지 맛과 다양한 회사의 사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무슨 사탕으로 할래?"
안즈는 아침에 입고 왔던 겉옷을 다시 몸에 걸치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마음대로 골라도 돼~"
마음대로 골라도 상관이 없다고 했으니 서랍에 손을 넣고 적당히 아무 사탕이나 집었다.
손을 내미는 안즈에게 사탕을 건내줬을 때 안즈 손에는 딸기 맛 사탕이 올라가 있었다.
서랍을 닫으려다가 안에 있는 사탕에 햇빛이 비취며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보석상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즈는 그 잠깐 사이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봉지는 쓰레기통에 잘 넣었지?"
"프로듀서는 안즈의 엄마가 아닌데도 잔소리하는걸 보면 엄마랑 똑같단 말이지"
쓰레기통에는 안즈가 지금 먹고 있는 딸기 맛 사탕의 봉지가 잘 들어있었다.
"우리 안즈가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프로듀서는 너무 기쁘단다. 흑흑"
"으엑.... 다 큰 남자가 우는 척하지마. 그리고 쓰레기통이 가까이 있으니 쓰레기통에 버렸을 뿐인데 뭘 감동하려 하고 있는거야."
안즈의 딴죽이 꽤 날카로워서 마음이 굉장히 아팠다.
"어쨌든 안즈도 한번 시작한 일은 대충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평소에 보여주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안즈가 오랜만에 귀엽게 느껴졌다.
어찌 됐든 일을 하러 가야 했고, 안즈와 같이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으로 가서 자동차 문을 열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저기 안즈?"
"귀찮아 프로듀서가 갔다 와~."
"이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는 수 없이 안즈를 차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급히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로 올라가니 치히로씨가 잔뜩 쌓인 서류 더미를 놓고 끙끙대고 있었다.
"혹시 뭐 놓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나요?"
바로 눈치채였다.
"차 키를 놓고 가서요. 그런데 저건 다음 주에 처리해도 되는 서류 아닌가요?"
"누구 씨가 영업이랍시고 돌아다니느라 자료가 하나도 준비가 안 됐거든요."
치히로씨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최근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인해 사무실에 거의 들어오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저희 프로젝트의 아이들이 궤도에 오르고 있으니 당연히 바쁘시겠죠."
치히로씨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가리고선 작게 웃었다.
치히로씨의 반응 때문에 나 또한 괜히 머쓱해져 무의식적으로 목덜미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대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프로듀서 씨도 함께 마시러 가주셔야 해요?"
나는 치히로씨에게 알겠다는 말을 전하고 기다리고 있는 안즈에게 달려갔다.
"미안, 기다렸지?"
"어...? 아, 응?"
안즈는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나를 보자 깜짝 놀라버렸다.
"일단 차에 빨리 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지금 출발해야지."
일단은 약간 멍해 보이는 안즈를 조수석에 앉혀놓고 의상을 보러 차를 몰았다.
-안즈의 이야기
어린 시절 언제부터인가 계절의 변화가 단조롭다고 느끼게 되었다.
별거 없어 보였던 하나의 권태감이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더니 그렇게 동년배보다 유난히 작았던 한 아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느꼈어야 했을 흥미들을 잃고는 무기력하게 변해버렸다.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살던 중 우연히 한 아이돌 프로덕션에 스카우트를 제의받았다.
스카우트를 받아들인건 변덕이였다.
그때는 아이돌로서 한탕 치고 인세로 여유롭고 나태한 타락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세의 길은 멀고도 험했고 스카우트 된 그해의 대부분은 레슨으로 소모되었다.
그 해가 지나고 나서야 작은 이벤트 같은 업무들을 하나하나 수행해 나가며 순조롭게 아이돌로서의 지명도도 늘어나고 일거리도 늘었지만 애초의 목적인 나태와 타락의 삶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졌다.
오늘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무소에 왔다.
"분명 오늘은 CM의 의상 체크가 있었나?"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맨날 끌고 다니는 봉제 토끼 인형의 주머니를 뒤져보니 노란 사탕이 하나 나왔다.
사탕 봉지를 대충 까서 입안에 사탕을 넣었다.
"엄청 시네."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강한 신맛이 입에서 퍼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꽝을 뽑은 것 같다.
혀위에서 사탕을 몇 번 굴려주자 사탕이 녹으며 어느 정도 신맛에 익숙해졌다.
소파 위에 엎어져 테이블에 있던 PSP를 켜고 게임을 실행했다.
"어이 안즈, 사탕 봉지는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했었잖아."
게임에 한창 빠져있던 중 프로듀서의 잔소리가 들린다.
"안즈는 지금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프로듀서가 대신해주면 안될까?"
이는 명백한 사실이며 반론할 수 없는 진실이다.
프로듀서는 투덜거리며 내가 떨어뜨려 놓은 사탕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 프로듀서와 가벼운 농담 따먹기로 자폭한 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결국, 이 안즈를 움직이게 하는 대가로 사탕을 받아내었다.
손 위에 올라가 있는 사탕에서는 프로듀서의 온기가 약간 남아 있었다.
사탕을 바라보며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자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며 바로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방금 먹었던 사탕보다는 훨씬 달콤하고 풍부한 딸기의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사탕은 입안에 넣었지만, 손안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봉지가 남아있었고 불과 몇 분 전에 들었던 잔소리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튕겨 한 번에 골인시켰다.
"우리 안즈가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프로듀서는 너무 기쁘단다. 흑흑"
어른이 우는 척 하는 건 꽤 꼴불견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일을 빨리 마치고 쉬려면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제일이기에 출발을 재촉하는 프로듀서에게 끌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프로듀서에게 끌려 주차장까지 갔지만, 가방과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차 열쇠를 놓고 온 것 같다.
굉장히 당황한 프로듀서의 표정이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저기 안즈?"
뒷말은 말 안 해도 뻔하다.
"귀찮아 프로듀서가 갔다 와~."
"이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
그렇게 말한 프로듀서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하며 사무소로 열쇠를 챙기러 갔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 프로듀서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내심 깨닫게 된다.
언젠가 한 번은 프로듀서에게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프로듀서는 생각하는 것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는데 그거 괜찮은 거야?"
지금 생각해보니 직설적이었던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다.
"지금까지 그런 말은 꽤 많이 들어왔지."
"흐음, 그래서?"
"다르게 생각해봤을때 내 표정에서 생각이 드러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내 진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소리잖아."
"좋은 핑계네~"
겉으로는 별 감흥이 없는 척 하지만 그 열렬한 진심이 담긴 표정이 소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기쁨, 기대, 믿음, 그리고 약간의 애정.
사심없는 명백한 호의에 얼굴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한창 때 소녀에게 사랑받는다니 팔자도 좋구나~"
프로듀서가 없을 때만 표현 할 수 있는 감정.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연심을 사탕처럼 입 안에서만 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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