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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 아부 모함메드 알 졸라니는 누구인가?
Guerre civile en Syrie : Qui est Abou Mohammed al-Jolani, le chef de HTS qui a fait chuter Bachar al-Assad ?시리아 내전 : Bachar al-Assad 를 우너뜨린 HTS, 그 단체를 이끄는 Abou Mohammed al-Jolani 는 누구인가?Portrait•Passé par al-Qaïda et contre l’idée de perpétrer des attentats en Occident, Abou Mohammed al-Jolani reste un personnage à part dans les mouvements islamistes. Le leader du groupe Hayat Tahrir al-Sham vient de mener la coalition rebelle à Damas과거 알 카에다에 투신했지만, 서방을 향한 테러를 반대하는, Abou Mohammed al-Jolani 는 이슬람 운동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Hayat Tahrir al-Shamvient 의 리더는, 얼마 전에 Damas 에서 반란군 연맹을 이끌게 되었습니다.머리가 좀 비어있네Son évolution reflète celle du mouvement rebelle en Syrie, passant de la violence et des divisions au consensus pour faire tomber le dictateur. Abou Mohammad al-Jolani, le chef de la coalition rebelle à l’origine d’une offensive fulgurante en Syrie qui a provoqué selon ses combattants la chute dimanche du président Bachar al-Assad, est passé d’un vocabulaire fondamentaliste à une parole qui se veut modérée pour parvenir à ses fins.그가 겪은 변화는, 폭력과 분열을 넘어 독재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모은 반군들이 겪었던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시리아 전격전의 (Offensive fulgurante) 성공을 통해 Abou Mohammed al-Jolani 는 반란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는데요, Jolani 의 전투원들에 따르면, 일요일, Bachar al-Assad 대통령 정권은 드디어 무너졌다고 전했습니다. Abou Mohammad al-Jolani 는 전쟁을 끝 맺기 위해, 근본주의적 성향에서 온건한 성향으로 변하고 있는 듯 합니다.이슬라미스트 단체 HTS, Al-Quaida 의 발산물Le leader de Hayat Tahrir al-Sham (HTS), ex-branche d’al-Qaïda en Syrie, s’était fixé comme objectif de renverser le président Assad, au pouvoir depuis 2000. Dimanche, les rebelles sont entrés dans la capitale et ont proclamé « la ville de Damas libre ». Grand, bien charpenté, une barbe noire et l’œil vif, Abou Mohammad al-Jolani a abandonné progressivement le turban des djihadistes dont il se coiffait au début de la guerre en 2011 pour un uniforme militaire et parfois pour un costume civil.과거 알 카에다의 시리아 지부였던 HTS 의 지도자는 2000년부터 정권을 잡고 있었던 Assad 대통령 정권으르 뒤집어 엎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요일, 반란군들은 수도에 진입해, "자유 Damas 도시" 를 선포했습니다. 길고, 잘 깎인 검은 수염과 총기가 살아있는 눈동자를 가진 Abou Mohammad al-Jolanin 는 2011년, 전쟁 초기 당시 자신의 머리에 얹었던 지하디스트의 터번을 버리고, 서서히 군복과, 때때로 민간인들의 복장을 입으려는 듯 보입니다.De l’engagement à la rupture avec al-Qaïda알카에다 합류부터 결별까지초기 설립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아이만 알 자와히리, 둘 다 미군이 줘패서 죽었다. Né en 1982, Ahmed al-Chareh, vrai nom de Jolani, a grandi à Mazzé, un quartier cossu de Damas, dans une famille aisée. En 2021, il a expliqué dans une interview à la chaîne publique américaine PBS, que son nom de guerre, Abou Mohammed al-Jolani, était une référence à ses origines familiales dans les hauteurs du Golan. Selon lui, son grand-père a été déplacé du Golan après la conquête en 1967 par Israël d’une grande partie de ce plateau syrien.1982년에 출생한 Ahmed al-Chareh, 실제이름은 Jolani 지만, 어쨌든 그는 Damas 에 위치한, 부유층 구역인 Mazzé 에서, 부유한 가족들의 보살핌 아래서 성장했씁니다. 