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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가 메인디쉬인 간사이 여행기 1편 - 출국, 히메지성
저번주 4박 5일로 간사이에 다녀왔어. 사실상 12월 하순이지만 늦은 단풍 덕에 단풍명소에서도 좋은 사진 많이 건졌고 날은 추웠지만 좋은 리프레시가 된 여행이었어. 고베에서 1박 하며 히메지성과 아리마온천을 돌고, 교토에 3박을 주고 그동안 교토 다녀오면서 못본 곳, 안 해본 거 그리고 두번 세번 가도 좋았던 곳들 위주로 여유있게 둘러 봤음. 사실 출국 다음날이 히메지성이었지만 저녁 비행기로 넘어갔기에 실질적인 첫날일정이 히메지성이었음. 대한항공 일반석으로 갔는데, 첫날 오후 2시 쯤 공항 2터미널 도착하니 마티나 일반 라운지는 줄이 너무 길어서 갈 수가 없더라. 댄공이라 일단 기내식이 나온다지만, 일본노선 기내식은 맛있게 먹은 적이 손에 꼽는지라 별로 기대도 안 되고 해서 아끼고 아끼던 마티나 골드 라운지 이용권 두장을 썼음. 일단 골드는 일반라운지처럼 줄서서 안 기다려서 쾌적하고, 라운지 내부에 사람도 별로 없어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음. 볶음밥도 폭립도 맛있고 와인이나 맥주도 계속 마실 수 있었는데... 와인은 저가형 와인들이라 그런지 딱히 맛있진 않아서 생맥주로 계속 마셨어. 입맛이 저렴한 편이라 그냥 캔맥주나 생맥주만 마셔도 맛있어서 이게 나은 것 같다. 그리고 기대 안 했던 그대로의 기내식 ㅋㅋㅋㅋ 해산물이라는데 진짜 드릅게 맛없더라... 먹다 남기고 그냥 맥주 달라고 해서 계속 마셨음. 저녁비행기라 도착하고 일정도 없어서 술 진탕 마셔도 좋아쓰! 파스텔톤의 하늘을 감상하며 무사 도착. ... 했으나 무수한 서양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입국심사대를 점령하고 뭔가 안됐는지 심사대 직원들 붙잡고 5분 10분씩 실랑이 벌이느라 입국심사 딜레이가 무지막지하게 길어져서, 진짜 입국심사 통과하는데만 1시간 20분정도 걸린 것 같다. 새치기도 당했음 서양인들한테. 가만 보니까 비짓재팬웹을 안했거나, 잘못 기재했거나, 가족 단위가 한번에 해야 할 것을 따로 하거나 반대로 개개인이 해야 할 것을 한번에 뭉뚱그렸거나 해서 막힌 것 같더라. 즉석에서 옹기종기 쭈그려앉아 와이파이 잡고 VJW 하고있더라고. 간사이공항 1터미널에 도착해서, 항상 하루카 특급 타고 교토로 가던 여느 여행들과는 다른 동선을 채택함. 간사이공항에서 고속페리로 고베공항으로 이동하는건데, 도착해서 입국장 나오면 바로 오른편에 고속페리 매표소가 있음. 여권을 제시하면 외국인 한정으로 페리 가격이 500엔 밖에 안해서 매우 저렴하게 고베까지 이동할 수가 있다. 게다가 카드결제도 가능.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면 페리 탑승장까지 운행되는 무료 셔틀을 이용할 수 있음. 무료 셔틀로 10분 정도 가면 선착장인데 셔틀시간이 배 출발시간이랑 맞춰서 배차되어 있어 오래 기다리거나 하는 일은 없음. 고베공항 도착해서도 선착장에서 포트라이너 타는 고베공항역까지 또 무료셔틀로 5~10분 정도 이동해야 함. 간사이공항 도착층 -> 페리선착장 (10분, 무료 셔틀) 간사이공항 -> 고베공항 (30분, 고속페리 500엔) 고베공항 선착장 -> 고베공항역 (5~10분, 무료 셔틀) 고베공항역 -> 산노미야역 (18분, 포트라이너 280엔) 이 순서로 좀 번거롭긴 하지만 간사이공항에서 산노미야역까지 딸깍딸깍의 연속으로 780엔에 이동할 수 있어. 총 시간도 1시간여 정도로 길지 않은 편. 페리 타는건 홍콩 이후 처음인데 사람도 생각보다 많지 않고, 속도도 빨랐음. 타는 분들 대다수가 한국인이었는데 옆자리 한국인은 와이파이 연결 안되니까 갤럭시 100배 줌 땡겨서 저 티비 옆에 와이파이 표시 붙어있는거 뒤적거리면서 비밀번호 찾으시더라. 그리고 우리나라 뉴스가 왕창 보도되었음... 이게 외국에서 접하니까 뭔가 자극적으로 다가오고 새롭더라. 우리나라 사정 다 알고 있는데도 타지에서 이렇게 보도되는 자료 보고있자니 진짜 전쟁나기 3초전인 나라처럼 느껴지는 게 좀 있긴 했어. 일부러 편파나 자극 보도 하는 것도 아닌데 왜일까... 우리 나라 일이라고 좀 무감각해진 거였을까? 고베공항역에서 포트라이너로 산노미야로 이동함. 