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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와 아르헨티나의 관계.jpg
축구스타 메시는 이태리의 국적을 가지고있다세리아에서 뛴적도 없는 그가 왜 국적이있을까?이태리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는1934년 이태리 월드컵 당시반드시 우승하기 위하여 내놓은 정책이있다당대 최고 선수들인 루이스몬티,엔리케 구에이라등이들은 모두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으로무솔리니 정권의 국위선양 프로젝트에 따라 귀화가 추진된 케이스이다. 당시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파시즘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했고이 귀화 전략은 실제로 1934년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그 귀화전략이 감금과 협박 설득 돈으로 회유였지만 말이다.남미 대부분 국가는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다수지만아르헨티나는 예외적으로 백인 비율이 약 85%에 달한다. 에바 페론, 교황 프란치스코, 리오넬 메시처럼 유럽계 외모를 지닌 인물들이 대표적이며메스티소는 11.1%에 불과하다이런 인구 구성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남미 속 유럽’이라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인디오’라는 표현은 ‘인도인’에서 비롯된 잘못된 명칭이탈리아는 1870년에 통일했지만 자원도 부족하고 땅도 화산이랑 구릉지대가 많아서 공업이랑 농업 둘 다 발전하기 힘들었더. 특히 남부는 아직도 봉건적인 장원경제에 묶여 있어서농민들이 거의 농노처럼 살았고 경제는 전반적으로 약했다. 통일 직후에도 프랑스랑 오스트리아 같은 외세가 계속 끼어들었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강대국들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제가 약했다.이태리는 1880년경 동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보했지만 자원 부족을 해결하지 못했고식민 경영에 필요한 시장과 원료 공급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업과 농업 모두 낙후돼 통일 이후에도 나라가 빈곤했고 특히 남부는 점점 더 가난해졌다. 이로 인해 남북 간 경제 격차가 심화됐고많은 남부 사람들이 남미나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가서 삶을 개선하려 한다1880년대부터 특히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대거 해외로 떠났고공업화된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주요 목적지가 됐다라플라타평원은 기후 좋고 땅 비옥한 데다 인구도 적어서 축목업, 종식업 하기에 최적지였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유럽의 공업화로 식량과 고기 수요가 급증하자 주요 공급국이 됐다. 냉동기술 발전까지 겹치면서 농축산물 수출로 부국이 되었고세계 10대 강국 안에 들 정도였다.당시 인구 100만 명도 안 돼 노동력 부족했는데이태리를 비롯한 유럽에선 경제는 성장해도 사회적 모순이 커져서 이민이 늘었다. 아르헨티나가 무제한 이민정책을 펴자 특히 이태리인이 몰려왔고1880~1930년 사이 200만 명 이상이 이민했다.엄마 찾아 삼만리는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가 아르헨티나로 간 엄마를 찾아 홀로 떠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가난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일하러 떠난 엄마를 찾아 제노바에서 대서양을 건너간다.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실제 이태리인들의 대규모 아르헨 이민 현실과 맞물린다. 이런 이태리계 아르헨티나인들은세리아리그를 선호하는 경향이있으며이태리로 넘어올시 귀화가 매우 간소하게이루어진다아르헨티나 출신의 많은 축구 선수들이 이태리계 혈통을 이용해 이태리 시민권을 얻고유럽 축구 리그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얼마전 세상을 떠난 프란치스코 교황과F1과 페라리의 전설 후안 판지오 세리아의 축구스타 바티스투타 디스테파노 등등수많은 유명인들도 아르헨티나태생임을 감안한다면이 두나라가 얼마나 가까운 나라인지도 알수있다이처럼 이태리와 아르헨티나는 역사, 민족, 문화, 종교를 통해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이민과 귀화, 축구, 심지어 교황의 출신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의 인연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다.라틴아메리카의 심장부에서 유럽의 정체성을 지켜온 아르헨티나그리고 그 뿌리를 제공한 이탈리아두 나라는 서로의 거울이자 그림자였다.지리적 거리는 멀지만 역사적,정서적 거리는 그 어느 나라보다 가까운 셈이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장명부가 누군지 알아보자
겆북공정의 최대어이자 키움덱 우에 1황 장명부한국야구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가 거둔 단일시즌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KBO 역사의 커다란 한 획을 알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엄청난 기록 외에 그의 출신과 인생, 그리고 은퇴 후의 초라한 삶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한다.오늘은 장명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장명부.일본이름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그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로1950년 일본 군마현에서 태어난 일본 국적*의 선수이다.*태어날 당시에는 무국적자였으나 1974년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며 일본으로 귀화한다.