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차주경 기자] 산업과 정보통신기술이 만나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든다. 농업도 그렇다. 논밭에 비닐하우스를 세워 온습도의 변화를 최소화한 덕분에, 우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농작물과 과일을 먹는다. 여기에 환경을 감지하고 관리하는 각종 센서와 무선 통신, 데이터와 자동화 등 정보통신기술을 더한 것이 ‘스마트팜’이다.
비닐하우스는 농업에서 계절과 시기의 제약을 없앴다. 수확량도 늘렸다. 스마트팜은 계절과 시기의 제약을 없앨 뿐만 아니라, 가뭄이나 폭우 등 농업의 가장 큰 위험인 환경 변수를 통제한다. 나아가 농작물을 기를 때 소모하는 자원을 줄이고, 농부가 더 적은 수고를 들이고도 더 많은 수확을 거두도록 이끈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스마트팜에서 자라는 딸기
정보통신기술이 주는 편의는 바로 체감 가능하지만, 농업의 성과인 농작물을 얻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스마트팜 기술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한다. 스마트팜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이 기술이 기존의 농업을 어떻게 바꿨고 또 바꿀 것인지 엿보고 싶다면 경기도 양평에 있는 ‘퍼밋랜드’를 가 보자.
퍼밋랜드는 스마트팜 스타트업 ‘퍼밋(FIRMMIT)’의 연구실이다. 이 곳에서 퍼밋은 스마트팜의 ‘설비 제작 기술’과 딸기를 포함한 농작물의 수확량을 높일 ‘재배 기술’을 함께 연구한다. 이어 퍼밋은 소비자들이 스마트팜의 위력을 체감하도록, 농작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딸기 수확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 곳에서 얻은 기술과 경험이 오늘날 퍼밋의 성장 기반이 됐다.
창업 직후인 2018년 퍼밋의 매출은 1억 3,000여만 원이었다. 불과 2년 후인 2020년, 퍼밋은 매출을 42억 2,000만 원으로 수십 배 늘렸다. 농민을 위한 농촌·실외 스마트팜뿐 아니라 도시에서 요긴하게 쓸 도시·실내 스마트팜, 일반 소비자를 위한 가정용 아쿠아포닉스(수경 재배)스마트팜 등 실용적인 기술을 여럿 선보인 덕분이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입구
퍼밋의 연구 결과는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의 농식품 창업 콘테스트를 포함한 여러 기술 경진 대회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수상은 자연스레 하이트진로와 우리은행 등 이름 난 기업의 협업 혹은 투자 러브 콜로 이어졌다. 이를 토대로 퍼밋은 2022년 매출 200억 원을 노린다. 퍼밋이 이런 성과를 낸 원동력, 스마트팜으로서의 기업 문화와 사업을 하는 가치관을 퍼밋랜드에서 엿볼 수 있다.
퍼밋랜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색다른 모습의 딸기 농장이 나타난다. 대개 딸기는 ‘땅’에서 자란다고 여긴다. 그런데, 퍼밋랜드에서 자라는 딸기는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에 실려 ‘공중’에서 자란다.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은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밭고랑’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평소에는 딸기가 심어진 행잉 거터를 위로 올려 스마트팜 위쪽에서 기른다. 그러면 딸기가 스마트팜 위에 있는 따뜻한 공기를 쬐고, 풍부한 산소를 마시며 잘 자란다. 딸기를 관리하거나 수확할 때에만 행잉 거터를 내린다. 바닥과 공중을 작업 공간으로 쓰니, 위와 아래에 하나씩 기존보다 두 배 많은 밭고랑이 만들어진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내부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
여기에 퍼밋이 개발한 딸기 농법이 더해진다. 여러 센서가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 내부는 물론, 딸기가 뿌리를 내린 배지의 온·습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양액기와 LED가 영양분을 주고 스마트팜은 딸기가 잘 자라도록 생육 과정 전반을 자동으로 한다. 환경 변수들을 제어하므로,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은 이론상 전국, 아니 세계 어느 곳에서든 농작물을 기르도록 돕는다.
백문이 불여일견.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이 기른 딸기를 볼 시간이다. 행잉 거터를 내리자 진한 딸기 내음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가지마다 알이 굵은 딸기가 주렁주렁 달렸다. 힘 없이 매달려 물러지거나 땅에 떨어진 딸기가 하나도 없는 점, 딸기마다 크기와 빛깔, 향과 윤기가 균일하게 좋은 점이 인상 깊었다.