여긴 포트라이너 단일노선만 쓰는 플랫폼이라 그런지 스크린도어 잘 깔려있음. 도착해서 숙소는 이쿠타신사 바로 앞, 산노미야 역에서는 도보 5~7분 정도 거리였는데 호텔 옆에 한식 식당이 있더라. 신기해서 찍어봄. 산노미야의 어딘가 수상한 마네키 알바 (친절해요) 산노미야의 솔직한 첫인상으로는 신주쿠나 나고야 사카에 이상으로 질서없는 거리라는 느낌이었어. 사카에는 질서없진 않고 정신없다 정도 느낌인데 여기는 ㄹㅇ 정신도 없고 질서도 없는 마굴같은 느낌. 길거리 쓰레기도 많고 게다가 일본, 중국 사람들인데도 투블럭이나 한국식 화장이 엄청 많아서 빼박 한국사람같다 싶은 애들이 다 중국인 일본인이네? 하고 놀랐던 기억이. 중국사람은 다 옆머리 뒷머리 바짝 밀고 앞머리 삐죽한 가리봉동 컷 한것만 봤지, 한국 아이돌식 투블럭 가르마펌 한 애들은 ㄹㅇ 처음 봤다. 게다가 고베규 레스토랑이 즐비해있어서 거리 어디에서나 위장을 자극하는 기름진 소고기 냄새가 엄청 올라와서 참기 힘들었다. 근데 신기한건 아침 되니까 길거리 쓰레기나 양아치들 싹 사라지고 질서정연한 사람들, 맛있는 빵집들이 늘어선 깔끔한 거리로 바뀌더라. 정말 야누스적인 거리였다고나 할까. 그냥 입국과정도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고 이 거리에서도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까 아는 맛으로 내 정신을 조율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느껴서 비프카츠니 뭐니 알아봤던 곳들 다 제쳐두고 마츠야, KFC, 이치란을 순서대로 방문함. (사실 그냥 졸라 늦어서 비프카츠집이 닫아버렸음) KFC는 진짜 좆 같았고 이치란이랑 마츠야는 아, 딱 아는 그맛. 근데 사실 KFC를 제일 기대했었거든. 똥 밟아서 마상 줫나 입음 ㅅㅂ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 + 자기 전 마지막 한 캔으로 다사다난했던 입국날을 뒤로 한 채 침대에 누웠음. 다음날 호텔을 나가자마자 이쿠타신사에 들렀음. 진짜 호텔 나와서 도보 3초 거리에 있었기에 들렀다 간다는 말이 딱 제격인 수준의 동선이었다. 아침으로는 이스즈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먹었음. 빵 뭐 먹을지 하나씩 골라 담고 있는데 현지 아주머님들이 뒤늦게 들어와서 아무 망설임 없는 절제된 동작으로 초코 쏙쏙 박힌 베이글을 열댓개 담아서 포장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와 저게 진짜인가보다 하고 따라서 샀는데 그냥 초코칩 박힌 살짝 딱딱해진 베이글맛이었음 이상하다 보통 이러면 정답이었는데.... 아무튼 빵 집어먹고 산노미야 역에서 신쾌속으로 히메지역에 하차. 역에서부터 보이는 웅장한 히메지성이 압권. 날씨가 다소 아쉬웠지만, 구리구리한 수준은 아니었고 뜸뜸히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도 해서 이정도면 감지덕지라는 마음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상황 때문에 찍을 때마다 날씨가 GOAT와 semi JOAT를 오가는 느낌....? 히메지성은 규모가 정말 크다. 코코엔을 차치하더라도 성 전체가 정말 요새 그 자체라는 느낌. 1600년대 성 건축기술이 가장 절정이던 시기에 지어졌다니까 그럴만도 한 것 같다. 국보 5성 중에 이누야마성을 제일 인상깊게 봤는데 히메지성도 진짜 만만치 않게 좋았음. 흰색의 외관이 아름다워서 백로성으로도 불린다는데 정말 그 이름값만큼 아름다운 성이었음. 히메지성은 일본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제일 처음으로 등재된 문화재인데, 지금의 일본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아주 많아서 별 감흥 없을테지만 그 처음이 되었다는 건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뛰어나다는 거겠지? 역사적 가치나 규모 등을 생각했을 때 왜 히메지성이 성 중에 최고로 꼽히는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히메지성은 또 현대적인 복원 없이 원형을 잘 유지한 성으로도 꼽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세계대전 때 히메지시에 폭탄 뒤지게 쳐맞는 와중에도 이 성에 떨어진 폭탄만큼은 불발탄이어서 소실되지 않고 남았다나. 