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반박해 달라는 말씀인지 캐치했습니다.
그 긴 장문의 내용을 요약도 제대로 안하고 외계어로 무조건 반박하라 하니까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밖에요.
뭔 소릴 하신 건지 이제 내용을 인지했으니 반박 자료를 준비할 시간을 하루 정도 주시고요. (말이 하루지 30분 안에 끝날 수도 있음)
아무튼 그 하루 동안 님 역시 제가 제시한 사료 50개에 대한 반박을 준비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공평하죠 안 그렇습니까?
[총론]
-우리(我)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 태조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고려사 지리지, 서문》
-고려(高麗)가 다스리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極矣)를 이루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후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
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에 부속하였다-
《남당서 권 18, 고려조》
-철리국(鐵利國)에서 사신을 보내 예전처럼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고려사, 현종 12년 3월 23일》
-거란(契丹)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가을 7월에 모든 도(道)에 조서를 내려 각자
무기를 완비하여 동쪽으로 고려 정벌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동쪽에 위치)
《요사 열전, 이국외기, 고려》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고려] 영토(我境)를 길로 삼았는데-
《고려사, 성종 4년 5월 미상》
-거란이 여진국(女真國)을 정벌할 때에 길이 고려의 땅(高麗之界)을 거치게 되자-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거란(契丹)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 동북여진(東北女眞)으로 가는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 17년 윤 5월 19일》
-정축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금(金)]은 내 땅[고려
(高麗)]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 금나라 초대 황제 아골타)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고려사, 예종 14년 8월 3일》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기를...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
·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고려사, 우왕 14년 2월 미상》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73, 세종 18년 윤 6월 19일》
[서북계]
-천현(天顯) 원년(926) 거란(契丹)의 왕이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부여성은 바로 당나라와
고구려 때의 부여성이다. 이 당시에 고려 왕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워 혼동강(混同江)까지 차지해서 지키고, 혼동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부여성이 발해에 속한 것이다. 혼동강은 바로 압록수(鴨綠水)이다-
《자치통감》
-고구려(高麗)는 본래 부여(夫餘)의 종족이다.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 요수(遼水: 현 대릉하)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흘러 나오는데, 물빛이 기러기의 머리
색과 같아 압록수(鴨淥水: 요하/요수[고려 후기~], 현 요하)로 불린다-
《신당서 열전, 동이, 고구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요하)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 신라)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이제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들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 요하 인근)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고려사, 성종 9년 9월 7일》
-우리나라[고려]가 바로 고구려[구고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거란(遼)의 요양(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말하는가?
게다가 압록(요하) 안팎 또한 우리의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서희의 8주 개척)
《고려사 열전, 서희》
-『고려사절요』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는 서희 장군이 994년과 996년 사이에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
·곽주(郭州)·귀주(龜州)·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선주(宣州)·맹주(孟州) 등 8개 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고려사절요』나 『동사강목』의 기록에 대하여 오기이거나 다른 이칭 중복 기재 등으로 보고, 중국 『宋史』의 기록을 근거로 6州를 정하였
다. 그런데 뒤에 자세히 다루거니와 우리나라의 기록을 부인할 특별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宋史』를 근거로 6주로 축소한 것은 문제가 있다.
