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대만 전 총통과 사상 첫 회담을 갖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평범한 서생처럼 보이는 한 관리가 옆에서 중국 최고지도자를 편안하게 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진핑에게 딱딱한 격식을 갖춘 반면, 왕후닝(王滬寧)이라는 이 관리는 자신감 있게 말했고 회담 내내 그의
옆에 앉아있었다고 대표단 일원으로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을 동행해 회담에 참석했던 츄쿤쉬안(邱坤玄)은 말했다.
이 장면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 즉 수십 년 동안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시진핑과 공산당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 이론가인 왕후닝의 관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의 국립정치대 명예교수인 츄쿤쉬안은 왕후닝 상무위원에 대해 "그는 최고 지도자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왕후닝의 영향력은 이데올로기에 있는데, 시진핑의 중국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묶어냅니다."
중국 정치의 불투명한 특성을 고려할 때, 세계는 2012년 집권 이후 중앙집권화하고 충성파들로 자신을 둘러싼 시진핑
주석에게만 주목하기 때문에 그가 누구의 의견을 경청하는지 알기 어렵다. 시진핑의 측근들 사이에서 왕후닝은 지방이나 도시를 통치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자리(상무위원, 권력서열 5위)에 올랐고, 30년 동안 세 명의 중국 지도자를 보좌하는 등 적응력과
생존력을 갖춘 드문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980년대 후반의 미국 방문을 포함해 왕후닝을 알았거나 만난 적이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논문과 저서 수십 권을 읽었다. 인터뷰와 저술은 그가 어떻게 중국 지도자들을 위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며, 중국 통치 방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명한다.
왕후닝은 급격한 경제 변화와 서구 열강과의 경쟁 심화 속에서 오직 당의 확고한 지배만이 중국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중국의 '굴기'(屈起)를 이끈 공산당 교리를 다듬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시진핑이 바다 건너 대만과의 험난한 정치관계를 왕후닝에게 맡기고 있다. 대만
관리들은 왕후닝이 대만에 대한 갈라치기와 비밀 영향력 공작을 통해 대만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지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69세의 왕후닝은 외부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학 교수에서 당 이론가로 변신한 그는 1995년 공산당
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대부분의 과거 동료들과 연락을 끊고 외국 방문객과도 거리를 두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도 중단했다.
2012년부터 그는 시진핑의 중국에 대한 비전을 다듬어 기술적으로 진보하고 노골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미국 주도의 봉쇄에 점점 더 강하게 맞서는 초강대국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해왔다.
현재 미국외교협회(CFR)와 조지타운대에 재직 중인 전 바이든 대통령 국가안보회의(NSC) 중국 담당 부국장 러시 도시(Rush Doshi)는 왕후닝이 "지난 30년 동안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적 서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만에 대한 전략
이제 왕후닝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정치적 감각, 시진핑 주석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대만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대만 사회에 더
깊숙이 침투해 대만과 중국 본토의 문화적 연계를 포함해 대만인들의 중국 거부감을 되돌리기 위한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와 작년부터 두 차례 왕후닝과 만난 적이 있는 대만 단쟝(淡江)대학교의 차오춘산(趙春山) 명예교수는 "그는 부드러운 손길과 강한 주먹을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왕후닝은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선호하는 대만의 야당인 국민당 의원 수십 명에게 꾸준히 메시지를 던지며 차기 대만
정부(그들이 원하는 대만 정부다)처럼 대했다. 그는 국민당 의원들에게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대만에 뿌리를 둔 분들은
누구십니까?' '1949년 중국 본토를 탈출한 가족 출신은 누구신가요?' 그는 그들에게 우려사항을 얘기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몇몇 대표들은 말했다.
야당에 대한 그의 접근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주권 주장을 거부하는 라이칭더 대만 총통과 그의 집권 민진당을 고립시키려는 중국의 전략에 부합한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두 명의 대만정부 안보 관계자에 따르면, 왕후닝은 미국의 힘에 회의적이고 라이칭더
총통에 대한 비방과 중국을 찬양하는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온라인 캠페인을 통해 대만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중국의 노력을 배후에서
지휘해왔다.