이 정도면 신이 한번 생존하라고 1코인 넣어준 거 아닐까? 히메지성은 천수각까지가 6층인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누야마성과는 다르게 천수각이 막 발코니처럼 되어있는 게 아니라 창 밖으로 내다볼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음. 이게 보통인가? 성이라곤 이누야마랑 여기밖에 안 와봐서 데이터가 부족하다. 나가는 길에 유자나무도 있더라. 유명한 우물 히메지성 입구에서 무수한 사진 요청을 받던 사무라이 아재. 이거 찍고 뒤돌아서 횡단보도 건너려는데 초록불 켜지니까 저 아저씨 갑자기 칼 치켜들고 전진하라!!!! 하면서 횡단보도 성큼성큼 건너가시더라. 주변 사람들 다 현웃 터짐 ㅋㅋㅋㅋㅋ 곳곳에 닌자들도 있긴 했는데 저 사무라이 아재 횡단보도 퍼포먼스때문에 싹 잊혀짐 ㄹㅇ.... 코코엔도 티켓 끊었는데 아리마온천 일정이 남아서 둘러보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패스하고 나왔음. 티켓은 귀국해서 다른 친구한테 고이 넘겨줬다. 어차피 못 쓸 테지만.... 물론 방문한 김에 코코엔도 보고 안도타다오가 지은 히메지 문학관도 보고 오토코야마 배수지 공원도 보고 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셋 다 못본 김에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맞지 싶음. 다시 올 이유라는 건 남겨둘수록 좋은 거니까. 다음은 1일차의 두번째 일정인 아리마온천인데 사진 정리 서둘러서 후딱후딱 여행기 마저 올려보겠음!
작성자 : 호랑신고정닉
(장문) 구로다의 인생
2012년 6월, 뉴욕타임즈의 데이비드 월스테인 기자 구로다에게 묻는다.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요?"월스테인이 기대한 대답은 아마 야구만화와 같은 천재의 성장기나 고시엔의 낭만 스토리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핀스트라이프를 입었음에도 구로다는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할 정도의 재능이니... 이런 선수의 고등학교 생활은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지레 짐작함이 이상하지 않았다. 구로다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코치가 땡볕에서 훈련을 시키며 물도 못 마시게 하던 시대요. " 구로다는 씁쓸하게 웃었다. 모든 일본의 고교선수는 고시엔을 꿈꾼다. 구로다에게 그 시절은 꿈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1. 이 물... 마셔도 죽진 않겠지?야구선수인 아버지와 투포환선수인 어머니를 둔 아이가 투수를 꿈꾸며 자라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위 말하는 운동 금수저. 재능을 타고났다고 다들 믿었을 것이다. 구로다 자신조차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오면서도 구로다의 재능은 그를 외면했다. 메이저리그를 두드린 일본의 천재들은 고교시절부터 슈퍼스타인 경우가 많지만 구로다는 고시엔 출전기록조차 없다. 구로다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모교인 우에노미야 고교에 찾아간 PD가 당시 야구부 담당 선생에게 물었다. "구로다는 어떤 학생이었나요?""솔직히 구로다가 대학에서 140을 던진다고 할 때 그 구로다? 구로다가 맞아? 라고 되물었습니다. 전혀 인상이 없어요."<고교시절 몰래 마셨던 하천을 보는 구로다>다만 구로다는, 그 시절의 우선순위가 야구보다 생존이었다고 회고한다. 일본의 여름은 살인적이다. 특히 구로다의 고향인 오사카는 더더욱. 그 폭염 속에 야구부 선수들은 수없이 뛰고 얼차려를 받았고 코치들은 아이들에게 물 한 모금 허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학생들이 실신했다. '근성'이니 '정신력'이니 하는 포장으로 야만이 자행하던 시대였다. "공 주으러 가는척하면서 몰래 하천 물 마시면서 버텼어요. 