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님도 바둑을 상당히 좋아하십니다.
 지금은 내기 3급 정도의 짱짱한 실력이신데, 아마 당시에는 화초 3급쯤 되었을거라 생각됩니다. 머, 사실 이건 글 내용에서 중요한 건 아니구요 ^^
 아래 얘기는 10여년전, 어느 동네기원에서 있었던 \'실화\'로 글 내용은 제가 아니라 \'아버님\' 시점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가게 이름등은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난번 양선생에게 잃은 돈 5만원을 기필코 만회하기 위해 오늘은 좋아하는 약주도 마다하고 일찌감치 럭키바둑살롱에 들러서,
 원장나으리와 커피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처음보는 낯선 얼굴의 젊은 사내가 기원 상주 내기꾼과 방내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어찌 분위기가 살벌한게 심상치가 않았다.
 수많은 상주 백수들이 둘러싸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낯선 사내가 참 외로워 보였다.
 당시 그 기원에서 즐겨하던 방식이 2의1(판돈 2만원, 1방당 만원)인데, 원장에게 나직하게 물어보니 50집 이상은 무조건 만방(10방)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게다가 판돈도 2의 1이 아닌 3의 3 !!
 잠시 후 양선생이 왔고, 우리는 늘 해왔던 대로 바둑판 밑에 만원씩 깔고 판내기를 시작했다. (판내기라지만 만방시에는 2배임 ㅋㅋ)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지 첫판을 쉽게 마무리하고 2번째 판, 양선생 대마 사활이 걸려서 한없는 장고에 들어간다. 그러게 지난번 내 돈을 왜 따먹니ㅎㅎ
 옆에서는 방내기 바둑답게 짤그락 소리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는데, 어느 상주 백수가 내기꾼에게 훈수 비슷한 멘트를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젊은 사내가 그 멘트를 한 백수를 가만히 째려본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 몇 초의 찰나.
 믿기 힘든 처참한 광경이 다음순간 벌어졌다. 방내기 훈수라는 반칙을 범한 자가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빈 바둑통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가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방내기 판은 벌써 나가리 되고 무차별 폭력이 뒤를 이었다.
 옆의 수많은 구경꾼과 내기꾼이 어떻게 말려볼 수도 없게 무섭게 젊은 사내는 얻어맞고 있었다.

 이미 피범벅이 되어 고꾸라진 사내를, 옆의 기원용 바둑판으로 한번더 가격하는 피니쉬 블로우를 날리는 백수....잔인했다.
 굳이 의사인 내가 아닌, 아무나가 보더라도 사내는 거의 반병신이 된것에 틀림없다.
 도대체가 이해되는 게 없었다. 내기꾼이 바둑을 져서 또 팼다면 모를까...단지 훈수하는 것을 째려봤다고... 구경꾼이 그리 처참하게 팰 수 있단 말인가
 내 생애 수술방 외에서 이렇게 많은 유혈이 낭자하는 걸 보는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앞의 양선생은 정신과 의사니 뭔가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될까...결국 우리 둘은 조용히 판을 얼른 마무리 짓고 기원 밖을 나와서 용단을 내려 경찰에 신고했다.

 기원 근처에서 담배를 피면서 경찰이 도착해서 뛰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에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던 우리는
 근처 맥주집에 들러 날이 새도록 그렇게 술을 들이켰다. 바둑이 뭐길래 방내기가 뭐길래....
 이후 한동안 기원엔 나가질 않았고 지인들과는 민폐가 되더라도 서로의 집에 번갈아 찾아가서 직접 바둑을 두었다.
 한달이나 지났을까 그 기원이 있던 자리는 한창 인기가 뜨고 있던 피씨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방내기는 아무나 해서는 안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