2021년, Ahmed 는 미국 공영 방송 PBS 에서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쟁 이름은 Abou Mohammed al-Jolani 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그 이름은 자신의 가족들이 유래한 골란고원에서 따왔다고 설명했습니다. Ahmed 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1967년, 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골란 고원에서 쫓겨나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골란 고원, 중동의 대표적인 국경분쟁지역으로, 67년, 6일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신화적인 무력으로 시리아를 줘패고 이스라엘이 서부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 - 실효 지배 중이다.Après l’invasion américaine de l’Irak en 2003, il part combattre dans ce pays voisin de la Syrie, où il rejoint le groupe al-Qaïda en Irak d’Abou Moussab al-Zarqawi avant d’être emprisonné durant cinq ans. Après le début de la révolte contre Bachar al-Assad en 2011, il rejoint son pays natal pour y fonder le Front al-Nosra, qui deviendra HTS. En 2013, il refuse d’être adoubé par Abou Bakr al Baghdadi, futur chef de l’EI, et lui préfère l’émir d’al-Qaïda, Ayman al-Zawahiri.2003년의 미합중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은 후, 그는 이웃 국가를 위해 싸우기 위해 시리아를 뛰쳐나왔습니다. 이라크에서 Ahmed 는 Abou Moussab al-Zarqawi 의 이라크 알 카에다에 합류했지만, 이후 5년 동안 수감됩니다. 2011년 Bachar al-Assad 에 맞서는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모국으로 돌아가, al-Nosra 전선 (Front al-Nosra) 을 창립하는데, 이 단체는 후에 HTS 로 발전하게 됩니다. 2013년, Ahmed 는 미래의 ISIS 의 수장이 되는 Abou Bakr al Baghdadi 의 충성 서약 요구를 거절하는데요, 그 대신 알 카에다의 에미르인 Ayman al-Zawahiri 를 선택하게 됩니다.실제로, 알졸라니에 대한 기사에서 "islamiste" 나 "djihadiste" 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L'echo 에서는 정치인으로 변장한 지하디스트라는 평을,Le monde에서는 이라크의 지하디스트가 새로운 스트롱 맨이 됐다 라는,L'humanite 에서는 어떻게 이슬라미스트가 권력을 먹었나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놧다Depuis la rupture avec al-Qaïda en 2016, il tente de lisser son image et de présenter un visage plus modéré, sans trop convaincre les analystes ou encore les chancelleries occidentales qui classent HTS comme un groupe terroriste. « C’est un radical pragmatique », déclare à l’AFP Thomas Pierret, un spécialiste de l’islamisme en Syrie. « En 2014, il a été au sommet de sa radicalité pour s’imposer face à la frange radicale de la rébellion et de l’organisation Etat islamique, pour ensuite modérer ses propos », explique ce chercheur au CNRS.2016년, 알 카에다와의 결별 이후,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한편, 더 온건한 얼굴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글머에도 불구하고, 애널리스트들이나 서방 국가들은 HTS 를 테러 단체로 규정했지만요. AFP 의 시리아 이슬라미스트 전문가인 Thomas Pierret 는 "이건 실용적인 측면을 갖춘 극단주의이다" 라는 평을 내렸습니다. "2014년에, 반란군 내 소수파들의 극단성과 ISIS 에 맞서, Ahmed 의 극단성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이후, 보다 온건한 어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라고 CNRS 의 연구원은 평가했습니다.