깨끗한지는 모르겠고.. 깨끗하다고 믿으면서 살았어요. 경기를 뛰려면 살아야하니까요"훈련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 속에 구로다의 재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등판 기록조차 몇 없는 패전처리조. 월스테인과의 인터뷰 말미에서 구로다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구를 던지라고 해도 던질 수 있을겁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어쩌면 고교시절이 저를 있게 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하지만 그런 일을 겪지 않았었다면 야구를 즐길 수 있었을겁니다." 2. 히로시마 도요카프. 역지명하겠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거지'가 별명인 팀들은 꼭 있다. '약팀', '기피팀', 'ㅄ팀' '비인기팀' 등의 수식어와 함께 말이다. 당연히 유망주들의 기피대상. 원하는 팀에 지명되지 못하면 재수하는 문화까지 있던 그 시절 NPB에서 일본의 '거지팀' 히로시마 도요카프에게 좋은 유망주란 하늘의 별과 같았다. 그런데 그곳에 스스로 걸어들어간 멍청이가 있었다. 구로다 히로키. 흙탕물을 마시던 그 고등학생이 대학을 거쳐 어느덧 드래프트 대어 중 한 명으로 성장해있었다. 지옥같던 고교시절을 보낸 구로다. 야구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그의 마음을 다잡은건 아버지였다. 고향인 관서를 떠나 도쿄에서 뛰어보자는 아버지의 말에 구로다는 도쿄 센슈대학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나간다. 그리고 결과는 대박. 140도 넘기지 못하던 구속이 150KM를 찍고 졸업했다. 대학야구 150은 스피드건이 도입된 이래 일본 최초였다고 한다. 드디어 재능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히로시마에 입단하는 구로다 히로키>드래프트 대어로 떠오른 구로다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직업 선택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선수가 팀을 지명하는 역지명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하도 선수들이 요미우리만 가니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어쨋든 역지명 제도가 있던 당시, 히로시마 입장에선 유망한 투수가 자신들을 선택하리라고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한 팀, 우승이 없는 팀, 인기도 없는 팀이었고 심지어 고향팀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로다는 히로시마의 유니폼을 입는다. 지금의 사사키가 제발로 애슬래틱스에 걸어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니.. 이 정신 나간 선택에 사람들이 의문을 표하자 구로다는 히로시마와의 소소한 인연을 전한다. "제가 무명이던 대학교 1년 차부터 저를 지켜봐주던 히로시마의 스카우터가 있습니다. 히로시마의 관심이 있었기에 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그렇게 구로다는 훗날 히로시마의 영구결번이 될 15번 유니폼을 입게 된다. 3. 힘이 다하기 전에 꼭 다시 돌아올게. 구로다의 낭만에 감명받은 히로시마 선수들은 분기탱천하여 일본 시리즈를 우승.... 하는 그런 야구만화 같은 일은 없었다. 구로다가 입단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히로시마는 단 한번도 가을야구를 해보지 못했다. 그 기간 구로다의 성적 243경기 1660이닝 3.59 WAR 30.6 67완투 13완봉 91승 81패... 이름 가려놓고 성적만 봐도 팀 꼬라지가 보인다. 