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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태화강의 추억

해울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2.04 00: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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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디자인 탐사](17)울산 태화강의 추억
입력: 2008년 01월 03일 17:33:59
 
-선사유적에도 ‘칼’대는 공업도시의 ‘성형 강박’-

#울산의 도시 이미지

‘Ulsan For You(당신을 위한 울산)!’ 2004년 울산시가 제정한 도시 브랜드 구호다. 시 당국은 이 영문 구호를 도시 이미지 마케팅 차원에서 “울산의 정체성 확립과 시민화합을 도모하여 동북아 중심도시로서의 한 단계 높은 도시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개발했다”고 한다. 이는 “항상 준비된 도시, 울산” 또는 “울산은 당신을 위한다”라는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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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내려다 본 태화강과 울산시 구도심 전경. 멀리 태화교와 왼편에 주산 함월산이 보인다. 왼쪽에 십리 대밭의 끝자락이 보인다. |울산광역시 제공.

‘UFY’는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듣기에 따라 묘한 역설을 자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구호는 “그동안 울산은 당신을 위하지 않았다”는 자기 고백 같기도 하다. 1962년 한국의 공업중심지(일명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이래, 울산은 지난 46년 간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등 굵직한 산업개발을 통해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 역할을 해왔다. 이 결과 한국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부자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울산은 중화학·중공업에 따른 환경오염과 삭막한 생활환경을 지닌 공업도시로서의 도시 이미지도 얻었다. 이는 ‘공업탑 로터리, 산업로, 번영교’ 등을 지날 때 스쳐가는 수많은 산업개발시대의 잔상들과 한데 어우러져 울산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울산의 도시 이미지는 개발지상주의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의 압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울산시가 이런 산업화 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공단에서 발생한 악취와 공해, 오염된 태화강 수질 개선 노력과 전국 최대 규모의 도심공원 조성 등은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산업과 경제개발 정책을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박제된 역사문화를 넘어서 삶의 생태적 의미가 함께 연결되는 문화정책과 비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기존 울산시의 도시 이미지 속에서 실종된 ‘역사문화 의식과 마음’의 회복이 절실하다. 과연 공업도시 울산의 지층 아래 어떠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는 것일까?

#선사유적의 보고

울산광역시는 인구 110만명으로 울산시 4개구와 언양을 중심으로 한 울주군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울주군 지역은 울산시의 서부에 위치한 해발 1000m 이상의 산악 지형 탓에 가지산도립공원, 온천, 신불산 억새평원과 파래소폭포를 비롯해 주산인 고헌산 일대 수많은 사찰과 지석묘 등의 문화유적을 품고 있다. 울주군에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선사시대 암각화가 비교적 청정 환경 속에 존재해 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태화강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울주군 대곡천 상류로 가면 원래 ‘대곡리 암각화’로 불리는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너비 10m, 높이 3m의 이 암각화에는 사람, 배와 어로 장면, 많은 육지 동물과 함께 고래와 상어 같은 바다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울산시를 가로지르는 태화강의 발원지에 해당한다. 따라서 예로부터 고래잡이 등 태화강 일대 고대 울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암각화는 1965년 울산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사연댐 건설로 물에 잠겨 1년 중 건기에만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그동안 반구대 암각화 일대는 차량 진입이 어려워 선사시대의 경관을 지닌 매우 드믄 장소였다. 당장에라도 공룡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태고의 신비감마저 감돈다. 그러나 이러한 원시의 환경이 ‘암각화 전시관’ 건립을 강행한 울산시의 눈먼 행정 때문에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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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 고래박물관. 2005년 귀신고래의 동상이 있던 장생포 해양공원 내에 고래박물관이 건립되었다. ⓒ 김민수
대곡천 상류에는 반구대뿐만 아니라 ‘천전리 각석’도 있다. 이는 가로 9.7m, 세로 2.7m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적색 점토암인데, 바위 윗부분이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학술조사에 따르면 이 경사는 바위에 그림을 새기기 위해 일부러 깎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자연적으로 암각화가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을 만든 셈이다. 이 각석에는 신석기 말로 추정되는 동물상, 청동기 시대의 각종 기하학적 추상문양, 신라시대 화랑들이 새겨놓은 300여 자의 한자 명문과 함께 바위 위쪽에 기하학무늬, 인물상, 동물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에 풍요와 다산을 염원한 종교적 장소이자 신라시대 화랑들의 풍류와 심신 연마를 위한 도량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전에 나는 졸저 ‘필로디자인’에서 이 각석 암각화가 평면 위에 여러 겹의 이미지를 새겨놓아 최첨단 ‘PDP, LCD’와 같은 초대형 평판디스플레이 이미지의 원조라고 평한 바 있다. 이곳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공룡들도 흔적을 남겨 놓았다. 암각화가 있는 개울 건너편에는 1억년 전 전기 백악기에 살았던 초식공룡 울트라사우루스를 비롯해 여러 유형의 공룡들이 배회했던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다.