알레프는 역사적으로도 수도인 다마스와 대척하는 위치의 도시로, 최대의 반란군 도시였으나 알레프 전투의 대패로 정부군 손안에 들어간다.En 2017, il impose aux rebelles radicaux du nord de la Syrie, une fusion au sein de HTS. Il met en place une administration civile et multiplie les gestes envers les chrétiens dans la province d’Idleb que son groupe contrôle depuis deux ans. C’est là où HTS avait été accusé par des habitants, des proches de détenus et des défenseurs des droits humains, d’exactions qui s’apparentent selon l’ONU à des crimes de guerre, provoquant des manifestations il y a quelques mois.2017년에, 그는 시리아 북부의 극단적인 반란군들에게 HTS 에 합류하라고 강요합니다. Ahmed 는 2년 동안 장악하고 있던 Idleb 지역의 민간 행정 서비스를 재조직했고, 또 기독교 신도들에게 여러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HTS 는 UN에서 전쟁 범죄로 규정된 "강탈" 행위로, 몇달 전, 여러 시민들, 수감자의 친인척,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에 의한 여러 시위가 조직되기도 했스빈다.알레포는 시리아 제 2의 대도시로, 전쟁 이전, 12%에 달했던 그리스도인 인구가 2023년에는 1.4%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20개 이상의 교회들이 전쟁으로 인해 파손되었다.Après l’offensive, al-Jolani a cherché à rassurer les habitants d’Alep, ville qui compte une importante communauté chrétienne. Et il a appelé ses combattants à préserver « la sécurité dans les régions libérées ». « Je pense que c’est avant tout une question de bonne politique. Moins les Syriens et la communauté internationale auront peur, plus Jolani apparaîtra comme un acteur responsable plutôt que comme un extrémiste djihadiste toxique, et plus sa tâche sera facile », assure le chercheur Aron Lund. « Est-ce totalement sincère ? Certainement pas. Ce type vient d’une tradition fondamentaliste religieuse très dure. Mais ce qu’il fait, c’est la chose intelligente à dire et à faire en ce moment », conclut Aron Lund.공세 이후, al-Jolani 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있는 Alep 주민들을 안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투원들에게 "해방된 지역에서 치안" 을 확보하라고 명령했고요. 연구원인 Aron Lund 는 "저는 좋은 정치정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아인들과 국제 단체들이 두려움을 느낄수록, Jolani는 책임감있는 정치인보다는, 사악한 극단주의 지하디스트로 보일 테니까요. 그리고 좋은 정책을 펼친다면 그가 맡은 일들이 더 쉬워지기도 하겠죠." 라고 평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본심에서 나온 것들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이런 종교적 근본주의 전통은 굉장히 경직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들은, 지금으로써는 현명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세줄요약시리아 반군 대승리반란군 지도자가 시리아의 새로운 리더가 될듯?현재로써는 정상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지만, 지하디스트라는 배경 때문에, 눈돌아가면 지하디스트로 변신할지도 몰라-----아어 내용 존나어렵당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수정 필요한부분 있으면 말해주세요잉
작성자 : 도시드워프고정닉