그렇게 구로다의 도요카프 1기는 흔한 '좆망팀 에이스'의 고군분투기로 마쳐지고 있었다.06 시즌이 끝나고 그는 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FA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히로시마의 팬들이야 당연히 구로다를 붙잡고 싶었지만 앞서 말했듯 히로시마는 거지다. 그 시점까지 단 한 명의 FA를 잡아본 적이 없었기에 팬들도 반쯤 포기상태였으며 게다가 구단은 구로다에 10억엔 + 감독 보장이란 후려치기 오퍼를 날려 팬들의 자조에 기름을 붙는다. 많지 않나..? 싶을 수 있겠지만 이미 부자구단으로 유명한 요미우리가 30억엔을 제의했단 소문이 들렸었다.06시즌의 마지막 경기 9회 2아웃. 하나 남은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 구로다가 등판한다. 구장의 모두가 아는 고별무대였다. 팬들은 외야에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의 빛나는 그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라고 적힌 현수막을 손수 써서 외야에 붙이고 육성응원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빛냈다. 다만, 히로시마 팬들의 눈물겨운 작별인사가 정말 고별무대가 되진 않았다. 미국 진출이란 구로다의 목표와 암투병중이던 아버지의 병간호 등 여러 사정이 겹쳐 구로다는 히로시마가 제안한 그 말도 안되는 계약을 받았다. 거인의 30억엔을 걷어차고 체결한 4년 12억엔의 연장계약. 원하면 언제든 미국에 진출할 수 있다는 옵션을 넣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200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그는 히로시마를 떠날 결심을 한다. 태평양을 건너 더 큰 무대에서 뛰어보자고. 팀의 영웅을 적으로 만나지 않게 된 카프 팬들도 기쁜 마음으로 미국행을 환영했다. LA 다저스로 떠나며 팬들에게 구로다도 한 가지 약속을 남긴다."돌아온다면 히로시마 밖에 없다. 힘이 다 하기 전에 돌아오겠다."4. 33살에 미국 진출이 가능할까요..?33살. 사회에선 몰라도 야구선수로선 절대 적은 나이가 아니다. 비관적인 시선도 꽤 많았지만 구로다는 다저스란 명문팀에 입단하여 4년간 안정적인 성적을 보여준다. 4년 통산 성적은 700이닝 3.44 41승 46패. (왜 히로시마 때보다 씹창난거지..?) 33세부터 36세 시즌까지 구로다는 그야말로 계산이 서는 선발투수였다.물론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구로다가 190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한 유일한 시즌인 09시즌 그는 정말 목숨을 잃을만한 타구에 맞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50zvl8UN4 Hiroki Kuroda Takes A Liner Off His Head I own nothing, I collect nothing.www.youtube.com애리조나와의 원정경기에서 타자가 친 하드힛이 그대로 구로다의 머리로 향했다. 즉각 들것이 들어왔고 구로다는 들것에 몸을 고정한채 경기장에서 실려나간다. 이 부상이 메이저리그 7년간 유일하게 규정이닝을 뛰지 못하게 만든 유일한 부상이었다. 천운으로 큰 후유증은 없었으나 그야말로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이후 다저스를 떠나 양키스에 입단. 양키스에서 뛴 3년간 단기계약만을 고집하며 다시 한 번 저새끼 뭔가..? 싶은 행보를 보인다. 왜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에 구로다의 대답은 간략했다. "내년을 위해 야구할 나이는 아니다. 당장 지금만을 위해 불사르고 싶다."(새겨들었으면 하는 새끼들이 다들 응원 팀에 한 명 씩 있을듯하다...) 결과적으로 구로다의 미국행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교진이 제안한 30억엔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벌었으며 우승은 못했지만 커리어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통산 성적은 212경기 1319이닝 3.45 79승 79패. 