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흑과 백이 얽힌 회색지대, '콘크리트 유토피아'

메디먼트뉴스

2023.08.20 17:25:08

조회 39 추천 0 댓글 0

[메디먼트뉴스 김민서 인턴기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각적 스펙터클보다는 개별 인물 간 서사와 그에 녹아든 사회 병리에 주안점을 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다. '왜', '어떻게'에 대한 해명 대신 지진이라는 대재앙이 도심을 휩쓸고 지나간 뒤, "아파트 한 채만이 남는다면?"이라는 (원작의) 범상찮은 가정으로 대장정의 포문을 연다.

한파가 불어닥친 겨울, 생존의 거점지인 '황궁 아파트'를 두고 밖으로 내몰린 외부인들과 집을 사수하려는 입주민들 사이 실랑이가 한창이다. 이때 보기 드문 희생정신으로 주목받은 '영탁(이병헌)'이 주민대표가 되면서 그를 필두로 입주민들은 무력으로 외부인들을 박해 및 소탕하고 나름 합리적인 방식으로 임의적 자치제를 꾸려 생존해간다.

권위와 존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영탁은 극 초반 감투에 상응하지 않는 어수룩함을 보이지만 점차 입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표독스럽게 타락해간다. 한편, 그 반대 급부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을 지키려는 이 '명화(박보영)'도 있다. 영탁에 동화되어 인간성을 잃어가는 아파트 주민들을 목도할 수밖에 없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귀환한 '혜원(박지후)'의 고발에 힘입어 그 기형적인 체제에 비로소 반기를 든다.

그리고 이 두 대립각에 기초해 영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 군상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본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위험과 폭력을 감수하며 점차 피폐해져가는 '민성(박서준)', 재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하지만 자원 고갈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점차 감정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명화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념을 올곧게 지켜내고자 분투하는 '도균(김도윤)' 등.

텐트폴 무비의 기대치를 초월해 시네마적 역량까지 고루 갖춘 수작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테레오 타입에 편의적으로 인물을 구겨 넣지 않고 인간 면면의 모순성과 이를 추동 시키는 환경을 밀도 있게 엮는다. 여기에 이제는 빠질 수 없는 고질적인 소재가 된 부동산, 집단 이기주의, 타자화 등의 아젠다가 곁들여지니 관객은 그로부터 거리 두기가 어려워진다.

생존과 직결되는 선택의 순간, 영화는 이타심을 먼저 버리는 이들(흑)과 끝까지 이를 고수하려는 이들(백), 그리고 군중심리와 소신, 이기와 박애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모하는 이들을 비춤으로써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허문다.

그러나 동시에 답을 유보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탁과 그를 추종하던 주민들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끝내 괴멸되고 만다. 반면 양심을 수호했던 명화는 그 지옥도에서 탈출해 수직적 계급이 붕괴된 수평적 공간에서 공생을 이어간다.

여타 재난 영화의 결말이 그렇듯, 결국은 인도주의적 관점을 청사진으로 제시한다. 불가항적 카오스에 직면할 때 물리적 문명보다 먼저 힘을 잃는 건 지성적 문명일지 모른다. 이때 끝까지 윤리관을 져버리지 않는 명화의 존재는 영화적 판타지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은, 믿어야 할 엷은 희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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