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심장을 가진 사나이, 스파이 ‘준’도 생활인으로서의 부분에서는 여느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오르는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시 외곽에 전셋집을 마련한 소시민 ‘준’이었으니까.

게다가 ‘준’은 이사를 앞두고 갑자기 밀려드는 일 때문에 이사 당일 아침까지 준비를 전혀 못하고 있다가, 거의 무방비 상태로 포장 이사팀을 맞았다.

점령군처럼 밀려들어와 집을 장악한 포장 이사팀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류창고와 다름없던 ‘준’의 집안을 깨끗하게 비워갔다.

그리고 얼마 뒤, 시 외곽의 새 전셋집에 ‘준’의 이삿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살던 집에서 옮겨온 플라스틱 박스의 상단에는 박스 속의 물건들이 어느 곳에 있던 것들인지가 닳고 닳은 매직으로 표시돼 있었다.

-문간방
-안방
-서재
-주방
-화장실

이사가 끝나고, 새 전셋집에 혼자 남겨진 ‘준’. 방 개수와 구조가 비슷해 박스 속의 짐이 거의 그대로 옮겨졌지만 간혹 엉뚱한 곳에 물건들이 놓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물건을 정리하다가 ‘준’은 돌연 머리털이 삐쭉 서는 것을 느꼈다.

서재에 숨겨 놨던 발터PPK 권총 한 자루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었다. 만약 이삿짐센터 직원 중 누군가가 권총을 발견하고 훔쳐가기라도 했다면… 이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두꺼운 인문교양서적 안에 교묘하게 숨겨두었다는 점이다. 책을 펼쳐보지 않는 이상은 그 안에 총이 있다는 건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서재에 그대로 옮겨 놨겠지?

‘준’의 안일한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재에는 그 책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책을 문간방에 옮겨 놨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문간방에도 책은 없었다.

과연 강철심장 ‘준’의 발터PPK는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