벼락치기하면 안되는 이유: AJ Savage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1대의 B-29가 떨어뜨린 길이 3m, 직경 70cm의 자그마한 폭탄은 인구 35만의 대도시였던 히로시마를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었음. 르메이 쉐프께서 B-29 폭격기 350대를 동원해서 도쿄시민 9만명을 화끈하게 태워버리셨다면...... 이 아담한 폭탄은 단 1발으로 25만명의 히로시마 시민들과 히로시마 건물의 70%를 지도에서 말 그대로 지워버렸음 지금이야 핵만능주의는 이미 사장된 이론이었지만, 적어도 1945년에는 그렇지 않았음.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피어난 버섯구름을 보고 사람들은 앞으로의 전쟁이 총과 칼이 아닌, 원자폭탄으로 시작되고 끝난다고 생각했고, 제2차 대전 이후의 신질서를 생각하던 이들에게 핵폭탄은 가히 만병통치약처럼 보였음. 그들은 앞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전선을 진격할 필요없이 적의 수도에 핵폭탄만 투하하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고, 세계는 핵만능주의라는 거대한 광기에 빠졌음. 그리고, 초기 핵만능주의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다름아닌 이제 막 육군항공대에서 독립한 공군이었음. 냉전 초기, 아니 냉전이란게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전에는 ICBM과 SLBM은 커녕 원시적인 장거리 유도 로켓조차 없었기에, 핵폭탄을 적진까지 배달하는건 온전히 거대하고 느린 전략폭격기의 일이었고, 이를 운용하는 공군의 위상이 끝없이 치솟는건 당연한 일이었음. 그럼 육군과 해군은 뭐하냐고? 군축해야지 2차대전 이후, 미군은 대대적인 군축에 들어갔고, 당시 육군과 해군은 '핵도 못쏘는 쩌리' 로써 2류 전술군 취급을 받았음. 해군 제독들이 핵무기좀 보자니까 '니네가 쓸일도 없는데 꺼지쇼' 라며 입밴당하기도 했으니 뭐.... 당연히 육군과 해군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고, 둘은 어떻게든 핵무기를 갖추기 위해서 온갖 발악을 했음. 특히나 해군은 유독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민감했는데, 왜냐하면 핵무기 이전 최고의 전략병기는 해군이 굴리는 전함이었기 때문임. 낭만...아니 야만의 시대에 최고의 전략무기로써 그 위상을 뽐내던 전함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도 빡치는데 이젠 해군의 존재 자체가 핵무기라는 신무기에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군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핵무기를 투발하려고 몸을 비틀었음. 해군은 일단 육군한테 부탁해서 '노획한 V-2 쓰고 남은거 우리한테 좀 빌려줘라' 라고 쇼부쳤고, 육군측 실험 책임자한테 공군 몰래 뇌물을 맥여서 뉴맥시코의 화이트 샌즈 실험장에다 모의 갑판을 깔아놓고 실험까지 시켰음. 그리고 1947년 9월 6일, 당시 최대의 장갑항공모함이었던 USS 미드웨이에서 V-2 로켓 한발이 발사됨. 발사 결과는 다른 의미로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발사한 로켓의 이륙 각도부터가 틀어지며 공중분해되어서 미 해군은 흔들리는 항모에서 에탄올과 과산화수소가 들어있는 로켓을 날리는건 매우 위험한 계획이란걸 깨닫게 됨. 이후 해군은 지상기반 대잠초계기인 P-2 넵튠에다 핵탄두를 장착후 동체에다 로켓을 매달아 강제로 항모에서 사출시켜 핵폭격을 하려고 시도했음. 물론 P-2는 항공모함에 착함이 불가능했기에 승무원들은 핵과 함께 산화하거나 근처 비행장에다 착륙시킬 계획이었음. 1940년대가 아무리 낭만의 시대였다곤 해도 이게 미친 짓이란건 해군 수뇌부들도 알고 있었고, 해군은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들에게 1945년부터 당장 항모에 들어가는 핵폭격기를 만들어오라고 닦달했음.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AJ-1/2 Savage임. 이 폭격기의 임무는 아주, 아주 간단했음 해군용으로 제작된 MK.4 핵폭탄 1발을 매달고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떨어뜨리고 오는 것. 따라서 함상운용의 편리함이나 승무원의 생존성, 시간당 유지비 같은건 좆까고 최대한 빨리 함재 핵폭격기를 만들자는 마인드로 노스 아메리칸 사의 엔지니어들은 개발에 임했고, '날개가 접힌다' '항모에서 띄울 수 있다' 라는 특성 외에는 전혀 함상 운용에 적합하지 않은 폭격기였던 AJ 새비지는 개발 도중 시제기 3기 중 2기가 결함으로 추락하는 사소한 찐빠가 있었으나 결국 1950년, 개발 5년만에 미 해군항공대에 배치되었음. 새비지의 무장은 2천파운드 통상폭탄 혹은 Mk.4 핵폭탄 1발 뿐으로, 흔해빠진 자위용 기관포조차 달지 않았는데, 뭐 차피 핵떨구기 전이나 후에 격추당할 운명이라 나름 좋은 선택이었음. 사출좌석 또한 당연히 없어서 승무원들은 폭격기 옆문을 열고 뛰어내려야 했으나 이건 뭐 당시에는 사출좌석이 보편적이진 않았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음. 당시에는... 엔진은 프로펠러기에서 제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항공기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는데, 터보차저가 장착된 P&W R-2800 프롭엔진 2기가 주익에 설치되었고 이착륙과 과속을 돕는 엘리슨 J33 제트엔진이 동체 중앙에 위치했음. 이는 초기 제트엔진의 성능이 개병신이라 제트엔진만 박아놓았다면 J47 엔진때문에 고생했던 B-47 초기형들마냥 Jato로 이륙해야하는 대참사가 생기기 때문에 어쩔수없는 선택이었음. 물론, 제트엔진과 프롭엔진을 섞어쓰는 바람에 정비소요는 2배로 치솟았지만 미해군 입장에서 그런건 부차적인 문제였기에 상관하진 않았음. 