··· 서희 장군은 거란과 담판하여 모두 8주를 개척하였으나 귀화진과 장흥진을 특별한 사유도 없이 오기로 보아 제외하고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주를 이른바 '강동6주'라 이름 붙여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지역으로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거란의 3차에 걸친 침략 시
의 군사 이동 상황과 평안도의 지명 지리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압록강 남쪽의 지명 다수가 요령성 요양과 개원 사이에서
같은 이름 으로 있는데, 고려군과 거란군의 군사행동을 요령성으로 옮겨 보면 지리적으로 상당 부분 부합된다. 따라서 서희 장군이 개척한 8주는 현
재의 압록강 남쪽이 아니라 요령성 요하 상류의 남쪽 개원시 일대와 요양시 이북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이 전쟁 발발 원인과 관련하여, 송(宋)과 거란의 국경 부근인 웅주에서 ‘거란국주 가 그 모친의 분묘를 수비하기 위하여 고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라고 한 이 기록은 비록 전쟁 당사자가 아닌 송 측의 기록이지만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란 성종의 모친 성신선헌황후(聖神宣獻皇后)는 이해
1010년 4월 그 남편 경종(景宗)의 능묘가 있는 건주(乾州)의 건릉(乾陵)에 장사되었는데, 이 건주는 거란 중경 대정부, 현 적봉이다. 그러므로 고려가
요하를 넘어 거란 중경을 위협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등장하는 遼陽은 『遼史』 지리지에 의하면, 요하 서쪽으로 현재의 심양인
거란 동경과 요하 동쪽으로 현 요양 부근의 고려 西京으로 비정되는 지역을 함께 아우르면서 서로 국경을 둘러싸고 다 투고 있던 지역이었다-
「윤한택, 고려와 거란의 전쟁기록 복원」
-철령은 서쪽으로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으로 범하(汎河)가 있으며 또 남쪽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흘려서 요하로 들어간다.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으로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년에 봉집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
《명사 지리지》
-거란 성종 개태 8년(1019) 군대 집결에 편리하기 위해, 고려와 영역 경계인 지금의 요령성 개원시 개원노성
(開原老城) 지방에 함주(咸州)를 건설하고, 지리의 도움을 빌러 고려에 대해 전개하는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周向永·许超, 铁岭的考古与历史, 鐵嶺: 辽海出版社, 2010년 중국에서 발간된 철령시 지역의 고고와 역사를 소개한 책, 166쪽」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고려 예종) 께서는 상지(上智)의 자질을 몸에 타고 나시어 중흥(中興)의 업을 손에 쥐셨사옵니다. 임금님의
밝은 지혜[聖明]가 일어나 계승되니 삼대(三代)의 문장이 찬연하고, 다스림이 정해지고 공을 이루니 백년의 예악(禮樂)이 우뚝 섰습니다.
어찌 다만 만백성이 진실로 살아날 뿐이겠사옵니까? 따르는 이들은 태사(太史)의 말을 여러 차례 어기며 구부리어 서경 사람들의 바람을
좇았사오니, 이곳을 천자의 덕[龍德]의 길한 땅이라 했으니 실로 이곳은 봉성(鳳城)의 옛 터입니다. 기자(箕子)의 풍습을 싣기에는 오늘이
적당하옵고, 요양(遼陽)의 땅이 다시 우리 강토로 들어옴을 보게 되었사오니, 실로 만고에 없는 보기 드문 일인지라 마땅히 사람들과 더불어
즐겨야 할 것이옵니다- (이듬해 보주 재수복)
《동인지문사륙, 권8》
-의주(義州)는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으로, 화의(和義)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거란(契丹)이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성(城)을 쌓고
보주(保州)라고 불렀는데, 문종대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두면서 포주(抱州)라고 불렀다. 요(遼)나라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내원성(來遠城)과 포주(抱州)를 우리에게 귀속시키니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쪽 지방의 인호(人戶)를 데려다가 그곳을 채웠다.
이때에 다시 압록강을 경계로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의주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마자수(馬訾水) 혹은 청하(靑河)라고도 한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상거하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떨어져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영토》
-압록(요하)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 / 남소주, 정관 21년 이적이 남소에서 고구려군을 토벌하고 군사를 돌려서 파리성에 이르러
백랑 황암 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강이 얕고 폭이 좁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거란 요하의 근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 강은 다시 수리를
가서 합쳐져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를 요수(遼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백랑수는 곧 대릉하(大凌河)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영토》 / 《성경강역고, 권3》
-이에 따라 우리[고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鶴柱) 건너 강안
(岸江)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고려사, 선종 5년 9월 미상》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로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돈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돈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 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에, '삼국유사
의 '요하(遼河)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조선상고사》
-압록(鴨淥)의 중국어 발음은 ‘yalu’ 로, ‘yalu’는 만주어(滿洲語)로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境界)’를 의미한다.(이훈 편저, 滿韓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924쪽.) 즉, 鴨淥은 만주어 ‘yalu’를 한어(漢語)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압록강(鴨淥江)은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의 강’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압록강(鴨淥江)은 어느 특정 강을 의미한다고만 볼 수 없으며, 경계를 마주하는 두 정치 집단의 정치
·군사적 힘의 변동에 따라 변화 가능한 강으로 봐야 할 것이다-
「김영섭,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 -강동 6주(江東六州)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62, 2019.9, 159-188(30 pages)」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죄수에서 풀어주고 조선으로 가자 그대로
그 땅에 봉하였다… 북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그가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게 하니, 요(遼)의 동경은 본래 이곳
이다. 당(唐)의 고종(高宗)이 고구려[高麗]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인데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라고 불렀다.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건국하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 대인선(大諲譔)을 포로로 잡아 동란