더 놀라운건 은퇴에 가까울 나이인 서른 일곱에 양키스로 건너가 기록한 3년간의 성적이 97경기 619이닝 3.45 38승 33패였단 것이다. 선발이 귀한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그가 40세에도 미국에 남을거라 확신했다. 그런데...5. 힘이 다 하기 전에 돌아왔습니다!그는 약속을 지켰다. 샌디에이고의 2000만 불에 가까운 오퍼를 뿌리친 채 히로시마에 고작 1년 4억엔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팬들은 프랜차이즈 스타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히로시마의 연간회원권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매진됐으며 히로시마 현내 카프 경기의 TV 점유율은 39%에 달했다고 한다. 구로다 역시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화답했다. 15년 40세의 구로다가 기록한 성적은 169이닝 2.55 ERA. 11승 8패 4.4WAR. 히로시마 1기를 포함해도 2번째로 낮은 평균자책점이었다. 그러나 팀은 아쉽게도 1승 차이로 한신에 밀려 가을야구를 하지 못했다. (7년간 전혀 성장하지 않았나..?)히로시마의 16시즌도 낙관하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구로다의 바통을 이어받아 개같이 갈려준 마에다가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그리고 거기서 또 갈린다) 히로시마는 7년 후에도 거지였기 때문에 빈자리를 채우는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구로다 역시 시즌이 시작 되기 전 은퇴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히로시마 팬들 입장에선 하루아침에 1,2선발이 사라지게 될 판이었으니 희망찬 오프시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비관적인 전망을 완벽하게 바꾼다. 1선발 크리스존슨은 그 해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라 정도로 완벽한 피칭을 보여줬다. 노무라 유스케가 최다승, 구로다가 151이닝 ERA 3.09로 그 뒤를 받쳤고 탄탄한 야수진과 선발 불펜의 조화로 히로시마는 89승 52패 2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찍으며 25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동시에 구로다는 히로시마에서 13시즌을 뛰는 동안 드디어.. 드디어.. 가을야구를 경험하게 된다. <센트럴리그 우승 당시 헹가레를 받는 구로다> 구로다의 첫 가을야구 상대는 요코하마 DENA 였다. 파이널스테이지(MLB의 챔쉽)에서 히로시마는 시종일관 요코하마를 압도하며 4대1로 완파. 진즉 일본시리즈 티켓을 확보하고 퍼시픽 리그 파이널시리즈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퍼시픽리그 파이널 시리즈 5차전. 일본 시리즈 진출까지 아웃카운트 3개만을 남겨둔 감독은 세이브 상황에서 야구 역사상 누구도 상상못한 투수교체를 단행한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냇말에 관객들이 술렁인다."9회 파이터즈의 수비교체 알려드립니다. 지명타자 오타니가 피쳐. 3번 투수 오타니 쇼헤이"https://www.youtube.com/watch?v=MGw44ZSNt_I 오오타니 쇼헤이 최고구속165km기록영상 오오타니 쇼헤이 최고구속165km기록영상www.youtube.com9회 삼자범퇴. 2K. 이날 기록한 165KM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구속이었다. 6. 구시대의 마지막과 새시대의 시작은퇴를 발표한 노장의 마지막과 이미 리그 MVP가 기정사실이였던 젊은 선수. 히로시마 도요카프와 니혼햄 파이터즈의 맞대결. 먼저 단두대에 오른건 오타니였다. 