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확장 억제와 관련된 핵전력에 대해 도무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려 하지 않아 높은 벽을 실감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미 확장 억제 전략협의체(EDSCG)에 참여했던 한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당시 미국 측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EDSCG는 북한의 증대되는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대북 핵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2016년 신설된 한미 외교·국방 고위급 협의체다. 확장 억제는 핵우산뿐 아니라 재래식 정밀 타격 무기, 미사일 방어(MD) 등 3대 요소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견제하는 것이다.
미국 저위력(低威力) 핵무기
미국은 한미 연례안보협의회 등에서 계속 핵우산을 강조해왔지만 유사시 언제 어떤 핵무기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해왔다. 이런 문제를 개선해보자는 취지에서 EDSCG를 발족시켰지만 미국은 종전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회의는 2018년 1월 두 번째 회의를 마지막으로 4년 넘게 열리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미 확장 억제 강화를 북핵 억제 대책의 대표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다. EDSCG 재가동은 물론 유사시 미국의 핵우산 사용 계획에 대한 세부 정보 공유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오는 21일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성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질적인 북핵 억제력 강화 차원에서 고무적인 변화다.
증대되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는 이뿐 아니다. 위력을 약화시켜 ‘쓸 수 있는’ 핵무기로 변신한 저위력 전술 핵무기들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핵무기는 위력이 너무 커 사실상 쓸 수 없는 무기로 간주돼왔다.
지난해 10월 미 국방부는 F-35A 스텔스기에서 B61-12 전술핵폭탄을 투하하는 최종 시험 영상을 공개했다. B61-12는 미 전술핵무기의 대표 주자인 B61 전술핵폭탄의 최신형 모델이다. 정확도를 높이는 대신 위력을 줄이고 방사능 낙진 등 부수적 피해도 최소화해 ‘쓸 수 있는’ 핵무기로 개발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 번째 저위력 핵무기로는 트라이던트 II SLBM에 장착되는 W76-2 신형 저위력 핵탄두를 들 수 있다. 위력은 8킬로톤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잠수함에 탑재되기 때문에 동해는 물론 서태평양에서도 은밀히 물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타격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W76-2는 이미 2019년 25개 탄두가 생산돼 실전 배치가 완료됐다.
세 번째 저위력 핵무기로는 핵탄두 장착 토마호크 순항(크루즈) 미사일이 꼽힌다. 주요 분쟁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돼온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에 5킬로톤급 핵탄두를 장착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새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 따라 계획이 취소됐지만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이 같은 저위력 핵무기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한으로 하여금 ‘유사시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쓸 수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평가다.
그러면 한미 확장 억제 강화와 저위력 핵무기들로 고도화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북한의 공세적인 선제 핵공격 전략 채택과 남한을 겨냥한 신형 전술핵무기 개발 등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핵·미사일 위협의 등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정은은 지난달 25일 북한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을 통해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북한이 2019년 이후 집중적으로 시험발사를 해온 KN-23 개량형 미사일, 북한판 에이태킴스 미사일, 600㎜ 초대형 방사포, 미니(소형)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등은 남한을 겨냥한 전술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을 것으로 정보 당국은 보고 있다. 북한은 이보다 작은 신형 전술미사일(사거리 110㎞)도 최근 시험발사에 성공했는데 여기에 장착할 소형 전술핵탄두 개발 등을 위한 7차 핵실험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들 전술핵무기는 수십 킬로톤 이하의 위력으로 유사시 북한은 실제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실제 사용될 경우 전세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전술핵 개발에 유리한 것으로 알려진 플루토늄 대량 추출을 위해 최근 영변에서 50메가와트급 원자로 건설도 재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선 한미 확장 억제 강화를 넘어서는 고강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공군의 F-35 스텔스기나 F-15K 전투기들도 미국의 B61-12 신형 전술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는 한국형 핵공유 체제도 추진해 볼만한 방안이다. 한미동맹을 활용한 방법 외에 획기적인 독자 북핵 대응 수단을 개발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미국이 국력을 집중해 사상 첫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맨해튼 계획’처럼 핵무장 잠재력 확보와 비핵 ‘독침무기’ 개발을 위한 ‘한국판 맨해튼 계획’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한국판 맨해튼 계획’은 군뿐 아니라 민간 분야의 4차 산업혁명, IT(정보 기술) 등을 망라하는 국가 총력전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북한 핵탄두 미사일을 발사 전에 무력화하는 ‘발사의 왼편’ 등 사이버전자전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북한은 지난해 1월 당 8차 대회에서 다탄두 고체연료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 미사일, 핵추진 잠수함 및 SLBM, 정찰위성 등을 5년 내에 최우선 과제로 개발하겠다고 천명했다. 최근의 코로나 사태로 7차 핵실험이 다소 지연될지 모르겠지만 북한은 윤석열 정부 임기 중에 이들 전략무기들을 실제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북한 신무기가 튀어나올 때마다 대증 요법으로 대응해온 종전 방식으로는 고도화한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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