동시에 중국은 최근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만에 대한 군사적 접근을 강화했다. 또한 최근 발표한 독립
지지자에 대해 심한 경우 사형까지 규정한 새 법률과 같이 대만인들을 위협하기 위해 법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워싱턴 소재 글로벌타이완 연구소의 부소장인 존 돗슨(John Dotson)은 이러한 노력이 조잡해 보이고 많은 대만인들을 오히려 멀어지게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치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을 약간만 움직여도 결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왕후닝은 중국의 통일 계획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대만이 홍콩의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대만에서는 이 방식이 널리 거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왕후닝과 같은 중국 관리들은 이제 대만에
대한 '총체방략'(總體方略, 포괄적 계획)을 말하는데, 이는 큰 틀 안에서 세부내용은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백악관 NSC 출신인 러시 도시는 왕후닝을 언급하며 "그의 과거 역할을 미루어 보건대, 그는 통일을 위한 이념적 틀뿐만 아니라 장기전략 수립까지 포함하는 대만 접근법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에서 '신권위주의'로
시진핑 주석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간부의 아들로 태어난 왕후닝은 학생들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사상을 주입받던 폭력과
열광의 문화대혁명 기간(1966~76년) 동안 대학 진학을 선택한 몇 안 되는 중국 청년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1978년 왕후닝이 상하이 푸단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던 바로 그 때 많은 중국인은 서구에서 영감을 찾기 시작했고,
왕후닝도 서구의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치하에서 억압되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강의실에 스며들었고, 정치학을
전공한 왕후닝은 서구 정치 전통을 열렬히 받아들인 학생이 되었다.
푸단대에서 왕후닝과 기숙사를 같이 쓴 천쿠이더(陳奎德)는 인터뷰에서 "그는 상당히 개방적이고 활기찼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시도 썼습니다."
왕후닝은 민주주의의 '정치문화' 즉 지도자가 계속 교체되는 중에도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공유된
믿음에 매료되었다. 그는 새뮤얼 헌팅턴과 시드니 버바 같은 미국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공공가치의 강력한 그물망은 견고한 정치
질서의 핵심 기둥이라고 주장했다.
왕후닝은 푸단대에 강사로 계속 남았고, 1984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1980년대 중국에서 널리 퍼진 공산당이 민주주의를 흡수할 수 있다는 희망에 공감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정치발전의 목표가 되었다." 1986년 어느 상하이 지역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왕후닝은 이렇게
말했다. "고도로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 없이는 세계적인 선진국이 되어 현대화된 강력한 국가로 우뚝 설 수 없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면서 중국은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6년에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왕후닝은 장기적 목표로서 민주주의를 계속 찬양하면서도 급격한 정치적 자유화를 경계했다.
갑작스러운 정치적 개방은 격변을 가져와 중국의 경제적 도약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지도자들은 권위주의 통치자
아래에서 빠르게 성장한 한국, 대만 및 기타 아시아 '작은 용'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왕후닝과 함께 일했던 전 룸메이트 천쿠이더는 "그는 더욱 현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가나 정치
활동가의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왕후닝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줄여나가는 데 있어서(이 과정에서 식량과 기타 필수품의
가격 급등이 나타날 수 있다) 중국은 민주적 방식이 아닌 '중앙집권적' 현대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안정을 막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의뢰한 상하이 관리 웨이청스(魏承思)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베이징의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고, 이는 중국에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신권위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강력한 중앙 정부와 중앙 지도자에 대한 그의 지지는 분명했다"고 왕후닝의 푸단대 제자이며 동료 학자인 샤밍(夏明)은 말했다.
미국에서 배운 것
1988년, 왕후닝은 6개월간의 미국 방문을 통해 중국이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 초강대국을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왕후닝을 알게 된 대만 출신 언론인 쉬창마오(徐宗懋)는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의 발전상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귀국 후 그는 더 매력적이고 세련된 옷을 입었고, 미국식 패션 감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오와 대학과 다른 대학의 방문 학자 자격으로 미국을 여행하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는 결함이 있으며 중국에 쉽게 이식할 수 없다는 그의 견해가 깊어진 것 같다.
