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전혀 없다. 이미 이병도 생전에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병도 자신이 "요즘에는 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이병도를 실증사학이라고 말하는데, 반박에 반박에 반박에 수십년 동안 반박이 몇 번이나 된 상태며.
특히 고고학계는 풍납동에서 한성백제 발견된 뒤로 영원히 빠이빠이 했음. 이병도가 풍납토성이 백제 수도는 아닐 거라 했었거든. 아예 위치도 다른 데로 추정했었고.
요즘 사학자들은 오히려 유물론(마르크스만 있는 것이 아님) 영향으로 경제로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음.
예를 들면 병자호란 청나라가 쳐 들어 왔을 때, 사실 기록은 10만인데, 얘네들 인구로 그게 가능함? 정복 왕조 특유의 과장 아님? 이런 식으로 3~4만일 거라 추산해서 깎음.
그런데 이 기준이면 조선왕조실록 등에 적힌 홍건적 침입 때 모은 고려군 20만도 과장일 수도 있다는 거야.
자, 같은 태조 실록 기록을 보자.
밑에 기사, 이성계가 사병 2000명을 끌고 홍건적 침입 때 공을 세운 것은 둘째 치고,
윗 기사는 나라를 갓 세운 태조 시절조차 조선이 고려 말 때처럼 병력을 모았으면 30만을 모았다는 얘기임.
이제 조선 후기에 가서 군적에 오른 사람들이 실제로 소집이 안 되거나 양반이든 천민이든 가짜로 올려 군역이나 세금 징수를 피해가던 사람들이 문제지.
조선 전기에는 그런 문제도 없음.
고려를 이어서 조선을 만든 건데, 밑도 끝도 없이 까니까 자꾸 어이없다는 거야.
유학자들이 병크를 터뜨린 것은 맞는데, 결국 금난전권을 풀어주고, 관에 물건을 납품하는 위주로 일어나던 광공업이 후기에 민수로 돌아가고, 천민은 이미 효종 때도 어마어마한 숫자로 추노하고, 나라에서 정유재란 여파로 세금 딸리니까 천민들 면천시켜 세금 걷을 생각함. 계속 시도하다가 숙종 때 화폐 다시 도입하는 것도 그 이유고.
이제 순조 홍경래의 난 대에 이르면. 그때 홍경래 도와준 사람들이 몰락 양반, 지방 향리, 향임층들과 청나라와 무역해서 돈 번 천민 출신 거부와 광산 노동자들이야. 그러다 조선 조정에서 초토화 작전을 펴서, 빡친 5000명의 농민들이 참여해 정주성에서 조총 들고 농성을 벌이는 식으로 사건이 변질 된 거고.
불랑기포와 총통 등으로 성벽을 못 뚫자 결국 정주성 성벽 아래 땅을 파고 1700근의 화약을 묻어 완전히 폭파시킨다고. 조선은 그 시기가 되서야 화약 생산량이 확 늘거든.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서양 포함 전근대 국가들 중에 정부 실패가 일어나지 않은 정부는 없어. 그 시절 정부는 그냥 다 작은 정부거든.
서양 중상주의? 그거 나라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국가적으로 사치는 막고, 광산 개발에 몰두하며, 경쟁 국가와의 교역은 자제하고, 식민지를 늘려 이제 식민지 상대로만 수출을 해. 근데 귀족들은 컨트롤이 안 됨.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캔 은 절반이 넘어가기 시작함. 주요 거래 물품은 귀족들 사치품인 차와 도자기. 명과 청은 딱 항구 하나만 개방하고 그걸 다 빨아들인다고. 결국 영국이 벌인 건 아편전쟁이었고.
일본 에도시기 일본은 바다 걸어 잠그고, 평화시기라 군사력은 거의 유명무실해짐.
이 세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것은 지정학적 위치와 근대 이후의 그릇된 대처지.(물론 그 이전의 병크들이 연관되긴 했지만)
뭐, 문관 사회 무관 사회. 이런 것들이 전혀 아님. 굳이 따지자면 청나라는 팔기군들이 귀족인 무관 사회고, 오히려 에도 시대 하층 사무라이는 각 번에서 사무를 하다가 근대화 이후, 관료집단이 되는 데 공헌함.
자,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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