오타니는 1차전 선발이자 8번 타자로 등판하며 6이닝 3실점, 3타수 2안타 (2루타 1) 이란 호성적을 기록했으나 팀은 패배했다. 이어진 2차전 역시 니혼햄은 무기력하게 패배. 히로시마에서 열린 2경기를 모두 내주며 삿포로로 넘어왔다. 히로시마 2 VS 니혼햄 0 구로다와 히로시마 팬들의 눈에 32년만의 우승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반전을 꾀하는 니혼햄 파이터즈를 막아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등판한 3차전 선발투수는 구로다였다. 가난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돈을 포기하고 낭만을 택한 그가 커리어의 마지막을 팀의 우승으로 마친다는 만화같은 결말이 눈앞에 있었다. 역경과 인내, 희생으로 점철된 야구인생은 그런 영광스런 마무리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야구가 늘 낭만적이지는 않다. 구로다는 이날 5.2이닝 1실점으로 대호투했지만 13시즌동안 응답해주지 않았던 히로시마의 타선은 그날도 조용했다. 결국 히로시마는 3대 3으로 진행된 10회말 오타니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3경기에서 패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H-jcy9ug_M 【日本シリーズ】10回裏 大谷翔平 劇的サヨナラタイムリー!全球フル! 【日本シリーズ】10回裏 大谷翔平 劇的サヨナラタイムリー!全球フル!www.youtube.com 히로시마는 급속도로 무너졌다. 이후 이어진 모든 경기에서 전패하며 시리즈 스코어 4대 2로 니혼햄의 10년만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단 한 게임만 더 잡았더라면 7차전 구로다의 등판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히로시마는 결국 그 한 경기를 잡아주지 못했다. 그렇게 구로다 히로키란 대투수의 커리어는 마침표를 찍었다. 히로시마에서의 13시즌. 가을야구는 단 한번. 트로피 진열대는 텅텅 비었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떤 히로시마 팬들도 그를 무관딱 정규 스찌라고 조롱하지 않았다. 7. 마치며얼마 전 구로다는 자신을 일본시리즈 문턱에서 좌절시킨 오타니를 향해 진심어린 조언을 한다. "오타니도 분명 힘들거다. 그는 많은 것을 짊어지며 그라운드에 서있다. "책임감. 구로다는 빈 말로라도 야구가 즐겁다고 하지 않았다. 혹독한 유년기의 경험 탓도 있겠지만 필자는 구로다의 성향 자체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선발투수로서 매 경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히로시마의 기둥으로써 팀을 버릴 수 없다는 책임감. 늘 그 과업에 짓눌려 야구를 하니 즐거울 수가 없었을터. 단기계약만을 고집했던 태도 역시 늙어서 팀에 민폐가 될 수 없다는 그 성격 탓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덕에 구로다의 커리어는 누구보다도 멋졌다. 바다 건너 한국사람이 그의 삶에 경탄할만큼 말이다. 선수에게 최고의 영광인 우승을 손에 넣지 못했고, 야마모토처럼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그는 히로시마의 가장이었고 자식같은 팬들은 늘 존경과 박수를 보내줬다. 구로다는 히로시마에게나 가족에게나 영광스런 아버지였다. 사람마다 꿈은 다르다. 돈이 꿈인 선수에게, 우승이 꿈인 선수에게 구로다의 커리어는 실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로다는 분명 자신의 꿈을 이뤘다. "훗날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나의 꿈입니다"-히로시마로 돌아올 때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하며, 성공한 야구선수. 구로다 히로키-
작성자 : 글쟁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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