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몽상가들
지영의 집에서 짧은 휴식이 끝나고 나는 뉴욕으로 가기로 했고,
그곳에서 지내며 언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김은 여전히 가족과의 한달 휴가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브로드 웨이’ 보이 꿈을 위해
내가 지낼 숙소로 합류할 것이었다. 지영은 일 때문에 이태리로 가고…
그렇게 우리는 낯선 곳에서 각자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언어공부는 쉽지 않았다. 내가 과연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제대로 말이나 해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좌절감이 밀려왔다.
게다가 나는 뉴욕시 전체의 유일한 조선인인 듯한 기분에 휩싸일 정도였다.
동양인 특히 여성이 흔치 않는 곳에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놀라운 풍요, 특히 베트남전을 치르기 전의 미국은
정말 세상의 온갖 부가 다 모여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온갖 물건과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도시의 풍광,
사람들의 옷과 음식…
모든 것이 내 나라 조선이 얼마나 가난한 곳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온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체감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 조선도 언젠가 이런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어차피 김이나 나나 결국 그것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언젠가는 한국의 영화가, 한국의 배우가 세상을 놀라게 할 날이 올 것이라는 꿈.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언젠가 올 다음 세대의 후배들에게 앞선 발자취를 남긴다는 생각.
시간은 빨리 흘렀다. 그래도 매일의 일상대로 살다보니, 숙소에 친구들도 조금 생겼고,
매일 가는 까페 사장님과도 조금 친해졌고, 학원에도 아는 사람이 좀 생겼다.
그래봤자 우리의 대화에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언제 파인 땡큐 앤쥬를 벗어나려나.
나는 김과 여전히 많은 영화를 보고,
가끔 지영이 찾아 오기도 해서 나와 김, 지영은 함께 영화나 뮤지컬을 보러가기도 했다.
우리 셋은 취향이 너무 달라 때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각각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는데,
때로 나와 지영은 영화를 각자 보러가는 척 하면서 김을 따돌리고 둘이서 나중에 만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은 히치콕 감독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늘 그를 따라 영화를 보러 갈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나와 함께 그런 장르물을 하자고 졸랐지만
나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여자주인공은 싫다며 차라리
나를 살인마 역할을 달라고 하는 그런 농담을 해가며 우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가끔은 지영의 저택에서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김과 함께 영화를 보고, 맥주를 한 잔 하자는 것이 취할 때까지 마시게 되었다. 막상 프로젝트에 들어가니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김이
-누이, 정말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다는 건 벌써 몸의 일부가 무쇠로 된 것처럼 무거운 느낌 아니냐? 저들은 그냥 타고난 언어만으로도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데, 나는 늘 그 말의 꽁무니를 쫓아가기 바쁘니 말이야.
-그래도 감독님은 말이라도 통하잖아. 전 그냥 슬플 정도로 말이 안 통해.
김이 웃으며
-그래, 정말 말이 안통하는 건 슬픈 일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취했는지, 그냥 별 생각없이 물었다.
-오라버니의 그 슬픈 첫사랑은 끝났어요?
라고 물었다.
-여보게, 슬픈 사랑 아니야. 행복한 사랑이지.
그가 말했다.
-왜.. 지영에게 고백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는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너, 참 잔인하네.
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그런가.
내가 잔인한가.
그가 말했다.
-누이가 사내였으면 내가 죽여버렸을텐데.
그리고
-너, 그 여자 아프게 하지 마라.
라고 말하고는 일어서서
-먼저 간다.
하고 가버렸다.
그래,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멈추지 못하니 슬픈 것이겠지.
나는 지영을 아프게 하고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언젠가 아프게 할 것을 하지 않기 위해
미리 헤어지기라도 해야하는 걸까
뉴욕에 있으면서 나는 김이 내게 비행기에서 했던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왜 혜랑이와 헤어졌을까.
그 때는 그 아이랑 산다는 것이 숨이 막혔다.
뭔가, 그 아이랑 산다는 것이 지긋지긋했어.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내가 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출발이 잘못되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지영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솔직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좋은 것도, 서운한 것도 때로는 질투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그녀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것이 설사 자신을 약하게 할지라도.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와 혜랑은 서로 솔직하질 못했다.
우린 어른이 될 무렵, 그래서 서로에게 가진 사랑을 키워나가고 성숙시켜야 할 무렵에,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으로 서로 솔직하질 못했어.
우리 마음에는 늘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화가 나도 마음껏 화내지 못하고
사랑하면서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고
기쁘고 슬프고 즐거운 것을 함께 하지 못했던 것 같아.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상처받겠지?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너무 상처를 많이 줘서 더 줄까봐…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 마음으로 자기 나름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마음을 덮어버리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혜랑아…
하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차오르는 미안함.
내가 너무 어려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후회화 씁쓸함.
그런 것이 먼저 떠올라서, 마음에 먼저 슬픔이 깃든다.