#태화강의 추억

대곡천 일대는 태고의 역사를 품은 보고(寶庫)에 해당한다. 이는 다시 태화강으로 흘러들어 울산시의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고, 북쪽에서 유입된 동천강과 만나 울산만과 동해로 흘러든다. 태화강의 본류는 마치 거대한 대동맥과 같아서 울산 토박이들의 표현대로 ‘굽이치는 일백리 태화강’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태화강을 따라 삼호교와 태화교 사이에는 운치 있는 ‘태화강 십리대밭’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홍수로 인한 범람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백사장에 대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원한 태화강 십리대밭의 풍경을 배경으로 강줄기가 태화교와 만나는 북쪽 절벽에 예식장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이곳이 고려 때 성종이 울산(당시 흥려부)을 지나다가 거둥하여 신하들과 잔치를 열었다는 누각 태화루(太和樓)가 있었던 곳이다. 영남읍지 지도 등에 표시되어 있듯이, 이 부근에는 훗날 울산도호부의 사직단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 이 누각 아래 수심이 깊은 곳은 황룡연(黃龍淵)이라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편은 태화루를 ‘대화루(大和樓)’로 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큰 내가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으로 꺾이는 곳에 물이 더욱 넓고 깊으니 이곳을 황룡연(黃龍淵)이라 한다.”

#포경, 교역, 성곽의 도시

이처럼 옛 태화강은 풍류와 경승의 추억을 품고 울산만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태화강의 역사는 왜구와의 국제교역뿐만 아니라 포경업으로 번창했던 풍요의 추억과도 만난다. 남해안 포구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는 고려시대에도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건국 직후 회유책으로 왜구들과 자유 교역을 허가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가 갈수록 문란해지자 태종 7년(1407년)에 부산포와 내이포(진해)에 왜관을 설치하고 이어서 태종 18년(1418) 울산에 염포(鹽浦)를 설치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수출전용부두가 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염포였던 것이다. 또한 옛날 이 지역 일대에 자주 출몰하던 귀신고래의 동상이 있었던 해양공원 내에 고래박물관이 최근 장생포에 건립되었다. 이는 다양한 포경유물들을 수집, 보전 및 전시해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옛 장생포의 삶과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울산의 문화유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울산은 여러 성곽들로 이루어진 읍성도시였다. 조선시대 고지도 속에 울산과 언양은 각기 성곽을 가진 읍성도시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1018년 고려 현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최초로 방어사(防禦使)를 둔 이래 국방의 요지였던 것이다. 성곽도시로서 울산의 성격을 규명한 울산대 김선범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울산지역에는 문헌과 실제조사로 파악된 것만 해도 읍성 2개소, 왜성 3개소, 산성 11개소, 병영성 3개소로 무려 19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실제로 성곽 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5개소로 울산읍성, 언양읍성, 병영성, 울산왜성, 서생포왜성이 있다.

#볼거리 개발의 강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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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원래 암각화는 강바닥보다 높은 암반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연댐 건설로 물속에 잠겨 가뭄 때나 모습을 드러낸다. ⓒ 김민수
이처럼 울산은 삭막한 공업도시가 아니라 가꾸기 나름에 따라 역사문화의 자산이 풍부한 도시인 것이다. 그러나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울산시는 소위 문화상품 개발로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이른바 ‘문화 콘텐츠 개발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시 당국은 앞서 언급한 선사문화의 비경이 있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136억여원을 들여 ‘울산 암각화전시관’을 착공하고 올 3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전시관에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실물모형을 비롯해 세계 암각화 사례들을 수집해 전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 우려했듯이, “전시관의 위치가 반구대암각화에서 불과 650m밖에 떨어지지 않아 자연경관을 훼손하고 암각화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국보 유적의 실물이 코앞에 있는 데도 굳이 모형을 만들어 선사유적의 장소성을 ‘굳이’ 훼손시켜야 직성이 풀리는가? 장생포 고래박물관의 경우 포획이 금지되어 사라진 포경업과 멸종 위기에 있는 고래를 위한 교육적 효과가 있어 박물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암각화의 경우 실물 유적에 대한 보존대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아직 암각화 주변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이곳에 선사시대의 경관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차량 진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대형버스 80여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시설까지 마련되어 암각화 지역 일대가 ‘유원지화’될 판이다. 이는 선사 해양유적지 반구대를 공업단지 개발조성사업쯤으로 여기는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울산 포 유’?

뿐만 아니라 울산시는 소위 ‘태화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태화강에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사라진 옛 태화루를 복원할 예정이다. 울산시가 이곳에 초고층 주상복합을 건설하려했던 한 건설회사의 계획을 막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러나 원형도 불확실한 복원을 위해 412억여원을 쓰려는 것은 볼거리 개발에 안달이 난 강박증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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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장이 들어서 있는 옛 태화루(대화루) 자리. 울산시는 이곳에 태화루 복원 및 공원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절벽 아래에 수심이 깊은 곳이 ‘황룡연(黃龍淵)’이다. ⓒ 김민수

일부 향토사학자와 시민단체들은 울산시가 복원의 근거로 제시한 사진 속의 태화루는 태화루 현판만을 걸어놓은 옛 울산객사의 남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확한 태화루 복원 및 공원화 사업에 무려 412억여원을 쓰면서 2010년 개관예정인 울산시립박물관 사업비는 460억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두 사업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태화강 프로젝트의 최우선 목표가 “안전하고 깨끗하며 생태적으로 건강한 태화강 조성”에 있다면 본래의 취지에 충실했으면 한다. 그리고 역사와 문화는 결코 산업·경제개발의 들러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수천 수만년 동안 시간의 켜를 쌓아 형성한 역사문화를 얄팍한 볼거리 위주의 개발논리로 하루 아침에 훼손해 유실시켜 버리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절실하다. 과연 무엇이 울산이 지향하는 ‘Ulsan For You’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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