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장 선거공약 앞다퉈 건립
최근 취재차 찾은 옥전고분군 옆의 합천박물관에서는 이달초부터 작지만 뜻깊은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9월 말까지 열리는 \'황강이 전하는 삶, 흔적\' 특별전. 2004년 12월 9일 개관 뒤 여는 첫 특별기획전으로, 합천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됐던 대병면, 봉산면의 유적과 유물이 망라됐다. 1987년 9개 대학박물관이 연합발굴단을 꾸려 5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한 지 20년 만에 관련 유물을 공개하는 자리다.
가야토기 중에서 희귀한 명문 토기인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명 항아리, 사람 얼굴 모양이 새겨진 귀신문양 말방울 등 귀한 유물들을 빌려왔고, 지역 주민으로부터 기증받은 오리모양토기도 독립진열장 속에서 전시하고 있다. 수몰지역의 옛 사진도 구해 전시했다. 전시장을 찾은 합천군민들은 "여기가 옛날 국민학교 자리 아이가"라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도항·말산리고분군 옆에 자리잡은 함안박물관은 공사 중이었다. 제4전시실에서 제5전시실로 가는 통로 40m를 전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공사다. 개관 4년 만에 기증·기탁 유물들이 많아졌지만 마땅히 전시할 공간이 없어 짜낸 아이디어다. 박물관이 존재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근재집 책판을 순흥안씨 종친회로부터 기탁받을 수 있었다. 6월 15일이면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을 거란다.
경남에도 웬만한 고분군 옆에는 지자체마다 어김없이 박물관을 지어놓았거나 짓고 있다. 88년 거창박물관이 개관한 뒤 의령 창녕 진해 마산 밀양 거제 김해 함안 합천 등이 뒤를 이어 공립박물관을 지었다. 양산시는 2010년 개관 예정으로 북정동고분군 옆에 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이달 학예사를 공모했다. 산청군은 생초고분군 인근에 산청선사유적박물관을 짓고 있는데, 6월 건축공사를 마무리하고 올해 말엔 개관할 예정이다. 진주시도 내년초 대평선사 유적박물관을 개관한다. 모두 10여 곳이 넘는다.
지역사를 정립하고, 지역민들에게 역사적 정체성을 제공하는 박물관은 지역 문화의 구심점이다.
문제는 자치단체장의 선거공약으로 박물관만 덜렁 지어 놓고는 끝이라는 거다. 10년 넘게 상설전시만으로 그저 문만 열어놓고 있는 수준이다. 대부분 학예사는 1명에 불과하고, 박물관에 대한 지자체의 인식 또한 초보 수준이다.
먼저 예산 문제. 합천박물관은 2005년 12월 제1회 다라국사 학술회의를 한 번 연 것을 빼고는 그 뒤로는 잠잠하다. 조원영 학예사가 계획서 한 장을 꺼내보였다.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명·청 외교정책을 이끌던 대유학자 내암 정인홍 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 "합천에 다라국이란 가야사만 있는 게 아니라 남명 조식이나 내암 정인홍 같은 유학자들이 계셨다는 걸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째 계획만 잡고 있습니다. 예산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고, 내년에도 한다는 보장도 없고…."
▲ 합천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황강이 전하는 삶,흔적\' 특별전. 개관 3년 만에 처음 여는 뜻깊은 전시회다. |
아직도 공업용 새시로 만든 진열장이 있는 거창박물관도 개관 20년 만에 전시공간을 완전히 리모델링할 계획이지만 17억 원의 예산 마련이 쉽지 않다.
인력 문제도 심각하다. 학예사가 둘씩 있는 함안과 합천박물관은 특별전시, 학술회의, 박물관 대학 등 기초적인 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박물관들은 학예사가 1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박물관 일을 전담하는 게 아니라 군청의 문화재 업무나 소소한 행정 업무도 함께 처리하는 통에 제대로 된 기획전이나 도록 제작 같은 건 엄두도 못 낸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물은 비전문가가 옮기기 어려워 아예 유물 대여는 꿈도 못 꿉니다." 혼자서 박물관 일을 해 가고 있는 어느 학예사의 말이다.
지자체의 박물관에 대한 인식은 초보 수준이다. 함안박물관 백승옥 학예사의 말이다. 처음엔 박물관 건물만 덜렁 지어놓고 전시물품은 한점도 없었다. 군 관계자가 유물 대여를 위해 지역 국립박물관에 갔을 때 "학예사가 없으면 유물 못 빌려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청 관계자들은 박물관에 학예사가 필요한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부랴부랴 학예사를 채용했다. 이 박물관에는 기본에 속하는, 지하수장고에서 전시실로 연결되는 유물운반용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또 다른 학예사의 말도 지자체의 박물관에 대한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산 담당자에게 도록을 만들겠다고 했더니 도록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걸요."
해결책은 없을까? 부산박물관 홍보식 학예연구관은 이런 안을 내놓았다. "자치단체에서 관장하던 각 지방의 박물관을 경남도에서 관장토록 하면 어떨까요? 국립중앙박물관이 각 지방 국립박물관을 관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그 안에서 경쟁도 될 것이고…."
박물관, 짓는 것보다 운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상식을 지자체는 모르는 걸까?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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