그래서 내 슬픈 마음이 혜랑이를 슬프게 했던 것 같아.
혜랑이도 그럴까.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정말 솔직하게 그 아이를 대해야지, 생각해보지만.
이런 생각은 다 습관이고, 환상일뿐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올까.
어느덧 우리의 프로젝트도 시작되었고,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8-10개월 정도의 촬영 기간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마흔이 되기 전에 이런 프로젝트로 내 30대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이었다.
사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내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에
천천히 장래에 대한 고민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연히 오게 된 이 나라가 내겐 괜찮게 느껴져서, 이곳에 정착할까 생각도 드는 것이다.
혹은 정말 진지하게 공부를 해볼까…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늦은 것보단 나으니까.
사실 나를 거두어 주신 아저씨는 내가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자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옥경아. 형님께서 너를 우리게 맡길 때, 꼭 공부를 시키라 하셨다. 학비도 주셨어. 그러니 가을이 되면 학교에 가는게 어떻겠냐.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글자도 모르고 산다만, 너는 공부를 해야하지 않겠니. 네 아버지가 꼭 그리 하길 원하셨다고 형님이 네게 전하라 하셨다.
그래, 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이르셨을 것이다.
아버지.
내 유년시절에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아버지와 관련된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많이 아끼시어 늘 나를 가까이 두고 즐거워 하셨다.
오라버니들에게는 엄한 분이었지만, 내게는 큰 소리 한 번 내신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별로 표를 내지 않으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금지옥엽임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그 사랑을 오라버니들과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하신 분이었다.
-옥경아, 너 청나라를 가보았느냐?
가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런 질문을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가보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아실텐데.
-아니오.
-그럼 일본은 가보았느냐?
-아니오.
-아버지는 가보았단다.
아버지가 은근히 내가 가본 적 없는 데를 가지고 놀리시는 것 같아 나는 그런 곳들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저도 크면 갈 것입니다.
하고 볼멘 소리로 말하곤 하였다. 그럼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옥경아, 나는 너도 네 오빠들처럼 공부를 시킬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나라가 없다만 언젠가 나라를 되찾으면 공부를 해놓은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아버지는 네가 네 어머니처럼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기르는 일을 훌륭히 해내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사내들 못지 않은 기백으로 생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 생각한다. 괜찮겠느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아버지가 괜찮냐고 물어보시니 괜찮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곤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아마 평양을 떠나지도 않았고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내가 집을 떠난 줄 알면 아버지는 나를 꾸중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 무용한 생각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집을 떠나왔으며, 지금 미국에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 미국을 가보셨습니까?
저는 그곳에 와 있습니다.
조선보다 이곳이 나을까.
사실 한국에 미련 남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 얼마 전 지영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나랑 이곳에서 지내자, 옥경아. 한국 돌아가지 말고.
-내가 여기서 뭘 해.
-뭐든. 미국은 기회의 땅이야. 공부도, 영화도, 연극도. 네가 원하면 다 할 수 있는 곳이야.
그녀는 진지했다. 그렇지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울께. 너 날 잘 모르겠지만, 나 업계에서 힘이 좀 있다고.
-그리고 나 너 귀찮게 하지 않을거야. 나 업계에서 좀 바쁜 사람이거든.
-대재벌 미야모토 가문의 제1후계자 미야모토 미츠키의 겸손된 말씀이라니.
-나 장난 아니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정말 나 당신에 대한 사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야. 여기서 상황을 보다가 한국에 가도 되잖아. 한국도 언젠가는 좋아질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좀 더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냥 기분으로 혜랑이 좀 더 멀리 있는 느낌이긴 했다.
-어차피 보고 살지도 않는 것을…
그렇게 나는 한국을 떠나는 것으로 마음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국살이는 필연적으로 교포사회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와 김이 지영 덕분에 그들에게 의존적이지는 않더라도 나와 김, 특히 김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우리는
한미관계와 관련한 행사에 종종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지영의 재단이 개입되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김없이 얼굴을 비춰야 하는 그런 사회적 책무가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녀의 재단이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 한미수교 기념을 위한 여러 문화 행사가 많아.
지영이 말했다. 김은 벌써 미간을 찌푸리며
-그 놈의 얼굴 마담 좀 그만하면 안돼? 정말 지겨워 죽겠어.
지영은 부드럽게 김을 타이르며
-그게 어른들의 사회생활 이랍니다. 철 좀 드시지요. 비지니스는 비지니스야.
-그래요, 감독님. 그래도 그런데서 하는 프로그램은 조선에서 최고 가는 사람들이 하는 공연들일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예술가를 정치쇼에 강제 동원하고 말이야.
투덜거리는 김을 두고 지영이 눈짓을 하며 내 손을 잡아끈다.
-이거 한 번 입어 봐.
-이게 뭔데?
