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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제 4편. 묘한꼬마... 창호

판타마린 2005.08.02 09:06:50
조회 1081 추천 0 댓글 1



                                                                              이창호 9단...스케치




                                                                            이창호 9단의 탄생?^^




                                                                         수영장에서의 어린 창호










어렸을 때 창호는 1년 가량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바둑을 시작하고부터는 이내 그만두게 되었다. 하나도 섭섭지 않았다.
바둑의 세계에 함몰된 어린아이 창호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갔다.

선생하고만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하고나 바둑을 두는 묘한 꼬마.
한번 바둑판앞에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는 괴상한 소년.

어린 창호와 한번이라도 바둑을 두어본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뚱뚱한 애가 바둑판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길래 가끔 좀 움직이기도 하라고 했죠. 몇번 그랬더니 일어나서 복도 창문 앞으로 가더라구요. 하지만 금방 돌아와 다시 움직이지 않더라구요."


창호는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할아버지와 맞둘 수 있게 된다.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던 기력 증진에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바둑을 배웠다고 했지만 사실 창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 이미 바둑을 배운 적이 있다.
전주에서 활동 중인 아마 4단 배일수 사범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온 유치원생 창호에게 4개월간 바둑은 기본 행마를 가르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고 빠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들어와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어쨌든 손자의 바둑 배우는 속도가 남다른 재미에 빠진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살집이 통통한 고사리손을 꼭 잡고 전주에서 바둑 좀 한다하는 명사들을 찾아다녔다.
이무렵 창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재능을 믿고 조훈현이나 서봉수같은 일류기사로 키우기로 마음을 다잡은 것 같다.

하지만 창호의 부모님들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창호가 바둑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또 바둑을 잘 모르는 자기들의 눈에도 남에 비해 기재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전문기사라는 직업은 아직 그들에게는 생소했던 것이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아버지 이재룡씨는 막연히 머리좋은 창호가 의사나 공학도가 되어 넉넉한 생활을 꾸리기를 바랬다.
할아버지의 열화와 같은 지원때문인지 이재룡씨는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내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창호가 불과 얼마안가 특출난 빛을 보이자 생각이 바뀌게 되고 나중에는 창호가 시합이 있을 때마다 사회생활에 그리 익숙치 않은 창호를 위해 수발을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창호의 그림자라 불릴까.
그런 아버지의 역할을 지금은 보기만 해도 든든한 이창호 9단의 동생 이영호씨가 대신하고 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매니지먼트를 수행하는 동생의 수고때문일까 이창호 9단은 항상 동생에게 고마워한다. 물론 모든 바둑팬들도 마찬가지다.
이영호씨는 중국 북경에 있기때문에 주로 국제대회(웬만한 세계대회는 거의 중국에서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의 중국의 바둑열기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국제대회를 후원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중국에서 자사를 홍보하고 싶기에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중국의 그런 바둑에 대한 열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에서 이창호 9단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형이 대국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뛴다.



뭐 아버지 이재룡씨가 창호가 바둑기사가 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바둑계는 그야말로 프로기사들의 무덤이라 불릴 정도였다.
조훈현─서봉수의 라이벌 시대, 이른바 曺─徐시대가 무려 1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었으니...

거의 모든 타이틀 대국은 조훈현의 수성과 서봉수의 탈환으로 일관될 정도였고 간혹 다른 프로기사들이 2인자 서봉수 9단의 벽을 넘어 조훈현 9단의 문턱앞에 섰다 해도 그의 섬광같은 일검에 단 일합도 견디지 못하고 푹푹 쓰러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불과 만 아홉살의 나이에 한국에서 프로 입단을 해 아직까지도 불가침의 영역인 세계 최연소 입단기록을 세운 후, 근대바둑의 본산지 일본으로 건너가 20세기의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오청원 9단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 선생으로부터 기도(碁)를 사사받고, 같은 도장에 다니던 후지사와 9단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과 교분을 쌓으며 바둑을 배운 조훈현 9단은 사람들로부터 오청원에 필적하는 진정한 천재성을 가진 인물이다라고 국제적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것은 오청원 9단 본인도 인정한 바이니 다른 사람이 이견을 달 여지가 없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한사코 말리는 스승 세고에와 일본의 棋友들의 바램을 접어둔 채 한국으로 귀국하여, 당시 한국기계의 1인자이자 역시 일본 유학파인 김인 9단에게서 자신의 최초의 타이틀 "최고위"를 탈환한 뒤 그 후로 근 15년간 "조훈현 천하"를 이룩한 戰神 조훈현 9단.

그리고 이에 앞서 일본 유학파인 조 9단과 상반되는 토종 바둑명인으로서 <된장바둑>으로 불리는 서봉수는 조훈현보다 먼저 김인 9단에게서 "명인"타이틀을 가져온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네스의 기억으로는 그 때가 1972년이니까 서봉수 9단이 그제 스물이 갓된 시기였다.
그리고 1974년에 조훈현 9단이 역시 김인 9단으로부터 "최고위"를 빼앗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바둑의 타이틀전은 이 두사람의 혈전으로 무려 15년을 일관했다.

사실 조 9단과 서 9단은 라이벌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지만(기풍이나 외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기에) 실제 전적 자체는 300여국이 넘는 맞대국에서 200 대 100 정도로 조훈현 9단이 많이 앞섰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기계에서 조 9단의 맞수는 찾기 힘들었고 그나마 서 9단만이 변방으로 쫓기고 쫓기면서도 끝내 다시 돌아와 타이틀을 쟁취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 때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이 두사람은 한국 바둑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중에 첫 손에 꼽혔다.


