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출연진 (좌측부터) 정우성, 김성균, 이성민, 김성수 감독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개봉 6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하나회 주도 아래 벌어졌던 군사 반란의 9시간에 집중시킨 영화다. 영화는 사실을 바탕에 두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허구적인 요소를 가미해 관람 뒤 실제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서울 한복판에서 반란 세력들과 군이 대치를 하거나 반란 세력과의 총격전에서 사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사실일까'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실제 역사와 영화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영화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전두광이 이끄는 군사반란에 끝까지 맞섰던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 공수혁 특전사령관, 김준엽 육군본부 헌병감이 부각된다. 실제 역사에서 전두환의 세력과 맞섰던 장성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 서울의 봄 황정민(전두광 역) 한장면 /사진=서울의 봄 스틸컷
특히 전두광과 맞선 이태신의 갈등이 축으로 영화는 진행됐는데 신군부 세력들에게 이태신이 "니들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 다 뭉개버릴 테니"라고 호통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2006년 시사저널이 공개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육필수기를 보면 자신을 회유하려는 반란 세력의 전화통화에서 "전차를 몰고 가 네놈들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라며 욕설과 함께 일갈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이태신은 장태완 사령관의 태도와 언행이 대부분 반영된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경복궁 앞에서 반란군과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대치하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태신 사령관은 비전투병을 포함한 100명의 병력과 전차 4대를 끌고 반란세력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 한다. 산하 포병부대에는 반란군 근거지를 포격할 준비 하라며 명령을 한다. 도심 한복판 민간인 피해가 예상돼 영화 속 긴장감은 최고조로 오른다. 하지만 역사에선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특별 출연한 정해인(오진호 소령 역) /사진=서울의 봄 스틸컷
12월 13일 새벽 장태완 사령관은 출동 준비를 하긴 했다. 하지만 참모들의 만류가 강하고 반란세력이 육군본부를 장악해 상황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해 출동하진 못했다. 이후 그는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 못한 죄인"이라며 자신을 표현했다고 한다.
반란군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관실로 들이닥쳤을 때 끝까지 맞섰던 오진호 소령도 영화에서 눈길을 끌었다. 배우 정해인이 오진호 소령을 연기했다."사령관님 혼자 계시면 적적하시지 않겠습니까"라며 공수혁 특전사령관 곁을 떠나지 않고 끝내 쓰러진 정해인은 앞서 드라마 D.P 속 안준호 일병을 떠올리게 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영화 서울의봄 특별 출연한 정해인(오진호 소령 역) /사진=서울의 봄 스틸컷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 소령의 실제 모델은 김오랑 소령이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 반란군에 가담한 3 공수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 특수전사령부의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사령부에 전투 병력이 많지 않아 정병주 사령관은 고립됐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김오랑 소련은 반란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결국 숨졌다. 정병주 사령관은 왼팔에 총탄을 맞았다. 이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행방불명됐다가 1989년 3월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고 경찰은 자살로 결론 냈다. 하지만 당시 여러 언론은 '의문의 죽음'이라고 보도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적 역사는 아직 진행형이다. 영화가 개봉한 다음 날 서울 광화문에서는 퇴역군인 단체와 시민단체는 전두환의 2주기 시민 추모행사를 열어 전두환을 추모했다. 전두환의 미납추징금은 아직 920여 억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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