-이번에 출장 갔다가 당신 옷 한 벌 샀지.
지영이 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정말 꼭 한 번 입혀보고 싶었어.
-이거 남자 옷인데
-응,그래서 내가 좀 맞게 고쳐서 가져 온거야.
내 눈에는 그냥 양복에 넥타이, 셔츠 그 뿐이었는데, 지영의 눈에는 달리 보이나보다.
-나 이거 할줄 모르는데…
하며 넥타이를 건네자 지영은 넥타이를 받아 내게 매어 주고 옷매무새를 고쳐 주며
-너무 멋있어.
이거 입고 가자, 이번 행사.
하는 것이다.
-너무 튀지 않아?
-괜찮아요, 여기 조선 아니고 미국이라고. 무려 뉴욕.
그녀는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기대오며
-나 반했으니까 잠깐만 좀 기다려봐.
한다. 그런 그녀의 장난이 낯설기도 하고 좀 재미있기도 해서
그런가. 오랫만에 그러면 왕자님이 한번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국극단 시절, 사실 내 옷은 모두 혜랑이 골라주는 것이었다.
혜랑은 옷에 관심이 많아서 본인을 꾸미는 것도 좋아했지만 내 옷도 골라주고 좋아했다.
남역을 하면서부터는 평소에도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성복을 입다보니
나중엔 거기 익숙해져서
영화판에서 다시 필요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어야 할 때 무척 불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습관이란.
그래,
습관이란.
난 지금 이순간에도 혜랑이를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지난 5년간 한번도 보지 못한 혜랑일.
나는 다시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으며 지영에게 물었다.
-이번엔 무슨 공연이야?
-잠깐만,...국립창극단이라는데?
국립창극단이라….
웬지 익숙한 얼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종종 합동공연을 하던 극단들에서 창극단으로 넘어간 배우들이 많을테니…
-자명고래. 제목이 신 자명고…너도 아는 극이야?
-응.
모를 수가 없지.
자명고는 매란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자명고는 그 내용과 구성에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우리 공연 중에 최초로 키스신이 들어간 극이었다.
이전까지 극에서는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적이 없었는데, 세상이 바뀌니 우리도 해보자며 파격적으로 넣은 씬이었다.
사실 나는 자명고 초연 때까지 혜랑과 소위 정말 손만 잡고 자는 사이였다.
13살에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내 온 우리가 다른 모양새의 관계로 넘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게 다시 온 혜랑의 마음이란게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나는 그녀가 너무 소중하고 조심스러워서
그냥 될대로 되라지, 뭐 싫으면 말겠지. 이런 용감한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결혼을 했던 혜랑이 내가 가진 들끓는 마음을 안다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에 사랑하는 이의 옷깃만 만지작거리던 순진 무구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은재를 재우고 나면 우리는 대본 연습을 하곤 했는데,
그놈의 키스신 장면만 가면 둘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야, 좀 그만 웃어…
혜랑은 그러면서 자기도 웃음이 터지는 걸 참을 수 없나보다.
-웃음이 나는 걸
다시, 다시를 몇번이나 해도 얼굴이 한뼘 다가가기도 전에 우린 다시 웃음이 터지고 마는 것이다.
-어떡하지, 우리 공연 때도 이러면…
혜랑은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안 돼. 소복이 아줌마가 우리를 국극단에서 내쫓을지도 몰라.
고심 끝에, 내가
-혜랑아, 우리 엄청 슬픈 생각 해볼까?
-슬픈 생각?
-응, 슬픈 생각. 그럼 웃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우린 잠시 눈을 감고 슬픈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상하지. 장난같이 한 그말에 눈을 감자마자 나는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은 순간이 기억났어.
혜랑이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에 찾아갔던 그날.
문득 그날 밤이 생각나서 마음이 슬픔으로 차오르는 것이다.
-찾았어, 슬픈 생각?
-응
-나도.
혜랑이 대답한다.
-뭐야, 너의 슬픈 생각은.
내가 묻자 혜랑이 대답한다.
-나 은재 아빠한테 시집가기 전에, 너 마지막으로 찾아온 날.
나는 갑자기 마음이 아프고 철렁하여,
혜랑일 바라보았다.
-너 기억 못하지.
혜랑이가 말했다.
-아냐, 기억나.
-기억 나?
-어떡하지, 혜랑아, 나 너 없으면.
우린 마치, 그 때로 돌아간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혜랑이 내게 입을 맞추었어.
-사랑해. 옥경아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사랑해 혜랑아.
나도, 사랑해.
나는 마음 속에서 백번은 외쳤던 것 같아.
나는 소파에 앉아있던 혜랑이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어.
-오늘은 잠들지 않을 거야.
혜랑은 웃으며
-나도 바라는 바야.
-사랑해. 혜랑아.
습관이란,
그래
습관이란.
이것은 모두 꿈일 뿐이다, 이젠.
그러나 달콤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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