어쨌든 다시 말해서 그 때의 한국바둑은 조훈현과 서봉수가 독주했기 때문에 바둑을 잘 모르는 아버지 이재룡씨로서도 그런 타고난 바둑 천재들이 아니면 대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생활조차도 힘겨운 지경이었기에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걱정이라 할 수 있다. 공연히 바둑을 시켰다가 이도저도 안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이화춘씨는 달랐다. 그는 가족들 중 누구보다도 창호가 품고 있는 빛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만 뺀다면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형제들하고도 잘 놀았고...그러나 다른 애들은 내 나이 또래에 바둑을 몰랐기에 바둑은 나만의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
                                                                                           -李昌鎬 9단




창호는 어떤 종류의 천재들처럼 모든 것을 뚝 끊고 오로지 미친 듯이 바둑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었다.
남들이 딱지치기나 숨바꼭질은 열번 할 때 창호는 네, 다섯번만하고 그 나머지 시간을 바둑의 즐거움에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창호에게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모범생"적인 면이다.

어렸을 때부터...아니 정확히는 바둑을 접하고 난 후부터 그는 이러한 측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행동은 절도가 있으며 약속이 정확하고 자제가 배어있다.(지금도 대국시간이 오전 10시면 상대기사는 항상 먼저 착석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9단은 오전 9시 57분쯤에 대국실에 나타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다. 그냥 바둑을 배운 후부터 창호 스스로 그러기 시작했다.
어떻게보면 선천적인 성질이 바둑을 알고 난 후에야 드디어 드러난 것일지도 몰랐다.

보통 창조적인 감각이나 정신, 감수성이 뛰어난 어린 아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어떠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도 잠깐 거론했었지만...
그런 아이들은 대개 발랄하며 잘 웃고 틀에 매인 것을 답답해하여 정해진 노선에서 자주 벗어난다.
그런데 창호는 그런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신동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그들과는 한사코 다른 길을 걸어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창호는 정해진 코스를 정시에 다니는 열차처럼 모범적이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있었다.
이점이 바로 또 하나의 불가사의다.

창호는 바둑 두는 것이 즐거워 싫증이 날 겨를이 없었다 했다.
그래서 그는 바둑에 관한한 그렇게도 모범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할아버지는 그런 창호를 데리고 기원 순례를 시작했다.
좀더 고수와 창호를 대면시키기 위해서였다.
창호는 곧 전주의 아마추어 최강자였던 이정옥 아마 6단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바둑을 배우게 된다.
이정옥 사범은 실제로 창호를 정식으로 가르친 첫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정옥씨의 기풍은 빠르고 수를 잘내는, 소위 말하는 기지가 넘쳤다.
이정옥씨는 창호를 가르친 열달간 어림잡아 1천번의 바둑을 두었다고, 지긋지긋하기까기 했다고 회고한다.

이정옥은 당시에 표정의 변화가 다분히 없고 말 또한 없지만 바둑에 올곧게 몰입하는 창호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은 점차 의혹으로 바뀌어 갔다.

이정옥씨와 창호의 바둑 한판이 끝나면 창호는 묵묵히 돌을 쓸어담고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얼굴에 열이 많아 얼굴을 씻으러 갔을 것이다.(실제로 지금도 그런다)
그런데 창호를 몰래 따라간 어른들은 화장실에서 창호의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는 다소 놀랐다.
감정표현이 거의 없어 "애늙은이"로 불리던 창호가 화장실 구석에서 조용히 섧은 눈물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은 잦았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이정옥은 처음에는 "역시 그놈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두번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도 자신과의 바둑에서 지기만 하면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무표정의 표정을 띠고 화장실로 간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역시 소리죽여 울었다고 한다.
그저 분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한 이정옥씨도 점차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녀석이 뭘 어쩌자는 걸까..."

창호는 감정표현이 또래에 비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린아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통상 그런 어린애들이 기분나쁘거나 분한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심통을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참는 아이는 상당히 드물다.
그런데 창호라는 이 알 수 없고 신기한 녀석은 보기에는 지든 이기든 간에 표정이 없다.
그점도 의문이라면 의문이지만...
울 정도로 분하면 그자리에서 울면 될 것을 왜 굳이 뒤에서 소리죽여 우는 것일까.

창피해서?
어린아이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격한 감정이 북받치는 경우, 특히 패배라는 어른들로서도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에 맞딱드리게 되면 창피고 뭐고 없다.
그냥 그 자리에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창호라는 아이는 그렇게나 서럽게 울정도로 분하면서 왜 정작 앞에서는 그 감정의 요동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왜 일까?

이정옥씨는 그 의혹을 수년 후 "귀신같은" 바둑으로 세상을 경천동지하게 한 창호를 보며 약간이나마 풀 수 있었다.

창호라는 어린 소년이 그 때 흘린 보이지 않는 눈물은 "큰 바둑"을 향한 뜨겁고 맹렬한 "승부수"였던 것이다.




어린 창호는 이미 그 나이에 자신의 바둑에 영혼을 건 것이다.
그 다짐은 어쩌면 할아버지 손끝에서 빛나는 바둑돌을 처음 본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투 비 컨티뉴...




※ 이 글은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치문 위원님의 글을 토대로 수정, 각색하여 작성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 사진, 그림의 출처는 www.leechangho.com 입니다.

※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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