하지만 이 새로운 함상 핵폭격기에겐 소소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냥 좆같이 느렸음. 물론 프로펠러기치곤 760km이라는 제법 빠른 속도를 가졌고, 순항속도 370km 최고속도 672km이라는........이게 B-29에서 발전한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절망적인 성능을 보여주던 B-36이나 그냥 B-29M인 B-50보단 당연히 나았지만 1948년에 도입되어 잦은 고장과 구식화로 인해 10년만에 퇴역한 미군 최초의 제트엔진 폭격기 B-45가 최고속도 900km을 찍었고 1951년에 도입되어서 동해와 북극해에서 Mig-17과 도그파이트하며 사진찍고 폭격하던 B-47 계열기들이 최고속도 980km, 1952년부터 생산해서 지금까지 폭탄셔틀하는 B-52가 최고속도 1000km를 찍는 와중에 얘만 느리단게 문제였음 핵전쟁이 발발하면 새비지는 지중해에서 대기타던 항모에서 발진해 목표지점까지 초저공으로 비행, 이후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제트엔진을 켜고 고고도로 급상승한 이후 폭탄을 떨구고 ㅌㅌ하게 계획되었지만, 천음속기인 B-52나 B-47도 생존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최고속도 750km짜리 폭격기가 소련 영공에 진입이라도 할 수 있다면 기적인 수준이었으며, 미 해군은 루마니아나 몰도바까지만 가도 성공적이라고 봤음. 새비지는 핵투발을 위해 대공기총도 떼버렸기에 Mig-15라도 만나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고, 이는 안그래도 처참한 생존성을 더 떨어뜨렸음. 전에 써먹어봤던 P-2는 방어용 대공기총이라도 있었지만 이건 뭐... 게다가 함재기치곤 너무 크고 무거워서 운용하기도 매우 좆같았음 앞서 말했다시피 '핵공격' 이외에는 다 내다버린 기체였기에 당시 함재기들 중에선 제일 크고 무거웠으며, 이로 인해서 배치 초기에 AJ를 운용할 수 있는 항모는 미드웨이급뿐이었음. 이는 퇴역 예정이었던 에식스급의 현대화 개장을 촉진시켰고 덕분에 에식스급 상당수가 퇴역을 미루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음. 해군은 유일한 핵폭격기였던 AJ-1/2를 애지중지하며 굴렸으나 정작 일선에서는 인기가 없었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이착함 때마다 갑판을 완전히 비워야 했으며, 날개를 인력으로 접고 펼처줘야해서 이륙준비 자체가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임 이후 1956년, 새비지의 후계기인 A-3 스카이워리어가 등장하자 해군은 즉시 이 느리고 거대한 폭격기를 핵폭격 임무에서 제외시켜버렸으며, 이후 잔존기체들은 공중급유기나 정찰기인 AJ-2P로 개수되어 운용되었고, 근본적으로 태생이 덩치큰 중폭격기였기에 꽤나 잘 써먹었음. 항속거리가 3,000km에 달하고 대형 카메라를 실을 공간이 넉넉했던 덕분에 이런 용도로는 그런 대로 쓸만했기 때문임. 또 새비지는 기내 연료탱크 용량이 6천리터나 될만큼 무지막지하게 커서 폭탄창 내부에 포드만 달아 주면 공중급유기 역할을 맡기기에도 문제가 없었음. 이렇게 새비지는 제 2의 인생을 살아가나 싶었지만..... 1960년, 미 해군은 운용 10년만에 AJ 새비지 143기를 모두 퇴역시켰고, 이중 7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체는 모두 스크랩되었음. 이중 3기는 NASA로 이관되어 무중력 실험기로 써먹다가 1964년에 퇴역 후 스크랩되었고, 다른 3기는 후방에 있던 제트엔진을 제거, 8,000L의 물탱크를 장착하고 불끄러다니다 2기는 추락하고 1기는 1969년에 스크랩되었음. 마지막으로 운용된 AJ-1/2 새비지 130418호기는 미국의 엔진 제조사인 라이커밍에서 1984년까지 자사 제트엔진 실험기로 굴리다가 기골에 균열이 생겨 스크랩당할 운명이었지만 기술자들은 이 AJ가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AJ-1/2라는걸 알아채고 플로리다주 펜시콜라의 국립 해군항공박물관으로 보냈고, 아직도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음. 객관적으로 봤을때, AJ 새비지는 완벽한 실패작이었음. 이 과도기적 래시프로-제트 폭격기는 B-58이나 B-47처럼 날렵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B-36이나 B-52처럼 폭장량이 많지도 않았으며, 내구성이나 정비성이 좋지도 않았던데다 운용하기도 까다로웠고, 실전 기록같은건 존재하지도 않은, 등장한지 단 5년만에 설자리를 잃어버린.....한마디로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 폭격기일 뿐이었음. 하지만, 그녀는 1950년대 초 공군에게 밀려 감편당할 위기였던 미 해군의 유일한 핵폭격기로 활약하며 해군의 필요성을 증명해낸 기체였으며, 한국에도 파병되어 핵 억제력의 일원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했던 폭격기였고, 특유의 태생적 한계로 폭격임무에서 배제된 이후에도 지원기로써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내고 1980년대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비행기이기도 했음.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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