딸기를 따고 있는데, 퍼밋을 이끄는 박선기 대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웃으며 반겼다. 그의 첫 인상은 첨단 스마트팜 스타트업의 대표라기보다는, 넉살 좋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청년 농부에 가까웠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를 소개하는 박선기 퍼밋 대표(가장 오른쪽)
박선기 대표는 자신이 설계한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의 장점을 소개했다. 퍼밋의 농작 기술로 딸기를 기르면, 한 주당 400g 남짓인 딸기 수확량이 두 배인 800g 선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밭고랑의 개수가 두 배에 수확량이 두 배다. 환경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일반 딸기 농장보다 더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다.
딸기 수확량이 많을 뿐 아니라, 더 적은로 딸기를 수확 가능한 장점도 있다고 한다. 퍼밋랜드에 있는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의 면적은 약 500㎡, 150평 즈음이다. 퍼밋은 농가에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을 보급할 때 약 2,000㎡, 600평 규모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 정도로 넓은 스마트팜을 관리하고 딸기를 수확하는데 필요한 인력은 단 두 명이다. 딸기 재배와 시설 관리 절차 거의 모두를 자동·고도화한 덕분이다.
퍼밋의 딸기 스마트팜이 탄생한 배경에는, 박선기 대표의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다. 원래 그는 체육 대학교에 입학해 수영 선수가 되려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돈을 벌려고 에어컨 설치 기사로 일했다. 이 때 스마트팜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 기술과 꼼꼼한 유지 보수 관리 습관을 익혔다. 지금도 그는 여느 설비 공사는 스스로 한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내부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에서 수확한 딸기
이익보다 사람을 먼저 얻어야 한다는 철학을 세운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호주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며, 우리나라로 돌아와 화장품을 팔며, 귀농해 농사를 지으며 박선기 대표는 여러 차례 사람과 돈을 얻고 잃었다. 그리고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이익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다는 것,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박선기 대표는 매출을 늘리려고 스마트팜을 무리하게 판매하지 않는다. 스마트팜을 어떤 농가에든 적용 가능한 만병 통치약으로 소개하지도 않는다. 이 기술을 도입하려는 소비자와 상담 후 농작물의 생육 데이터를 만들고, 가장 알맞은 스마트팜 설비를 설계하고 시공과 관리까지 책임 진다. 퍼밋의 스마트팜을 선택한 농부들을 파트너로 여기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 덕분에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완고한 노령의 농부도, 갓 귀농해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청년 농부도, 스마트팜을 궁금해하는 장년의 농부도 박선기 대표에게 스스럼 없이 연락해 농담을 주고받고 자문을 구한다. 퍼밋이 농부들에게 준 신뢰와 편의, 스마트팜 기술이라는 투자는 농협과의 파트너십과 판로 확장이라는 이익으로 돌아왔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딸기 체험 공간
기술 성과와 연구개발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 농부와 농협 등 현장 파트너는 물론, 대기업을 포함한 규모 있는 재무 파트너도 생겼다. 사업 규모가 커졌으니, 자연스레 활동 분야를 넓히고 매출 위주의 영업 전략을 펼쳐 성장을 노릴 법도 하다. 하지만, 박선기 대표의 생각은 정 반대다. 잘 하는 것에 집중해 성과를 내면서 천천히, 내실 있게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스마트팜 기업은 농업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상력으로 사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뼈대를 세우고 경험이라는 살을 덧붙여 실제 도움을 주는 사업을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철학이 퍼밋의 성장 비결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박선기 대표는 항상 ‘어쩌다보니 사업이 잘 됐다. 운이 좋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팜 기술과 농사 방법을 물어보면 알기 쉬운 해설과 사례를 곁들여 유창하게 설명한다. 그가 얼마나 많은 농사 경험을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스마트팜 기술을 연구 개발했고 이 사업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 지를 짐작 가능하다.
경기 양평 퍼밋랜드 내부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에서 수확한 딸기
박선기 대표는 최근 품종을 개량한, 기존 딸기와 맛과 향이 다른 색다른 딸기를 개발 중이라고 한다. 딸기를 수확한 다음 맞는 휴식기에 행잉 거터형 스마트팜에서 재배할 만한 새로운 농작물 애플수박도 연구한다. 애플수박은 단 맛이 강하고 크기가 주먹 두 개 정도로 작다. 덕분에 딸기처럼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아 키운다. 이 농법을 농가에 보급하면, 농부들은 휴식기에도 애플수박을 기르며 새로운 수익을 얻는다.
농가와 함께 일 하며 이들의 고민을 해결하려 애 쓰는, 스마트팜 스타트업 대표이자 스스로가 농부이기도 한 박선기 대표의 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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