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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최종보스 시마즈 요시히로의 퇴각전술..jpg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에서 싸움을 잘해서 악명을 떨친 다이묘이다. 사천성 전투에서 7천명의 병사로 조명연합군 4만명을 학살했고,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참전한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을 막아서서 전사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1600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이시다 미츠나라의 서군 측에 서서 고작 15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대로 싸우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였고, 시마즈는 궁지에빠진 쥐 신세처럼 되었다. 포위한 동군의 병력은 자신의 10배를 넘는 절망적인 상황.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이대로 항복하거나 도망치면 잡혀서 죽고, 싸워도 죽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기력하게 포기하면 자기 가족과 고향도 박살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적진을 돌파해서 이세로(路)를 통해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일명 "적진으로의 퇴각" 이 때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가 쓴 전술이 바로 시마즈 가문 고유의 진법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수 명의 팀으로 나눈 저격수가 후미에 남아 추격해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에는 총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버는 진법이며, 이를 무한반복 했다. 당연히 참가자는 100% 죽는 말도 안 되는 전법이었는데, 동군은 이판사판으로 덤벼드는 시마즈 군에게 기가 질렸으며. 이이 나오마사 등 주요 지휘관들도 당해버리자 결국 시마즈 군을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퇴로상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진지에 있어서 자칫 도쿠가와도 죽을 판이었다. 이 후퇴전으로 약 1500명의 시마즈 군 중 80명만 살아남았으나 오사카 성에 갇힌 포로까지 풀어주는 등 전설적인 업적을 세우게 된다. 질려버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문을 도자마 다이묘로 놔둬버리고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준다. 후퇴 시 보여준 처절한 무용과 광(狂)적인 모습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집요한 숙청과 개역의 마수로부터 시마즈 가문은 온전히 세력을 보존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시마즈 가문은 시간이 흘러 자기들 손으로 직접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의 선봉이 된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시마즈 가문의 사무라이 정신은 "가미카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등장하게된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환송대고정닉
일본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JPG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상의 수상자들은 백인 일색이었다. 특히 과학 분야의 경우 편중이 더욱 심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과학의 발전이 매우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아 동쪽 끝 섬나라에서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난다. <유카와 히데키> 그는 원자핵 속의 새로운 입자인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하는 이론을 세운 업적으로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유카와는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한 일본 국내파라는 점에서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간 것은 1939년인데, 그때는 이미 중간자 이론으로 유명해진 후였다. 유학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어린 유카와는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의 과학 거장들을 보며 과학자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중에는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 초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가 1921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일본으로 향하던 배 안에서였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을 맞이하는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도쿄와 나고야, 교토, 오사카 등을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는데, 관중 속에는 중학생인 유카와 히데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게 중간자라는 힌트를 준 것은 바로 당나라 이백의 시와 장자의 응제편에 나오는 ‘혼돈사칠규’라는 우화였다. 빛과 그늘, 즉 세월은 천지라는 만물의 숙소를 스쳐가는 과객이라고 읊은 이백의 시에서 그는 시공과 소립자의 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또한 장자의 혼돈사칠규에 등장하는 남해의 임금 숙은 재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북해의 임금 홀은 재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중간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숙이나 홀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면서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유카와의 이 같은 기발한 발상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런데 3년 후인 1937년 중간자로 해석할 수 있는 입자가 실제로 관측됐다. 그리고 1947년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의 세실 파월 연구팀이 높은 고지대에서 장시간 우주 방사선 노출 실험끝에 파이온을 발견한것이다. 이후 유럽의 물리학계에서는 유카와를 보는 시선이 급격히 변화해 그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연이어 추천하기 시작했다. 노벨위원회는 결국 194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유카와 히데키를 선정했다. 유카와의 수상은 이론 분야의 업적을 잘 인정하지 않는 노벨위원회의 수상 원칙을 최초로 깬 노벨상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은퇴 후에는 여러편의 에세이를 쓰고 물리학 저널 편집하는 일을 했다. 또한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을 비롯한 이들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반(反)핵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상으로 모시던 아인슈타인과 함께한 유카와 히데키) (닐스 보어,오펜하이머와 함께) - dc official App
작성자 : 방파제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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