왕후닝은 1991년 자신의 미국 방문을 다룬 책 '미국 대 미국'(美國反對美國, America Against
America)에서 미국은 일본이 가진 사회적 규율과 결속력이 부족하다고 썼다. 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노숙자 수용소를
더럽다고 묘사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는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지켜본 후 미국 유권자의 정부에 대한 발언권이 궁극적으로는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미국 체류는 국가가 권위와 전통에 대한 존중 등 올바른 태도를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가
내부로부터 국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닝은 앨런 블룸의 말을 받아들이며 인용했는데,
정치사상가 앨런 블룸이 미국의 진보적 문화 경향을 비판한 책 '미국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1989년 중국으로 돌아온 왕후닝은 민주화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그해 봄,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시위대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중국군은 6월 4일 탱크와 병력을 동원해 이 운동을 진압했고, 수도와 전국에서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최소
수백 명이 사망했다.
천안문 사태 직후, 왕후닝은 공산당이 여전히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경제성장, 특히
부정부패와 서구의 투자 및 문화적 영향력 유입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 통제 시스템 전체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후닝은 베이징의 지도자들에게 국가 재정과 국유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경제적
돈줄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독자적 재정수입이 많은 지방 관리들은 때때로 베이징의 명령에 저항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중국이 외부 세계에 개방되고 당이 인민의 삶을 직접 지휘하는 데서 물러나면서 지도자들은 충성심을 유지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2년에 쓴 글에서 새로운 도전은 "중국의 사회 통제 시스템이 더욱 확고하고 유연하며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감시하고 형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중국공산당사 연구자인 티모시 치크(Timothy Cheek) 교수는 "그는 매우 근본적인 사회 및 경제적 변화를 통해 어떻게 정치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글을 썼다"고 말했다.
1995년 왕후닝은 1989년 중국의 지도자가 된 장쩌민 전 상하이 당 서기에 의해 학계에서 발탁되었다. 그는 당 중앙위
정책연구실에 합류하여 민간 기업가들을 당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인 장 주석의 '3개 대표'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장쩌민 주석이 물러난 후에도 왕후닝은 차기 중국 지도자인 후진타오의 최고위 자문역으로 남아있었다. 2012년 시진핑 주석이 집권했을 때도 시진핑은 왕후닝을 곁에 남겨뒀다.
시진핑 사상의 배후
왕후닝이 시진핑 주석의 측근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시진핑이 팬데믹, 경제 문제, 서방 정부와의 적대감 고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왕후닝이 여전히 영향력 있는 조언자로 보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왕후닝이 중국의 강대국 부활에 초점을 맞춘 시진핑 사상을 공식 신조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진핑은 당 통치에 대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사상적 순응을 요구하고, 서구 문화의 영향을 제한하며, 검열을 확대하고,
가벼운 반대 의견도 침묵시키려 했다.
왕후닝은 국가 주도 성장에 관한 시진핑의 아이디어를 추진하는 정책개혁위원회의 판공실주임이 되어 주요 정책 문서를 계속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다국적 기업 경영진 앞에서 중국의 인터넷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포함한 시진핑 주석의 해외 순방에 동행했다.
왕후닝을 연구해온 컨설팅업체 가나우트글로벌의 연구책임자 매튜 존슨(Matthew D Johnson)은 왕후닝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질적인 정책 형성 역할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 개 영역만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시진핑 주석은 왕후닝을 당의 최고위층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시키며 보답했다. 그리고 시진핑은 다른 위원들이 대거 물러난 2022년에도 그를 상무위원직에 연임시켰다.
2022년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과 함께 서 있는 왕후닝의 모습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보였다. 은퇴한 지도자 후진타오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안내원의 부축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긴밀하게 짜여진 회의 진행은 잠시 중단됐다.
이때 리잔수(栗戰書) 상무위원이 후진타오 전 주석을 도우려 하자, 왕후닝은 리잔수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속삭이며 앉으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공식적으로는 리잔수(국가서열 3위)가 서열이 높았지만 왕후닝은 그런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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