--일본 시절19살이 되던 해, 한국계 일본인(재일교포)인 그는 일본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었고 아마추어 자유계약(지명 외 선수)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한다. 여담이지만 타 구단에서도 동시에 영입 제의를 했으나 장명부가 조센징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제의를 철회했다고 한다.요미우리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그는 73년 난카이(현 소프트뱅크)로 트레이드되며 팀의 믿음직한 선발투수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다.난카이 호크스)73년 140.2이닝 ERA 2.87 / 6완투 1완봉 / 7승 0패74년 139.1이닝 ERA 3.04 / 5완투 2완봉 / 9승 7패75년 188.2이닝 ERA 3.00 / 11완투 4완봉 / 11승 12패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수없이 완투를 하던 그는 77년, 트레이드를 통해 히로시마로 이적했고 79년 히로시마의 창단 첫 우승과 80년 일본시리즈 2연패를 견인하는 주축 선수로 떠오른다.히로시마 도요 카프)78년 230이닝 ERA 3.60 / 12완투 2완봉 / 15승 8패80년 187이닝 15승81년 201.1이닝 12승그러나, 82년에 111.1이닝 ERA 4.46 / 5완투 1완봉 / 3승 11패로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구단 재정이 열악했던 시민구단 히로시마는 (여기도 겆ㅋㅋ) 이때다 싶어 에이스의 체면이고 뭐고 대폭 삭감된 연봉을 제시한다.이에 개빡돈 장명부는 마침 삼미에서 연봉 동결로 한국행을 제안하자 히로시마에 ’좆이나 까잡솨라 은퇴함 ㅂㅂ‘라며 은퇴 선언이라는 빅엿을 날리고 한국행을 결정한다. 이때가 바로 그 어마어마했던 83년도의 오프시즌이다.-----1983년 당시 KBO는 82년(원년) 이후 전력보강과 프로야구 활성화를 위해 제일동포 영입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 흐름에 힘입어 삼미는 계약금+연봉 8000만원에 장명부를 영입한다(고 발표했다.)그러나 이 계약은 사실 계약금 1500만엔 + 연봉 2500만엔 (총 1억 3천만원), 한남하이츠 49평 아파트, 도요타 크라운 세단 및 이 모든 유지관리비와 부대 비용, 세금 대납까지 총 2억원을 더 얹어준 초대형 계약이었다.참고로 당시 대기업 대졸자 초봉은 20-30만원이었고, OB박철순이 연봉 2400만원을 받고 있었으며 강남 60평대 아파트가 5천만원이었다. 현재 강남 60평대 아파트 실거래가는 80억 가량이니 지금의 약 300억이라고 계산하면 되겠다.여담으로 당연하지만 이 당시 장명부가 받은 대우는 일본에서도 영구결번급을 깔아뭉개는 수준의 초호화급이었다.어쨌든 일본에서 주축 선발이었던 장명부가 삼미의 유니폼을 입은 그 해, 그는 말그대로 전설을 만들어냈다.1983년 장명부의 성적은 60경기(44선발, 16구원) 427.1이닝 30승(28선발승, 2구원승)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 220삼진(1위), ERA 2.36(2위) 였다. 아니 시발ㅋㅋ그러나 MVP는 홈런왕, 타점왕의 이만수에게 돌아갔는데(???)그 사연은 그의 매너에 기인한다고 분석된다.그는 시범경기부터 삼성라이온즈에 찾아가 ‘삼미같은 븅신팀에 가다니 하..시발 존나 야구하기 싫다‘ 라면서 배팅볼도 던져주며 삼성으로 런각을 드러냈지만, 이건 사실 기만이었다.ㅋㅋ이러면서 우승권 전력의 삼성 타자들을 분석했고 작년 타격왕 장효조의 담당일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또, 그는 한국 선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는데 한국 최초로 빈볼로 상대를 견제했고, 벤치클리어링을 한국에 도입한 선구자였으며 빈볼 이후 타자를 향해 썩소를 날리거나 은닉구, 주루방해 등 심리전에 존나 능했다.아무튼 그가 이렇게 날라다녔던 원동력은 삼미 사장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며 30승을 하면 보너스 2천만원(대충 지금의 4-50억) + 연봉 2배 인상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는데 시즌이 끝나자 삼미 사장은 쌩을 까버린다. 아니 설마 30승을 하겠냐고ㅋㅋ 엥 시발?---1983년 이후제아무리 일본의 주축선수였다 한들, 원래부터 허리부상을 안고 있었다가 427이닝을 던지니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84년 13승 20패 WAR 5.79(3위)로 부진(?) 했고85년 11승 25패 5세이브 투수WAR 4위로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을 세우며 내리막을 걷는다.삼미는 매년 연봉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던 장명부를 86년에 빙그레에 팔아넘긴다. 여담으로 장명부의 반대급부로 선수 하나를 데려오는데, 그가 바로 김기태이다.아무튼 빙그레는 장명부에게 2년간 연봉 총액 1억 5천을 일시급으로 지급 및 도요타 크라운과 개포동 우성아파트 53평까지 지금했는데, 이미 몸이 너덜너덜해진 장명부는 86년 1승 18패 ERA 4.98로 좆창난 성적을 낸다.참고로 86년은 역대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꼴찌 청보(전 삼미)를 제외하면 리그 ERA가 2점대에 달했다. (조합시그 김정수86 꿀꺽ㅋㅋ)빙그레는 그에게 연봉을 일시불로 지불한 덕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1승을 가져가게 되었고... 결국 장명부를 방출시킨다.장명부는 이렇게 한국에서의 5년간 5억이 넘는 거액(현재 1500억 가량)을 벌었지만 쓸쓸한 말로를 보내게 된다.--은퇴 후일본으로 돌아가려다 730만원의 세금을 체납한 것이 드러나 한국에 발이 묶였고, 술여자도박마약으로 그동안 번 돈을 탕진하며 이혼까지 당한다.이후 88년에 삼성2군, 90년에 롯데에서 투수코치를 맡게 되는데롯데 투수코치 시절에 팬을 폭행했고, 1991년에는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사범으로 구속되어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1991년 12월, 그는 추방 형태로 일본에 돌아가 건설업과 건물 야간경비, 택시기사 등 여러 가지 직업들을 전전했다고 하며 2005년 마약중독으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시리즈] 누군지 알아보자 · 장명부가 누군지 알아보자 · 오봉옥이 누군지 알아보자
작성자 : 후꾸루꾸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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