왕국(東丹王國)으로 만들고, 태자 야율도욕 (耶律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919)에 요양(遼陽)
의 옛 성을 수축하고 발해와 한인(漢人) 민호로 동평군(東平郡)을 세워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928)에 동란국 민들을 옮겨 살게 하고,
승격하여 남경(南京)으로 하였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서 동경으로 삼고 부(府)는 요양이라 하였다. 호수는 40,604이며, 주(州)·부(府)·군(軍)·성(城)
87개를 관할하고 현(縣) 9곳을 통할한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동녕로(東寧路). 본래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으로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였다. 한(漢)이 조선(朝鮮)을 멸하고
낭랑(樂浪), ·현토군(玄菟郡)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낙랑지역이었다.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렀다[居].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 원(元) 지원(至元)
8년(1271)에 서경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시켰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행중서성, 동녕로》
-정축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서경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
부(東寧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고려사, 원종 11년 2월 7일》
-동녕로(東寧路)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으로,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平壤)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천여리나 옮겨갔다.
지원 6년에 고려의 이연령(李延齡) 등이 그 지역의 60여 성(城)을 가지고 원나라에 내부(內部투항)하자, 원나라에서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후에 동녕
로(東寧路)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동녕(東寧)은 곧 요양(遼陽)인데, 요양을 동녕이라 부르게 된 것을 상고해 보면...-
《흠정속문헌통고, 동녕로》
-향산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 북쪽에 있는데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었다. 산의 크기는
비할 데가 없으며 장백산의 분맥(分脈)이다. 향나무ㆍ사철나무가 많고 선불(仙佛)의 고적이 있다-
《동문선, 제72권》
-요동(遼東)의 쌍성(雙城) 및 화주(和州)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
《원사 식화지》
-11월 정해 아태조(太祖,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 기축 〈아군이〉 요성(遼城)으로 진군한 뒤 요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 2일》 / 《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 4일》
-요심(遼瀋) 지역은 애초 본국[고려]의 옛 영토였으나 원나라를 섬기게 된
이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요심(遼瀋)의 사람들에게 고유(告諭)하여 말하기를, “요심은 우리나라[고려] 경계이며, 민은 우리의 민이다-
《고려사 열전, 지용수》
-요좌(遼左)는 본래 고려 땅이다-
《연도기행, 1656년 8월 29일 갑진》
[동북계]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예종 2년(1107)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
(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명종 8년(1178)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 비록 연혁과 명칭
은 같지 않지만 고려(高麗)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현 강원도 삼척)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고려사 지리지, 동계》
-[함길도]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 현 강원도 철령)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
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 7백 여 리이다.
[경원도호부] 복호봉(伏胡峯)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과 수빈강(愁濱江)이다. 그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
기까지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까지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쪽으로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까지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까지 1백 50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병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제후국 백성(蕃人)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 오면서 우리[고려]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고려사, 문종 27년 4월 3일》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광활한 땅(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 (제후국의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
하고 있는 만큼 변방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우리의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귀부(영토를 바치며 항복)해 온 동여진인들을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다〉 한림원에서 아뢰기를,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개
내부자(內附者)들이 11개 주(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무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6성을 새로 쌓았다 하여 표를 올려 칭하(稱賀)하였고
또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계(界)의 끝(界至)로 삼았다- (기미주 영토 내 직접 통치 시도)
《고려사, 예종 3년 2월 27일》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고려]를 부모의 나라
(父母之國)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134, 성종 12년 10월 17일》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으니,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河江) 가에 이르기까지 그때의
성터가 남아 있다. 그곳은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이고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처럼 국경(國境)을 멀리 개척해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국경을 정한 것은 김종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성호사설, 천지문》
일부 핵심 사료들만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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